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 점등식 탑돌이. 사진 연등회보존회 제공.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이 불교의 대표적인 신앙 대상이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탑은 곧 부처님’이라는 생각 역시 오늘날까지 강하게 남아있다. 불교도는 탑의 둘레를 돌면서 부처님에 대한 공경과 숭배의 뜻을 표하고, 개인의 안락과 세속적 소원을 빌어 왔다. 탑돌이는 오른쪽으로 세 번 도는 것이 기본인데, 《우요불탑공덕경(右繞佛塔功德經)》에는 불탑(佛塔)을 오른쪽으로 도는 과보의 공덕 38가지를 설했다.

염부제(閻浮提)에서 언제나 존귀하고 수승하며 청정한 가문[種姓]에 태어나는 것, 불탑을 오른쪽으로 돈 까닭이니라.

재물과 보배가 항상 가득하고 인색한 마음이 없어 용맹하게 은혜를 널리 베푼 것, 불탑을 오른쪽으로 돈 까닭이니라.

사리불이 부처님께 “불탑의 오른쪽을 도는 사람이 얻게 되는 과보가 어떠합니까?”라고 묻자 부처님이 설하신 38가지 공덕 가운데 일부분이다. 적게는 사바세계에서 안락을 누리며, 천상에까지 그 복락이 이어져 있음을 경전은 말해주고 있다.

신라시대 시작했지만 일제 거치며 원형 상실

우리나라의 탑돌이는 불교 수용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예컨대 신라에 불교가 528년(법흥왕 15) 공인되었고, 신라 최초의 절 흥륜사가 535년(법흥왕 22)부터 창건되기 시작하여 544년(진흥왕 5) 2월 완성되었으니까 적어도 이때부터 탑돌이가 시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는 탑돌이의 흔적을 담고 있다. 김현이라는 인물이 사람으로 화(化)한 호랑이와 탑돌이를 하면서 신이한 경험을 했고, 유가종의 고승 태현(太賢)은 경주 남산 용장사(茸長寺)의 미륵보살상을 항상 돌았는데, 보살상도 역시 그를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탑돌이는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시행되었지만 직접적인 탑돌이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경행(經行)이라든가 정대불사(頂戴佛事)와 같은 유사 의식이 행해졌다. 오늘날 해인사에서도 정대불사 때 대장경 경판이나 판본을 머리에 이고 탑을 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경판을 일광욕시키는 동시에 부처님의 말씀을 머리에 이고, 부처님의 신체인 탑을 돌며, 불심(佛心)을 마음에 심는 이중의 효과를 얻고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탑돌이의 원형이 거의 상실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문가조차도 “그 자취를 감춘 지 60여 년이 된다.”고 하여 현재 그 원형을 살피는 일은 매우 어렵다.

▲ 월정사 탑돌이 전승 발표회. 사진 월정사 제공.

현재 남은 탑돌이의 형식

원래 탑돌이는 스님이 염주를 들고 탑을 돌면서 부처님의 큰 뜻과 공덕을 노래하면, 신도들이 등을 밝혀 들고 따르면서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하는 불교의식이었으나, 불교가 대중화하면서 민속놀이로 변천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탑돌이는 법주사와 중앙탑, 그리고 월정사 탑돌이가 대표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법주사 탑돌이는 목조탑인 국보 제55호 팔상전(捌相殿)을 돌며, 부처님에 대한 예경과 불자들의 신심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1971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때 충북팀이 이전의 탑돌이를 재현하여 현재까지 전승하고 있다. 본격적인 탑돌이를 시작하기 전 사부대중이 모여 재(齋)를 지내는 것은 월정사 탑돌이와 동일하다. 하지만 법주사 탑돌이는 훨씬 더 구체적이다.

법주사 탑돌이의 순서는 삼보에 예경하는 삼귀의례를 한 다음에 시작되는데, 십바라밀다정진도(十波羅蜜多精進圖)를 그리면서 돈다. 먼저 ① 보시라 하여, 단월형(丹月形)을 그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둥근 달을 그리면서 돌고, ② 지계라 하여, 반월형(半月形)을 그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반달을 그리면서 돌고, ③ 인욕이라 하여, 혜경형(鞋經形)을 그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신발 모양을 그리면서 돈다. ④ 정진이라 하여, 전자형(剪子形)을 그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위 모양을 그리면서 돌고, ⑤ 선정이라 하여, 구름형을 그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구름 모양을 그리며 돌고, ⑥ 지혜라 하여, 금강저형(金剛杵形)을 그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절구 모양을 그리면서 돌고, ⑦ 방편이라 하여, 좌우쌍정형(左右雙井形)을 그려 좌우에서 두 우물 모양을 그리면서 돈다. ⑧ 원(願)이라 하여, 전후쌍정형(前後雙井形)을 그려 상하에서 두 우물 모양을 그리면서 돌고, ⑨ 역(力)이라 하여, 탁환이주형(卓環二周形)을 그려 두 개의 이중고리 모양을 그리면서 돈다. ⑩ 지(智)라 하여, 성중단월형(星中丹月形)을 그려 작은 원 셋을 둘러싼 큰 원 모양을 그리면서 돈다.

한편 중앙탑돌이는 국보 제6호로 충주 탑평리 7층석탑이 중심 무대다. 이 탑은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불린다. 이 탑은 높이 14.5m로 통일신라 석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의식의 순서나 형태는 대체로 법주사와 월정사 탑돌이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지만, 선정(禪定)을 의미하는 구름형은 누락되어 있으며, 다른 지역의 탑돌이와 동일하게 행해졌다는 뚜렷한 역사적 근거나 의식절차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의식절차 역시 법주사와 월정사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마지막으로 월정사 탑돌이는 8각 9층 석탑이 중심 무대이다. 국보 제48-1호로 지정된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높이가 15.2m이다. 이 석탑 앞에는 국보 제48-2호 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 있었는데, 공양하는 모습이다. 이 보살상으로 불탑에 공양드리는 신앙의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월정사 탑돌이는 1977년 9월 23일 개최된 ‘제1회 태백문화제’와 1977년 10월 24일 개최된 ‘제1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1978년 10월 13일 개최된 ‘제1회 ‘노성제(魯城祭)’를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재현 당시의 자료를 기초로 그 유래와 구성을 보면 한국 탑돌이의 일반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 의식절차는 먼저 《반야심경》을 외우며 스님과 신도가 입장하여 탑 앞에서 삼보에 귀의하는 노래를 부른다. 두 번째는 스님들이 범패를 불러 부처님을 찬양하고 신도들의 신앙을 독려한다. 세 번째는 탑을 돌며 스님과 신도가 일체가 되어 어느 사이 극락세계를 찬미하는 장엄염불을 외친다. 네 번째는 사바세계에 강림하신 불보살님께 다게(茶偈)를 부르며, 차를 바친 비구니는 이 노래에 맞추어 승무를 추며 부처님을 즐겁게 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신도들이 《천수경》을 외우면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자기의 서원을 빌면서 탑을 돈 뒤 사부대중이 퇴장한다.

▲ 월정사 탑돌이. 사진 월정사 제공.

원형의 형식과 정신, 복원 노력해야

불교와 민속적 성격이 강한 탑돌이가 보존되고 계승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탑돌이에 대한 문헌을 중심으로 한 자료 발굴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전의 조사보고서라든가 재현의 경향은 개연성에 기초한 창의성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문헌적 근거나 역사적 논증이 보완되어야 한다. 월정사 탑돌이는 1977년에 처음 재현되었지만, 그 역사적 전통은 유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문헌적, 지역적 고증의 과정을 면밀히 거쳐 복원의 기초로 삼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둘째, 현재 탑돌이에 대한 연구는 탑돌이가 불교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희가무(遊戱歌舞)’라든가 ‘놀이’의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다. 복원과 재현의 양상은 탑돌이 원형이 지닌 의미나 가치가 희미해지고 민속학적 성격이 짙어져 가는 경향이다. 탑돌이가 부처님에 대한 예경과 신앙의 대상에서 출발한 만큼 그 본질과 엄정성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셋째, 탑돌이의 유래와 역사는 있지만, 구체적인 의식의 전거나 의식 절차가 규명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법주사와 중앙탑의 탑돌이는 지역적 특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탑돌이가 민속화되었다면 지역에 따라서 그 지역의 풍토와 정서를 반영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 탑돌이에서 파생된 각 지역의 유사 형태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 그 근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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