뿐나는 부처님 살아계시던 시절 라자가하의 어느 부잣집 하녀였습니다. 어느 날 밤늦도록 쌀을 빻느라 파김치가 된 그녀는 땀을 식히러 문밖으로 나갔지요. 너무 힘들어 어디 구석진 자리에라도 드러눕고 싶지만 주인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은 깊은 잠에 빠져 고요했습니다. 뿐나는 밤바람을 쐬며 어둠 속을 거닐다 문득 저 멀리에서 깜빡거리는 불빛을 보게 됐습니다. 그 불빛을 가만히 응시하니 스님들이 산을 따라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참 이상도 하다. 다들 잠든 이 시각에 저 스님들은 무슨 일로 깨어 있는 걸까? 혹시 누군가 뱀에 물렸거나 아니면 무거운 병에라도 걸린 걸까?’

자신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하니 남들 자는 시각에도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 자유로운 스님들은 대체 무얼 하느라 잠을 자지 않는지 그게 궁금했던 것이지요. 태어날 때부터 낮은 신분에, 가난을 벗지 못하고 평생 남의 집에 고용되어 죽어라 일을 하며 살아온 뿐나 입장에서 다른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의지대로 살아본 적도 없고, 다른 인생을 살 엄두도 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쌀을 빻았습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이 되자 뿐나는 쌀가루로 과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날 하루 자신이 먹을 몫이었지요. 양식을 챙긴 뒤 강으로 목욕하러 집을 나섰는데 마침 부처님과 마주쳤습니다. 부처님은 아난과 함께 마을로 탁발하러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뿐나는 부처님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난 부처님을 뵈었을 때는 공양 올릴 음식이 없었고, 음식이 있을 때는 부처님을 뵙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음식도 있고 하니 이 과자를 공양 올려야겠다.’

그러다 문득 멈췄습니다.

‘부처님 정도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귀한 음식을 많이 드실 텐데 이 음식을 반가워하실까? 그래도 부처님이니까 어떤 음식이라도 가리지 않으실 거야.’

 

뿐나는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에게 절을 올리고 공손히 과자를 올렸습니다. 부처님이 발우를 내밀어 그 과자를 받자 뿐나는 기쁜 마음에 이렇게 원을 세웠습니다.

“부처님께서 보신 그 진리를 저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나여, 그대는 분명 그렇게 될 것이오.”

부처님은 이렇게 하녀 뿐나에게 축원을 해준 뒤에 아난 존자가 마련한 자리에 앉아서 발우 속의 과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공양을 마친 부처님이 뿐나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지난밤에 나의 제자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었는가?”

뿐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환히 꿰뚫고 있는 부처님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어젯밤 일을 말했습니다. 자기처럼 남에게 고용된 가련한 신세가 아닌, 어디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은 사람들이 왜 잠을 자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던 뿐나에게 부처님이 답했습니다.

“그대는 힘들게 일하느라 잠을 자지 못하지만 수행자들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정진하느라 밤늦도록 잠을 자지 않는다.”

부처님은 이어서 게송을 읊었습니다.

늘 깨어 있고

밤낮으로 배우고 익히며

열반을 향해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에게

번뇌는 모두 사라진다.

부처님에게서 이 게송을 듣는 순간 뿐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밤새 일해도 그저 한 끼 정도의 밥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자신의 삶과 달리 마음을 기울이고 집중하고 수행하느라 밤잠을 아끼면 번뇌가 사라지고 열반이라는 맑고 깨끗하고 충만한 행복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 놀랍고도 신선했지요.

뿐나의 마음이 살며시 열렸습니다. 제 의지대로 살아보지 못한 채 운명에 짓눌려왔던 지금까지의 자기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삶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전율했습니다. 그 길을 자신도 걸어갈 수 있을까요? 분명히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자신을 축복하며 이런 게송을 들려주시는 것이겠지요.

성자의 삶과 수행의 길을 향해 마음을 기울이는 순간 그녀에게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성자의 첫 번째 단계인 수다원과를 이루었지요. 《법구경》 226번째 게송에 대한 인연담입니다.

신분제도가 워낙 철저한 인도 땅에서 하녀가 성자의 첫 번째 단계에 들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이요,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을 불러온 것은 바로 뿐나의 용기였습니다. 이른 새벽길에서 마주친 부처님에게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음식을 올린 일도 아주 큰 용기가 필요했지요. 그리고 부처님에게 밝힌 소원 역시 그렇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하녀의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이 아닌, 부처님의 깨달음을 자신도 얻겠다는 것이었지요.

인생이 탄탄대로이기만 한 사람은 없습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도 있지만 사는 게 지옥 같다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이 운명인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태어난 것도, 이렇게 살게 된 것도, 이렇게 살다 죽는 것도 다 운명이란 생각을 하면 다른 인생을 살겠다는 마음을 낼 수 없습니다. 버티고 저항하다 운명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인생역전이란 게 웬만해서는 찾아오지 않으며,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걸 진리라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살던 대로 사는 것만이 최상일까요? 누가 내 인생을 프로그래밍 해놓은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그렇게 살게 되어 있다는 운명이란 것은 처음부터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살아오던 대로 사는 게 편하니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살다가 한번쯤은 “내가 왜 꼭 이렇게 살아야만 해?”라며 물음표를 들이대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게 용기 아닐까요? 운명이라 여긴 것에 딴지를 거는 일, 그래서 안정된 삶이 뒤틀리더라도 제 삶을 향상시키겠다는 강한 열망이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그 용기가 바로 하녀 뿐나를 성자의 길에 들어서게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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