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산 보원사지 전경. 법인국사탑과 탑비가 보인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저서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 내포(內浦)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내포는 서산과 예산의 경계를 이루는 가야산(伽耶山)이 품은 열 고을을 이르는 말입니다. 서산, 해미, 태안, 면천, 당진, 홍주, 덕산, 예산, 신창 등이 그곳이지요. 이중환은 “이곳(내포)의 땅은 기름지고 평평하면서 넓다. 또한 소금과 물고기가 많아서 대를 이어서 사는 사대부가 많다.”고 평했습니다. 그만큼 문물이 풍부하고 살기 좋은 곳이란 의미겠지요.

아흔아홉 암자 번성한 내포의 중심 가야산

가야산은 내포의 중심이자, 내포를 상징하는 산입니다. 가야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지내던 중사(中祀)의 대상 중 하나였습니다. 중사는 국토의 네 방위에 있던 명산에 지내던 제사인데, 서쪽 명산이 가야갑악(伽耶岬岳), 즉 가야산입니다.

‘가야’라는 이름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부다가야(Buddhagaya) 인근 가야산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가야산’은 ‘상왕산(象王山)’으로도 불립니다. 원래 가야산과 상왕산은 서로 맞닿은 다른 산이지만, 예로부터 두 산을 아울러 가야산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가야’라는 이름이 불교에서 유래했듯, ‘상왕’이라는 이름도 불교에서 기원했습니다.

《불교대사전》(홍법원 펴냄)에 따르면 ‘가야(伽耶, gayā)’는 소의 일종입니다. 코끼리는 ‘gaja’인데, 산스크리트어가 방언화된 프라크리트어에서 ‘ya’와 ‘ja’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가야’를 관례적으로 ‘코끼리〔象〕’로 번역했다 합니다. ‘대상왕’은 부처님을 의미합니다.

산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가야산 그 주변에는 상왕산, 원효봉, 보현동 등 불교와 관련 있는 지명이 여럿 남아있고, 가야사지, 보원사지, 원효암지, 백암사지, 개심사, 일락사,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등 여러 불교유적과 유물이 전하고 있습니다. 흔히 가야산을 ‘호서불교의 성지’라고 부르는 것도 ‘가야’, ‘상왕’이라는 이름의 두 산과 그 품에 자리한 수많은 불교유적과 유물 때문일 것입니다.

내포문화숲길은 내포의 역사와 문화, 생태를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서산시와 당진시, 홍성군, 예산군 등 4개 시군이 함께 개설한 숲길입니다. 내포문화숲길은 ‘백제부흥군길’, ‘원효깨달음길’, ‘내포천주교순례길’, ‘내포역사인물동학길’ 등 4개 테마길로 나뉘는데, 그중 ‘원효깨달음길’ 제5코스는 예산 덕산도립공원 주차장에서 예산 가야사지(伽耶寺址)와 서산 보원사지(普願寺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거쳐 서산 용현계곡 입구에 이르는 약 10km 거리의 숲길입니다.

내포문화숲길 홈페이지(www.naepotrail.org)를 보면 “해양으로부터 전해지는 불교가 처음 도착하여 융성한 곳이 가야산”이라며, “(원효깨달음길은) 원효 대사의 깨달음 흔적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절과 절, 옛 절터와 옛 절터를 연결한 길”이라고 소개돼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가 처음 도착한 곳’(뒤에 언급하겠지만 내포지역이 중국과의 교역로였으니 중국에서 백제로 전해진 불교가 처음 도착한 곳이라는 뜻이면 이해됩니다)라거나 ‘원효 대사의 깨달음 흔적’을 거론하니 그 작명법이 생뚱맞다 싶습니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덕산도립공원주차장에서 출발해 800m쯤 오르면 가야사의 옛터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발굴조사 후 한 곳에 모아둔 석조 부재와 안내문이 이곳이 절터임을 알려줄 뿐 절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 남연군 묘에서 바라본 가야사지 전경.

나옹 스님이 조성한 금탑이 있던 가야사

가야사지는 절보다는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 1788~1836)의 묘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가야사는 통일신라 말 고려 초 수미산문(수미산문)의 개산조 진철대사 이엄(眞澈 大師 利嚴, 270~936) 스님이 출가한 사찰이자 동리산문(桐裏山門)의 3조 광자 대사 윤다(廣慈 ⼤師 允多, 864~945) 스님이 구족계를 받은 유서 깊은 절입니다. 한때는 수덕사보다 규모가 컸다고 전하지요. 《고려사절요》에 고려 명종 7년(1177) 국가의 과도한 수탈에 반발해 난을 일으킨 공주 명학소(鳴鶴所, 소는 특산물을 생산해 국가에 공납하는 지역을 말합니다.)의 천민 망이(亡伊), 망소이(亡所伊)가 황리현(⿈驪縣, 지금의 여주), 진주(鎭州, 지금의 진천) 등과 함께 가야사를 점령했다는 기사가 기록된 것을 보면, 당시에도 가야사는 규모가 꽤 크고 중요한 사찰이었던 듯합니다.

절터에는 다른 절과 달리 작은 언덕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는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나옹 스님이 조성한 오층금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영조 때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엮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윗머리 부분에 구리를 씌웠고, 네 구석에 철사 줄을 매달아 풍경을 드리웠다. 장대한 모양과 기묘한 생김새가 평범한 탑과는 다르다.”고 금탑이 묘사돼 있습니다. 또 정조 23년(1799)에 왕명으로 편찬된 《범우고》에는 “매우 빼어난 철첨석탑(鐵尖石塔)으로 탑의 사면에 감실을 만들어 석불을 봉안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오층금탑은 조선 헌종 때 파괴되고, 가야사도 방화로 함께 폐사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참 어이없습니다. 흥선군이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二代天子之地〕’라는 이곳에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의 묘를 이장하려고 금탑을 부수고 절을 불지르는 훼불한 것이지요.

▲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가야사를 폐사시키고 오층금탑지에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장했다. 남연군 묘.

부친 묘 이장하려고 훼불 자행한 흥선대원군

그 전말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죽음으로 항거한 문인인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의 저서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비교적 소상히 전하고 있습니다.

안동 김씨 일가의 세도정치에 숨죽이며 파락호(破落戶)로 지내던 흥선군은 당대의 명지관 정만인에게 부탁해(일설에는 한 지관이 찾아왔다고도 합니다.)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명당자리를 얻었습니다. 당초 정만인은 만대에 영화를 누릴 자리〔萬代榮華之地〕를 함께 알려주었는데, 흥선군은 주저 없이 2대 천자가 나올 자리를 선택했다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가야사지 금탑지입니다.

흥선군은 헌종 10년(1844) 남연군의 묘를 오층금탑 뒤 기슭으로 옮깁니다. 그리곤 재산을 모두 팔아 마련한 2만 냥 중 1만 냥을 주지에게 주어 절을 불태우도록 했다(일설에는 충청감사에게 선물을 주어 가야사 스님들을 내쫓고, 마곡사 승려들을 강압해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합니다.) 하지요. 그리고 이듬해 오층금탑을 부순 후 그 자리에 남연군 묘를 다시 옮겼습니다. 오층금탑에는 백자 두 개, 단지 두 개, 사리 세 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흥선군이 뒷날 이건창에게 말하길 “오층금탑을 쓰러뜨리니 그 속에 백자 두 개와 단지 두 개, 사리 3과가 있었다. 사리는 작은 머리통만한 구슬이었는데 매우 밝게 빛났다. 물속에 잠겨도 푸른 기운이 물을 꿰뚫고 끊임없이 빛났다.”고 말했다 합니다.

오층금답을 부순 흥선군은 지관의 조언에 따라 도굴을 막고자 철 수 만 근을 붓고 강회를 비벼 넣었다 합니다.

석문봉을 주산으로 하고, 원효봉과 옥양봉 줄기가 둘러싼 남연군 묘에 올라서면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이가 봐도 한 눈에 명당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야사지에서 북쪽으로 200m 남짓 떨어진 곳에 ‘상기리 미륵불’로 불리는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있습니다. 이 입상은 북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가야사가 불 탈 때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돌아섰다고 하지요. 또는 절터의 기가 골짜기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거나, 북쪽 계곡에서 들어오는 병마(兵馬)를 물리치려고 조성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

흥선군이 묘를 이장한지 7년 만인 철종 3년(1852) 흥선군은 둘째 아들 재황(載晃)을 얻었습니다. 그가 바로 고종입니다.

남연군 묘는 이장 23년만인 고종 5년(1868) 통상을 요구하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 E. J.)가 도굴하면서 역사의 현장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오페르트는 두 번이나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하자 남연군 시신과 부장품을 볼모로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오페르트는 미국인 젠킨스(Jenkins, F.)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병인사옥 때 탈옥한 프랑스 선교사 페롱(Feron)과 조선인 천주교도, 선장 묄러(Moeller), 조선인 모리배 2명, 백인 8명, 말레지아인 20명, 유럽, 필리핀, 중국선원 등 140명에 이르는 도굴단을 구성해 덕산면 구만포에 상륙합니다. 러시아군을 사칭한 이들은 덕산군청을 습격해 군기를 탈취하고 민가에서 도구를 약탈한 뒤 도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덕산군수 이종신(李鍾信)과 묘지기, 주민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흥선군이 이장할 때 단단하게 비벼 넣은 석회를 부수지 못해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합니다.

오페르트가 저지른 도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젠킨스는 미국인에게 고발당하고, 페롱은 본국으로 송환됐습니다.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 한 사실을 알게 된 흥선군은 이후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 흥선군 이하응이 가야사를 불태우자 뒤돌아 섰다는 ‘상기리 미륵불’. 미륵불로 불리나 관세음보살이다.

2대 천자 ‘영화’ 얻었으나 조선왕조 멸망 ‘비극’

권력을 향한 흥선군의 욕망은 천년 고찰을 폐사시키는 악행으로 이어졌고, 고종의 즉위와 집권의 디딤돌이었던 남연군 묘는 이방인이 도굴하는 참담한 일을 겪었습니다. 지관의 말대로 흥선군은 후손이 2대에 걸쳐 천자가 되는 영화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2대 천자를 끝으로 500년 왕조가 멸망하고, 부친의 묘소가 파헤쳐지는 것을 보았으니,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 비극이자 오욕이겠다 싶습니다. 욕망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모든 것을 불태우고야 맙니다. 남연군 묘 이장 사건은 욕망의 끝은 늘 파멸이요, 비극임을 보여줍니다.

남연군 묘가 파헤쳐지는 것을 지켜본 흥선대원군은 절을 불 태우고 오층금탑을 파괴한 것에 죄책감을 느낀 것일까요? 흥선대원군은 도굴 사건 3년 뒤(1871) 멀지 않은 곳에 보덕사를 지어 가야사를 잇도록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한 때 어린 아들 명복(命福, 고종의 아명)을 맡긴 인연이 있는 영도사(永道寺, 지금의 개운사) 벽담 도문(碧潭 道文, ?~?) 스님에게 수호일품대승(守護一品大僧)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보덕사 주지로 삼아 남연군 묘를 지키도록 했다고 합니다.

가야산은 한때 아흔아홉 곳의 암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불교가 융성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가야산의 암자가 100곳이 되면 모두 망한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100번째 암자가 백암인데, 이 암자가 창건되자 가야사를 비롯한 주변 모든 암자가 불타 없어졌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백암이 폐사된 것은 이인좌의 난 때 반역에 가담한 황진기가 승려로 위장해 이 절에 숨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흥성했던 가야산의 불교가 일순간 망했다는 전설의 이면에는 가야사를 불태운 흥선군처럼 불교 외적인 세력의 훼불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아니면 훼불의 원인과 책임을 불교계에 덮어씌우려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진실은 역사의 그늘 뒤에 숨어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 서산 보원사지 전경.

통일산라 말 이전 창건 화엄사찰 보원사

가야사지에서 내포문화숲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잣나무쉼터를 지나 퉁퉁고개를 넘어 7km쯤 가면 보원사지(普願寺址)에 다다릅니다.

보원사가 언제 창건되고 어떻게 법등이 이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소소한 기록마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문화재청 누리집(http://www.heritage.go.kr) ‘문화유산검색’에서도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 사이인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도,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있다.”고 애매하게 설명할 뿐입니다. 하지만 가지산문의 제3조 보조 체징(普照 體澄, 804~880) 스님의 탑비에 이 절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 이전에 이미 경영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보원사는 화엄종 사찰이었습니다. 최치원이 효공왕 8년(904)에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의상 스님의 화엄교학을 널리 알린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웅주(熊州) 가야협(伽耶峽) 보원사’를 언급하고 있고, 고려 화엄학의 대가 법인 국사 탄문(法印 國師 坦文, 900∼975) 스님이 입적하기 전 1년 간 이곳 보원사에 주석한 사실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화엄학은 의상 스님이 중국에서 들여온 뒤 화엄십찰을 중심으로 교맥을 이어갑니다. 그러다 통일신라 말에 이르러 남악(南岳)과 북악(北岳) 두 파로 나뉘어 사상적으로대립합니다. 탄문 스님은 균여(均如, 923∼973) 스님과 함께, 서로 대립하던 화엄학파가 고려 광종 이후 다시 일가를 이룬 뒤 배출한 걸출한 학승입니다.

▲ 서산 보원사지에서 주석한 고려 초 화엄학승 법인국사 탄문 스님의 사리탑.

걸출한 화엄학승 법인 국사 탄문

탄문 스님은 장의사 신엄(信嚴) 스님에게 출가해 화엄을 배웠습니다. 스님이 구룡산사에 머물며 《화엄경》을 강의할 때 새가 날아들고 범이 뜰에 와서 엎드리는 일이 있어서 ‘별대덕(別大德)’으로도 불렸다 합니다. 고려 태조도 스님을 ‘별화상(別和尙)’이라고 칭하며 존숭했고, 뒤를 이은 혜종, 정종, 광종 또한 스님을 지극히 공경했습니다. 특히 광종은 귀법사(歸法寺)를 지어 스님을 주지로 삼고, 이어 왕사와 국사에 봉했을 정도였습니다.

탄문 스님은 태조의 왕후 유 씨가 광종을 임신했을 때 편히 출산할 수 있도록 기도해줄 것을 부탁할 정도로 왕실과 가까웠습니다.

탄문 스님이 보원사로 거처를 옮길 때 “선교승(禪敎僧) 1000여 명이 영접하여 절로 들어갔다.”고 ‘법인국사탑비(法印國師塔碑)’에 묘사된 것이나, “쌀을 씻은 물이 흐르는 냇물을 마을 사람들이 끓여 숭늉으로 마셨다.”는 구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보원사는 사세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도 보원사지에는 탄문 스님의 사리탑과 탑비, 오층석탑, 당간지주, 석조 등 여러 유물이 남아 묵묵히 보원사의 사격(寺格)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탄문 스님이 주석할 시절 법당에 봉안돼 있었을 두 분의 철불은 일제 강점기 반출돼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보원사가 언제 폐사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조선 광해군 때 한여현(韓汝賢)이란 이가 지은 《호산록(湖山錄)》에 “보원사 경내에는 주전인 2층 고각 법당과 부도전, 나한전, 탑비 등이 배치돼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후 어느 때인가 법등이 끊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 위키백과. CC BY-SA 4.0

‘백제의 미소’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보원사지를 나와 1.6km 가량 내려가면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입구에 다다릅니다. 입구에서 계곡물을 건너 비탈을 150m 가량 올라가면 마애여래삼존상을 친견할 수 있습니다. 고 김원룡 박사가 《한국미의 탐구》라는 저서에서 ‘백제의 미소’라고 칭송한, 흔히 ‘서산 마애삼존불’로 불리던 백제시대 마애불입니다. 지긋한 눈으로 순례자를 바라보는 본존불의 미소가 재롱을 피우는 어린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온화한 미소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신라의 미소’로 불리는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가 떠오릅니다. 두 미소 모두 중생의 마음을 따뜻하고 평온하게 해줍니다.

10m가 넘는 암벽 동쪽 면을 깎아 조성한 마애여래삼존상은 《법화경》의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 즉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이라고 합니다. 《법화경》 사상이 백제사회에 유행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자료라 하지요.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멀지 않은 수덕사에 주석했던 혜현(慧顯, 573~630) 스님도 법화와 삼론(三論)에 통달했다 하지요. 스님은 당 도선 스님이 지은 《속고승전》에도 기록된 백제의 학승입니다.

중국 오가는 마지막 기착지이자 첫 관문 내포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는 용현계곡은 예로부터 백제와 중국을 잇는 교통로였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태안반도를 거쳐 백제의 수도인 공주와 부여로 가는 지름길이 용현계곡이었다 하지요. 원래 백제는 인천시 연수구에 있었던 능허대(凌虛臺)에서 서해를 건너 중국과 교류했습니다. 이 항로는 고구려에 막혀 육로를 이용할 수 없었던 백제 사람들이 중국을 오갈 때 가장 짧은 뱃길이었다 합니다. 그러나 이 항로는 개로왕 21년(475)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이용할 수 없게 됩니다. 이후 공주와 사비로 천도한 백제가 새로 개척한 뱃길이 태안반도에서 덕물도(지금의 옹진군 덕적도)를 거쳐 북서진하는 항로였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가야산 자락의 내포지역은 중국으로 출발하는 마지막 기착지이자 백제로 들어오는 첫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 학자들은 장거리 뱃길을 떠나는 이들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기원하려고 이 마애여래삼존상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마애여래삼존상은 1959년에야 비로소 학계에 알려졌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이전에도 마애불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본존불을 산신령으로, 두 협시보살을 산신령의 부인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건방지게 앉아있는 둘째 부인에게 첫째 부인이 돌을 던지려고 산신령의 눈치를 보는 형상으로 이해했다는 것이지요.

▲ 서산시 운산면 용현계곡 초입에 서 있는 강댕이 미륵불.

입구로 다시 나와 500m 쯤 내려가면 길 한쪽에 돌부처님이 한 분 서 있습니다. 원래 강댕이마을에 서 있었는데, 고풍저수지가 생기면서 마을이 잠기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원래 있던 마을 이름을 따 ‘강댕이 미륵불’이라고 부릅니다. 고려 후기 조선 초 즈음에 조성한 불상으로 추정합니다. 마을사람은 중국을 왕래하던 이들의 무사안위를 빌기 위해 모신 불상이라고도 하고, 옛 보원사를 수호하는 비보장승으로 조성한 불상이라고도 합니다.

고려 말에 이르면 내포지역에는 미륵신앙이 널리 퍼집니다. 미륵불에 공양할 침향을 바다에 묻고 그 사실을 기록한 당진 안국사지 매향암각이나 해미매향비, 덕산매향비 등 내포지역 매향비(암각)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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