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암(海巖)에 부딪치는 물소리를 좇으며 ‘법융(法融)’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해풍(海風)이 얼굴을 때리는 순간 의상 대사(625~702)의 법성계 구절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나 속에 모두 있고 여럿 속에 하나있어,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이네(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한 티끌 가운데에 시방세계 담겨있고, 일체의 티끌마다 시방세계 들어있네(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이 구절이라면 법융의 뜻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거침없이 가고 오는 것이 ‘마음’이고 보면, 법융은 무애(無碍)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상념은 법융사 표석을 보는 순간 멈췄다. 표석은 태종대 유원지 광장 좌측 순환도로에서 시작된 콘크리트 포장도로 초입에 서 있었다. 법융사 경내로 이어질 것 같은 그 길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잔잔한 해풍과 송림(林)이 함께 어우러졌다. 콘크리트 포장도로에 들어서자 까마귀가 눈에 들어왔다. 도로 양쪽에 세워진 철조망 사이를 서성이던 까마귀는 낯선 이방인이 싫었던지 이내 날개를 퍼덕이며 철조망을 넘어 소나무를 넘어 저편으로 날아갔다. 대체 어디를 향한 것일까. 태종대의 깎아 세운 절벽과 기괴한 해암을 찾아간 것일까.
잠시 후 담쟁이덩굴이 감싸고 있는 아치형의 조형물이 보였다. 마치 세월의 실타래로 옷을 입은 일주문처럼 보였다. 아치형 조형물과 맞닿아 있는 담장 너머로 누각의 상단부가 비죽 보였다. 종각이다. 법융사의 법당과 요사는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두 건물의 규모는 다른 사찰과 비교해 매우 왜소했다. 그러나 경내를 휘감은 금강경 독송 소리가 너무도 경건해 크고 작음으로 사찰 규모를 판단하게는 하지 않았다.
법융사는 30여 년 전 도명 스님(법융사 회주)의 원력으로 천혜의 절경 부산 태종대에 세워진 도량이다. 당시 태종대 일대를 만행하던 도명 스님이 사찰 터로써 안성맞춤인 땅을 발견해 매입하면서 법융사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 땅에는 불심 돈독한 노옹(老翁)이 묘목을 가꾸며 살고 있었는데, ‘도량을 열고자 한다’는 도명 스님의 한마디에 흥쾌히 1000여 평의 땅을 양도했다. 매입 당시 도명 스님은 수행과 포교의 불국도량을 세울 요량으로 부풀었다.
그런데 그 염원은 1년도 되지 않아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태종대 일대가 녹지와 유원지로 지정되면서 합법적인 건축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법은 납자의 초심을 결코 꺾지 못했다. 도명 스님은 ‘법성이 원융해서 시비의 상도 없고, 선악의 상도 없이 완전히 여의인 도량’이고자 한다는 뜻에서 ‘법융’이라는 절 이름을 내걸었다. 그리고 ‘부족하더라도 사부대중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은 있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도둑 건축’을 시작했다. 야심한 밤마다 목수와 함께 건자재를 이고지고 들여와 종각, 법당, 요사를 지었다. 최소한의 수행 공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욕심 없는 불사였지만, 요사만 3번씩이나 뜯겨야 할 만큼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때가 70년대 말, 80년대 초였다.
법당과 요사, 종각을 짓고서야 최소한의 사격을 갖췄다 싶었던 도명 스님은 그 길로 바랑을 매고 전국 선방을 다녔다. 관응 스님, 탄허 스님, 용운 스님, 성수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 회상(會上)에 머물기를 20여 년. 그리고 90년대 중반 도명 스님은 수행과 포교의 초심을 실천하기 위해 법융사로 돌아왔다. 스스로는 출재가의 공부를 다잡는 한편 포교와 불사를 전담할 주지 스님을 찾아 절 살림도 맡겼다. 모두 초심의 뜻을 세우겠다는 일념에서였다. 지금은 수·토요일마다 10명 안팎의 어린이·청소년들이 절에서 한문을 배우고, 초하루·보름법회 외에도 시시로 도량을 찾은 신도들은 『초발심자경문』과 『금강경』을 공부한다. 또 산철 때이면 어김없이 주지 스님의 도반 스님들이 방문해 결제 때의 용맹심으로 탁마를 갈무리하고 있다. 수행과 포교의 도량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이곳을 찾아온 스님들과 불자들이 마음공부에만 매달릴 수 있는 반듯한 도량을 만들고 싶다”는 주지 스님은 “법당과 선방 등 법융사의 사격이 일신할 수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스님은 이미 힘든 과정을 밟으며 지금의 법당 뒤편으로 대웅전과 선원을 지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주지 스님의 안내로 둘러본 법당 및 선원 신축지에는 남녘의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고, 따사로운 햇살도 내리고 있었다. 이름 모를 산을 넘어 푸른 바다에서는 뱃고동 소리가 들여왔다. 신축지에서 무성한 잡초 사이로 종각이 보였다. 마치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 종소리에는 어떤 원력과 신심이 묻어 있을까. 부처님 앞에서 오래도록 절을 하고 있는 가사 장삼을 두른 대중 스님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에도 그만큼의 원력과 신심이 담겨 있을 것이다.

법융사 | 부산 영도구 동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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