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파타차라 스님은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와 발을 씻었습니다. 물을 발에 붓자 물은 발을 타고 땅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더니 이내 땅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발에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물은 조금 더 멀리 흘러나가다 이내 땅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스님은 대야에 남은 물을 마저 발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물이 조금 더 멀리까지 흘러나가더니 땅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첫 번째 물은 이내 땅속으로 사라졌고, 두 번째 물은 조금 흘러가다 사라졌고, 세 번째 물은 그보다는 조금 더 멀리 흘러가다 그 역시 땅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파타차라 스님은 전율했습니다. 어떤 것은 금방 없어지고 어떤 것은 오래 머물다 없어집니다. 조금 더 머물기도 하고 그리 머물지도 못한 채 사라지기도 합니다. 결국은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여느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현상인데 이 스님은 그런 광경을 보고 전율했지요. 땅속으로 물이 스며들어 흔적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스님은 “아, 그래. 그렇게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마는구나. 어떤 것은 세상에 오래 머물다 사라지고, 어떤 것은 속절없이 이내 사라지는구나. 그것이 인생이로구나.”라며 탄식했습니다. 대체 스님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파타차라 스님은 코살라국 사밧티시의 명망 있고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지요. 부모는 딸의 행복을 위해 집안에 어울리는 청년과 짝을 맺어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집안의 하인과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신분제도가 엄격하던 인도에서 절대로 인정받을 수 없는 관계였지요. 결국 두 남녀는 멀리 도망쳐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첫 아이를 낳고 이내 둘째 아이를 임신한 아내는 출산이 임박하자 친정이 그리웠습니다. 부모님도 이제는 받아주시리라는 생각에 친정에 가서 해산하고 싶었던 아내는 남편을 졸랐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이 집을 나선지 오래지 않아 아내에게 산통이 찾아왔고 결국 길 위에서 둘째 아이를 낳고 말았지요. 하필 거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다급하게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이 새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그 비를 쫄딱 맞으며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큰 아이를 걸려서 남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외딴 곳에서 발견한 남편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밤 뱀에게 물려 절명하고 만 것이지요.

‘내가 친정에 가겠다고 나서지만 않았어도….’

파타차라는 통곡을 했지만 마냥 정신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지요. 두 아이를 어떻게 해서라도 안전한 친정으로 데려가야 했습니다. 도중에 드넓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밤새 내린 큰 비로 강물은 불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큰 아이를 일단 강둑에 앉혀 놓은 뒤 당부했습니다.

“여기서 꼼짝하지 말고 엄마를 기다려. 알았지? 아기부터 건네 놓고 엄마가 얼른 와서 너를 데려가 줄 테니까.”

파타차라는 신신당부한 뒤에 갓난아기를 안고서 불어난 강을 간신히 건너갔습니다. 건너편 강둑에 아기를 내려놓고 이내 돌아섰지요. 그런데 아까부터 매 한 마리가 아기를 노리고 있었던 것을 파타차라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큰 아이를 데리고 오려고 강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매가 갓난아이를 채서 날아가 버렸습니다. 불어난 강물 한 가운데에 있던 파타차라는 그 광경을 보자 비명을 지르며 두 팔을 저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건너편 강둑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큰아이는 엄마가 강 복판에서 두 팔을 휘젓는 모습을 보더니 자기를 부르는 신호라 생각하고 불어난 강물 속으로 들어섰습니다. 거센 물살은 어린 아이를 휩쓸어 가버렸습니다.

파타차라는 순식간에 두 아이를 모두 잃었습니다. 너무나도 사랑해서 도망까지 쳐서 연분을 맺은 남편은 밤새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아장아장 걷던 큰 아이는 강물에 휩쓸렸고 막 태어난 작은 아이는 엄마 젖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매가 채어 갔습니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붙잡을 수도 없었고 말리지도 못했습니다.

‘모두가 떠나갔네. 모두가 사라졌네.’

너무 큰 충격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모두가 떠나갔다고 중얼거리며 파타차라는 친정을 향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품에 안겨 이 기막힌 슬픔을 어떻게든 쏟아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만난 어떤 사람에게서 지난밤 쏟아 내린 폭우로 친정집이 무너져 가족이 몰살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막 화장을 했고 화장터에서는 아직 연기가 솟고 있다는 전언이었지요.

파타차라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다 죽었어, 다 죽었어.”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없이 울부짖다가는 다시 중얼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지요. 옷은 어느 사이엔가 다 벗겨졌는데 벌거숭이가 된 줄도 모르는 파타차라는 슬픔에 짓눌려 초점을 잃는 눈길을 허공에 던진 채 그렇게 온 사방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녀의 비극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미친 여자가 어딜 함부로 나다니는 게야!”라며 호통을 치고 밀쳐냈습니다. 벌거벗은 채로 헤매고 다니는 파타차라에게 사람들은 오물을 던지고 흙을 뿌려대며 쫓아냈습니다.

그 심정을 어찌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내 곁을 떠났을 때 겪는 심정을.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고,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가 없고, 딱 한 번이라도 나의 부름에 대답했으면 좋으련만 죽은 사람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랑하지 말 걸,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식을 낳지 말 걸,

이럴 줄 알았으면 사랑하는 부모님을 만나러 오지도 말 걸.

 

사랑하는 사람, 그리운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습니다. 애별리고(愛別離苦)의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간혹 이렇게도 말을 하지요.

“이제 그만 잊어버리세요. 이미 떠나간 사람을 어쩌겠어요.”

하지만 이미 떠나갔다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애별리고인 것입니다. 마음에서 놓을 수 없고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어 ‘한 달만 더 살다 갔더라면, 1년만, 5년만이라도 더 살다 갔더라면….’ 하며 아쉬워하지만 부질없습니다.

파타차라의 경우는 하룻밤 새 비극이 몰아닥쳤기에 그 슬픔의 무게를 감당해 낼 수가 없었지요. 반은 실성한 상태로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던 파타차라의 발길이 어느 사이 기원정사로 향했습니다. 부처님이 마침 그곳에서 대중에게 법문을 하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실성한 여인이 소란 피우기 전에 말려야 한다며 사람들이 막아섰습니다.

“그 여인을 막지 마십시오.”

부처님의 조용한 음성에 사람들이 길을 열었고, 파타차라는 문득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벌거벗은 제 모습을 알아차리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누군가가 건네준 윗옷을 두른 파타차라는 부처님에게 나아갔습니다. 그제야 깊고 깊은 곳에서 응어리져 있던 서러움이 터져 나왔습니다. 파타차라는 폭포처럼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습니다.

“부처님, 저는 이제 누굴 믿고 삽니까? 누구에게 의지해서 살아갑니까? 남편은 길에서 죽었고, 큰 아이는 물에 휩쓸렸고, 작은 아이는 매가 채어갔습니다. 친정 부모님은 집이 무너져 돌아가셨습니다. 제게는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파타차라는 통곡했습니다.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그녀를 달래려고 나설 수조차 없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파타차라의 통곡이 흐느낌으로 잦아들고 눈물도 천천히 말라가자 부처님이 말했습니다.

“파타차라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의지처가 될 곳으로 잘 찾아왔습니다. 이곳에 기대고 의지해서 지내십시오. 남편도 아이도 그 누구도 그대의 의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속절없이 떠나가게 마련입니다. 그대가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며 흘린 눈물은 저 사대양의 바닷물보다도 많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자분자분 파타차라를 다독였습니다. 우리는 자식을, 남편을, 아내를, 부모를 의지해서 한 세상 살아가지만 과연 이런 인연들이 내가 기댈 만큼 영원하고 온전할까요. 떠나가더라도 떠날 날짜를 알려주고 갈까요. 지금 떠나지 말라고 붙잡으면 영원히 떠나지 않을까요. 인연이 다하면 속절없이 떠나갑니다. 존재하는 것은 소멸하게 마련이요. 모인 것은 흩어지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자기 앞에 닥치면 거부하고 부정하며 울부짖습니다.

슬픔에 요동치던 파타차라의 마음이 부처님의 말씀으로 차분해졌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처를 승가로 정했습니다. 생사를 뛰어넘고 슬픔과 괴로움을 극복하는 길을 닦는 승가에 들어가 부처님의 제자로서 수행하기로 하였지요. 비구니가 된 파타차라는 슬픔의 강을 건너 열반언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앞서 소개한 것처럼 탁발에서 돌아와 대야에 물을 담아 발을 씻던 그녀에게 문득 조용한 일깨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 존재는 태어나자마자 삶을 마치고, 어떤 존재는 조금 삶을 영위하다 죽고, 어떤 존재는 그나마 긴 삶을 유지하다 죽기도 한다는 것을…. 길고 짧음의 차이일 뿐 그 끝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이 사실 앞에 그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다는 현실을….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살아 있어서 슬픔에 몸부림치지만 이렇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내 자신도 언젠가는 그 길을 걷게 된다는 엄연한 이치를….

이런 이치를 관찰하던 파타차라 스님은 마음을 온전하게 확립했습니다. 그리고 등불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등불을 껐습니다. 등불이 소멸된 것처럼 파타차라 스님의 마음은 생사의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자신의 의지처를 해탈열반에서 찾아 온전한 위로와 평화를 얻었습니다. 혹시 지금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 슬픔의 한가운데에 계신가요? 그 지독한 아픔을 겪으며 눈물 흘린 파타차라 스님의 이야기가 조금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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