“동정삼매로 무심을 증득하라”

 

묘관음사 입구는 우람한 대나무 숲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름드리 대나무들이 하늘로 쭉쭉 뻗어 있는 모습은 이곳에 머물렀다는 일곱 분의 선지식들의 기상인 듯 했다. 그 기상을 이어받아 묘관음사 길상선원의 비상을 도모하고 있는 혜오 스님<사진>은 경내 제일 안쪽에 세워진 염화실에 주석하며 사부대중을 맞고 계신다. 스님을 친견해 ‘공부의 길’을 물었다.
‘수행은 갈무리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해제를 앞둔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결제가 ‘정(靜)’의 공부라면 해제는 ‘동(動)’의 공부입니다. 형태가 다를 뿐, 본원(本願)은 다를 바 없습니다. 수행자 스스로 발을 묶고, 입을 묶고, 나태한 마음을 묶는 것이 ‘정’이라면, 이를 풀고 본래 구속됨이 없는 진리로 돌아가는 것을 ‘동’이라고 합니다. 참선이란 동정삼매(動靜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 일상삼매(日常三昧)가 될 때 화두가 성성해지고 진일보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산문을 나서자마자 문경 저잣거리에서 ‘동’의 공부에 매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알게 된 것인데, 일상에서 화두는 움직이는 마음을 붙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마음 변화의 간극을 좁혀주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부동심(不動心)이 되지 않겠습니까. 화두를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동’의 공부란 참 어렵습니다. 특히 정진력이 부족한 대중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참 납자라면 한 곳에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 정도 머무르며 ‘무쇠 소에 바늘을 꽂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정진하는 습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곡견(曲見)의 근기를 직견(直見)의 근기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곡견이란 ‘마음을 굴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금잔을 보고 어떤 이는 ‘금으로 만들어진 잔’이라는 데서 생각을 멈추지만, 다른 이는 ‘금으로 만든 잔→팔면 이익→부자’ 등으로 생각을 빠르게 이동합니다. 공부란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해, 비워버리고[무심(無心)], 결코 ‘방일(放逸)’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심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무심은 단순하게 ‘마음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어떤 경우에도 끄달리지 않고 완전히 화두로 뭉쳐 있을 때를 진정한 무심이라고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정진하다 무심의 경지에 이르면 일체 모든 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며, ‘매일 매일 좋은날’이 됩니다. 무심을 넘어서면 평등법(平等法)을 만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도를 깨닫는 것은 여반장(如反掌)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무척 어렵습니다. 그런 까닭에 화두를 들고 열심히 참선을 해야 합니다.

불법(佛法)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불자라고 하면서도 불교를 너무 모릅니다. 참선은 왜 하는지, 또 불법의 대의는 무엇인지 그 이치를 알아야 발심을 하고 신심이 깊어져서 공부길로 나아갈 수가 있는데도 제대로 알지를 못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대근기라서 큰스님이 한 말씀하면 그대로 의심해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즉, 부처가 뭐냐? 했을 때, ‘똥 막대기’, ‘뜰 앞 잣나무’ 하면 왜 그렇게 말하는지 그대로 의심을 해서 들어갔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불(佛)이란 청정하고 깨끗한 것이며, 누구라도 그 깨끗한 것은 가지고 있는데 다겁생을 통해 지어진 업력 때문에 묻혀 있을 뿐입니다. 태양이 깨끗한 마음이라면 구름이 낀 날은 태양이 안보이듯이 구름 때문에 중생 세계와 부처 세계가 분할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 법(法)이란 청정한 데서 나오는 빛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빛도 다겁생 동안 지어진 업력에 가리면 소용이 없어진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이 말하는 도(道)란 깨끗한 마음에서 나온 이 광명이 어느 곳을 가도 걸림이 없이 골고루 비춰줬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한다면 화두를 꼭 들어야 합니까?
우리 몸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 몸을 조정하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눕니다. 이것은 원효대사 『기신론소』에 나오는데 일하는 몸[사사대]과 생각하는 몸[추사대]을 말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지수화풍으로 흩어지면 사사대는 소멸됩니다. 우리 몸이 사사대 뿐이어서 지수화풍으로 흩어져 버린다면 공부할 게 뭐 있으며 부처님은 어디에 있겠는가 하겠지만 우리는 추사대가 있기 때문에 공부해야 합니다. 추사대를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의 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꿈에서 차도 타고 친구도 만나고 있다면 방에서 자는 것은 또 뭡니까? 친구를 만나고 돌아다니는 것은 추사대라 하고 방에 자는 몸을 사사대라 합니다. 일하는 몸은 죽으면 소멸되지만, 생각의 몸은 선업을 지으면 선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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