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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함께한 대학승 원효·혜공의 자취를 더듬다
길 따라 떠나는 사찰순례 13 - 경주 골굴사·기림사, 포항 오어사
2020년 06월 10일 (수) 17:24:56 이창윤 기자 budjn2009@gmail.com
   
▲ 원효, 혜공 두 스님의 일화가 전하는 포항 오어사. 산내 암자인 자장암에서 본 전경.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별이 모여 은하수를 이루고, 수많은 풀과 나무가 모여 큰 숲을 이루듯, 1600여 년 동안 이어온 한국불교는 이 땅에서 명멸해간 수많은 스님과 불자들이 일구어낸 장대한 역사입니다. 하지만 은하수를 이루는 수많은 별 중에도 밤하늘을 빛내는 별이 있고, 대지를 품에 안은 숲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천년수가 있듯이 한국불교사의 장대한 강물에도 물길을 트고, 도도한 흐름을 일구어낸 선지식이 있습니다.

한국불교사를 일구어낸 수많은 인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한 명 꼽으라면, 아마도 원효(元曉, 617~686) 스님이 첫 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님은 ‘진나 보살의 후예’, ‘화쟁 국사’로 불릴 정도로 교학에 큰 업적을 남겼고,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 부처님의 명호를 알게 되어 나무아미타불을 부를”(《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 조) 정도로 대중교화에도 큰 자취를 남겼습니다.

경주와 그 인근에는 원효 스님의 행적을 더듬을 수 있는 사찰과 유적이 여러 곳 있습니다. 스님이 출가한 사찰이자 아들인 설총(薛聰, 655~?)이 부친의 유골로 소상(塑像)을 조성해 모셨던 분황사(芬皇寺)를 비롯해 왕과 여러 대신에게 《금강삼매경》을 강설한 황룡사지(皇龍寺址), 요석 공주와 인연을 맺은 월정교지(月淨橋址, 月精橋址),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가 서 있었던 고선사지(高仙寺址), 스님이 중창했다는 기림사(祇林寺), 도반이자 스승인 혜공 스님과의 일화가 남아있는 오어사(吾魚寺) 등이 그곳입니다.

   
▲ 경주 골굴사. 원효 스님이 입적한 곳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골굴사, 원효 스님 열반처 ‘혈사’ 추정

추령(楸嶺)을 넘어 경감로(4번 국도 옛길)를 따라가다 기림사 방면으로 들어서면 곧이어 만나는 골굴사(骨窟寺)도 원효 스님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골굴사는 석회암의 일종인 응회암 절벽에 굴 12곳을 파 조성한 인공 석굴사원입니다. 석굴 윗부분에 새긴 보물 제581호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조선 숙종과 영조 연간에 활동한 화가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骨窟石窟)’이라는 그림을 보면 목조 전실이 그려져 있습니다. 또 숙종 12년(1686) 정시한이 쓴 《산중일기》에 보면 “석굴 앞면을 목조 기와로 막고 고운 단청을 해 석굴이 마을을 이룬 듯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법당굴을 제외하곤 모두 허물어져 형체만 겨우 남아있습니다.

일설에는 원효 스님이 이곳에서 열반했다 합니다. 원효 스님의 입적 사실과 열반처에 대한 기록은 스님의 손자인 설중업(薛仲業, ?~?)이 당시 실권자인 김언승(金彦昇)의 후원을 받아 세운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애장왕 연간(800~808)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에는 “수공 2년(686, 신문왕 6년) 3월 30일 혈사에서 마치니, 나이 70이었다. 곧 절의 서쪽 봉우리에 임시로 감실을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비문으로 원효 스님이 70세 되던 해 혈사라는 절에서 입적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혈사의 위치가 어는 곳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혈(穴)’이 ‘구멍’이나 ‘동굴’을 뜻하므로, 석굴사원인 골굴사를 혈사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원효가 일찍이 머물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한다.”는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覊)’ 조의 기록을 근거로 신라 왕경에서 멀지 않은 경주 남산 어디쯤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화재로 폐사된 골굴사는 1990년 적운 스님이 머물며 중창을 시작해 현재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이 곳은 현재 선무도 총본산으로도 유명합니다.

   
▲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보물 제581호.
   
▲ 사천왕문에서 바라본 기림사 경내.

기림사, 원효 중창…신문왕 오가던 옛길 길목

골굴사에서 기림로를 따라 4km쯤 들어가면 기림사가 있습니다. 기림사는 선덕여왕 20년(643)에 인도에서 온 광유(光有) 화상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임정사(林井寺)였는데, 원효 스님이 절을 중창하면서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서 기림사라고 고쳐 불렀다 합니다.

기림사가 실제 선덕여왕 대에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 ‘만파식적(萬波息笛)’ 조에 “(신문)왕이 감은사에서 자고, 17일에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초기에 이미 이 절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림사는 세종이 불교를 선종과 교종 두 종파로 통폐합할 때 선종 18개 사찰 중 하나로 지정할 정도로 사세가 컸습니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일제가 사찰령을 제정하면서 지정한 31본산 중 한 곳이었습니다. 당시 경북지역에는 기림사와 함께 동화사, 은해사, 고은사, 김룡사 등 5개 본산이 있었습니다.

골굴사와 기림사가 자리한 함월산 지역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지키는데 중요한 곳입니다. 문무왕은 “죽은 후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서 불법을 받들고 우리나라를 수호하겠다.”(《삼국유사》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조)는 원력을 세웠습니다. 문무왕이 함월산에서 멀지 않은 동해구(東海口)에 묻힌 것은 왜구가 침략할 때 경주로 들어가는 가장 짧은 길이 함월산을 지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로 조선시대 기림사에는 좌병영(左兵營)의 지휘를 받는 승군이 주둔하기도 했습니다.

기림사는 ‘왕의 길(신문왕 호국 행차길)’의 시작 지점입니다. ‘왕의 길’은 신문왕이 부왕의 능침(대왕암)에 나아가 호국룡으로부터 나라의 평안과 안녕을 지켜줄 옥대와 만파식적을 받아서 돌아간 옛길입니다. 기림사에서 시작한 ‘왕의 길’은 옥대를 한 조각 넣자 용이 돼 승천했다는 용연폭포와 ‘입산을 금지한다’는 왕명을 새긴 불령봉표(佛嶺封標)가 서 있는 불령고개, 신문왕이 잠시 쉬며 손을 씻었다는 세수방, 수레를 끌던 말들이 굴렀다는 말구부리, 수레가 넘어 다녔다는 수렛재, 왕의 마차가 다녔다는 모차골로 4km 가량 이어집니다.

   
▲ 경주 기림사 경내. 탑 뒤로 보이는 전각이 대적광전이고 왼쪽이 약사전이다.
   
▲ 포항 오어사 경내.

‘불 속에 핀 한 송이 연꽃’ 혜공 스님

기림사를 나와 다시 순례길에 오릅니다. 기림사 앞을 지나는 14번 국도를 따라 포항 쪽으로 16km쯤 가다 용산주유소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4km 쯤 들어가면 오어사에 다다릅니다.

신라사회에서 불교가 일반 민중에게 폭넓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민중과 더불어 호흡하며 묵묵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 혜숙(惠宿), 혜공(惠空), 대안(大安), 원효 같은 스님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혜공 스님은 천진공이라는 귀족의 집에서 품팔이하던 할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천민 출신이지요. 스님은 출가한 뒤 부개사(夫蓋寺)라는 작은 절에서 살았습니다.

혜공 스님은 심하게 취해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등 미치광이 행세를 했다고 합니다. 혜공 스님이 삼태기를 졌다는 것은 왕족이나 귀족 같은 특권층이 아닌 서민이나 천민 같은 일반 민중을 자처했다는 것이고, 술에 취해 노래하고 춤췄다는 것은 저자거리에서 민중과 함께 스스럼없이 어울렸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일까요?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은 민중 속에서 살다간 혜숙, 혜공 두 스님을 기려 “불 속에서 핀 진귀한 한 쌍의 연꽃”이라고 격찬했습니다.

   
▲ 오어지를 가로지르는 현수교인 오어교 위에서 바라본 오어사.

수 많은 이적…“저 물고기가 내 물고기다”

혜공 스님은 수많은 이적을 보였습니다. 우물에서 나와도 옷이 물에 젖지 않았고, 영묘사에 불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예방하기도 했습니다. 산길에 쓰러져 죽은 몸과 저자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동시에 보이는 등 삶과 죽음에도 자재했습니다. 스님은 대학승 원효 스님이 경전을 주석할 때 매번 가서 의견을 구한 학승이자, 신인종의 조사 명랑(明朗) 스님이 금강사 낙성법회에 초청할 정도로 덕화가 큰 고승이었습니다. 스님은 역경승 구마라집의 4대 제자 중 한 분인 승조(僧肇) 스님의 후신이라 합니다. 스님은 생전에 《조론(肇論)》을 보고 “옛날에 내가 지은 것”이라고 말했다 합니다.

혜공 스님이 주석했다는 부개사가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만년에 머물렀다는 ‘항사사(恒沙寺)’는 ‘오어사’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경영되고 있습니다. 항사사가 오어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 데에는 원효, 혜공 두 스님에 얽힌 일화가 전합니다.

《삼국유사》 ‘이혜동진(二惠同塵)’ 조에 따르면 서로 장난을 칠 정도로 친숙했던 두 스님은 어느 날 시내를 따라 내려가며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똥을 누었습니다. 혜공 스님이 그것을 가리키며 “네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라고 했다는 데서 ‘오어(吾魚)’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합니다. 다른 이야기로는 두 스님이 고기를 잡아먹고 똥을 누었는데, 고기가 살아나 헤엄치자 서로 ‘내 물고기’라 한 데서 비롯됐다고도 하지요.

오어사의 역사는 혜공, 원효 두 스님이 생존하던 7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절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두 스님과 함께 자장, 의상 스님도 이 절에 머물렀다는 이야기만 아스라이 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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