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는 사회 전반의 일상을 바꾸어 놓았다. 사진은 코로나19로 학생들이 등교할 수 없자 실시간 원격강의로 수업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차별과 혐오, 빈부 격차, 인권·종교 문제 등 사회의 민낯 들춰내
인간 중심 기독교사상 퇴보, 생명 존중 불교사상 더욱 중시될듯
코로나19는 생명 경시한 호모사피엔스가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

신기하게도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사회의 어두운 측면, 우리가 알고는 있었지만 외면하고 싶어 한 곳에 떡하니 나타나 잊고 싶던 사실들을 표면으로 드러냈다. 인종과 젠더에 대한 차별과 혐오, 빈부의 격차, 여전히 혹세무민하는 종교, 사라진 인권 등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어도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이상 굳이 관심 갖지 않던 여러 분야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하나씩 문제를 들춰내며 우리의 민낯을 들추어냈다.

코로나19의 범세계적 대유행 이후 각계 전문가들은 원인을 진단하기에 바쁘다. 야생동물이 최초의 발원지라는 이야기도 있고, 생화학 무기를 위해 연구하던 연구소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공통점은 지구생태계의 파괴로 바이러스가 인간을 숙주로 여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간 인간이 저질러온 환경 파괴가 코로나19가 대유행하게 된 이유라는 것이다. 몇 달간 세계를 뒤덮은 전염병으로 인간의 활동이 줄어든 자리에 자연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일단 지구는 지금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에 대한 전문가들의 또 다른 예측은 방역에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가 약진하는 대신에 유럽에 암흑기가 찾아올 것이라는 것이다. ‘지구촌’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세계화는 퇴조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또 문명 발전을 위해서 어느 정도 희생이 당연시되던 생물권과 문명 사이의 관계도 다시 설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 중심의 기독교적 서구사상은 퇴조하고, 모든 생명 간의 연결을 강조한 불교적 정서가 더욱 중시되리란 예측이다.

대유행 대처, 각국 문화 차이 드러나

지난달부터 여러 단체가 모여 ‘포스트코로나’에 대한 간담회를 열고 있다. 종교, 경제, 인권, 노동, 정치 등 각 분야 전문가 상당수가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더라도 절대로 이전로 돌아갈 수 없는 지금의 현실과 가까운 미래를 논하는 중이다. 일부 과학자 신종 바이러스의 변이로 인해 병이 앞으로 3년 또는 그보다 더 짧은 주기로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는 생활방역이라고 알려진 손 씻기, 마스크 쓰기, 사람이 많은 곳에 가지 않기, 불필요한 외출 없애기 등의 거리 두기를 이제 우리의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덥고 답답해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 하고, 만나서 반갑더라도 악수보다는 주먹치기, 팔꿈치치기 정도의 몸짓으로 인사를 나누고, 식사는 배달해 먹거나 드라이빙스루(Drivethrough) 방식으로 포장해 와서 먹고, 교육이나 회의도 화상으로 하는 것이 보편적 방법이 될 것이다.

이번 코로나19가 세계적으 대유행하면서 모든 나라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공동의 위기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번 사태는 각국의 대처 방법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데, 각 나라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랐다.

마스크를 쓴 사람은 아픈 이라는 인식이 강한 미국은 마스크 착용을 기피했고, 이로 인해 확진자 숫자가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수백만 명의 국민이 직장을 잃었고 홈리스가 많은 대도시의 경우에는 질병에 따른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사망자가 속출했다.

공동체 의식과 배려 어느때보다 절실

그동안 표면으로 잠잠했던 인종차별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사냥하듯 조깅하던 흑인을 총으로 쏘고, 지나가는 아시아인에게 폭언을 서슴지 않는 모습이 뉴스에 보도되고 있다.

또 집단 면역력이라는 생소한 방식을 내세우며 일상을 그대로 유지한 스웨덴의 경우 감염자와 사망자 증가에도 집단 면역체계가 자리잡은 것 같지 않은 상황이다. 스웨덴을 제외한 유럽의 많은 국가는 도시와 국경을 폐쇄하고 집밖에 나오는 것조차 제한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다른 나라와 달리 봉쇄를 하지 않아 통행이 자유로웠지만 전염병과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확진자의 동선과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데 통신사에게 받은 수만 명의 휴대전화 사용 기록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현 정부가 개인정보를 감염확진자를 찾아서 알리는 데만 이용할 것이란 믿음이 있지만,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가 권력이 필요하다면 내 일상을 모두 알 수 있음을 확인했다.

다양한 국가가 문화와 역량에 맞게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한바탕 전쟁을 벌이는 것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어느 방법이 최고인지, 어떤 지도자가 능력이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 스스로 자유로움을 줄여가면서 방역에 협조를 잘하고 있는지는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로 드러나고 있다.

모든 것은 인드라망으로 이어진 생태계

《호모사피엔스》의 작가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인간은 상상의 질서를 만들고 그것이 실제한다고 믿는 유일한 존재”라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실제한다고 믿는 국가, 종교, 기업 따위는 집단적 허구이고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개인의 자유, 인권 등도 이 집단의 상상력 안에 포함된다. 유발 하라리는 이런 상상력의 결과물이 문화이며, 상상이 바뀔 때 문화도 바뀐다고도 이야기했다.

황사나 미세먼지로 마스크 쓰기가 낯설지 않은 우리와 달리, 마스크 쓰기를 꺼려하는 서구 문화가 대규모 전염병 전파를 야기하는 것에서 보듯 문화의 작은 차이가 결과의 큰 차이를 만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비근한 예로 목 안에 식염수를 뿌리면 전염병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는 잘못된 상식과 믿음은 한 교회에서 수십 명의 집단 감염을 일으켰고, 놀이동산의 ‘자유이용권’처럼 클럽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의 신문화는 수십, 수백 명의 집단감염을 불러왔다. 또 야외활동을 즐긴 이전 세대의 청춘과 달리, 피시방이 코인 노래방처럼 제한된 공간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요즘 청춘들의 문화는 N차 감염을 초래하고 있다. 집단감염이 발생하자 대구에서는 신천지가, 서울에서는 성소수자가 이슈가 되어 연일 언론을 장식했고, 사람들은 이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는 집단의 상상을 바꿀 시기에 직면했다. 다시 말해,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소비와 단절을 이야기하던 시기에서 연결과 공존을 말하는 시대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생명체의 개별성이 아니라 바이러스에서 지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인드라망으로 이어진 생태계임을 인정해야 한다. 혐오와 배제가 아니라 공동체 의식과 배려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진 시대가 온 것이다. 불자라면 이런 상상의 결과물, 즉 문화에 익숙하다. 붓다는 끊임없이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음”을 강조했고, ‘분소의’와 ‘발우’를 통해 최소한의 것을 모조리 소비하는 ‘통소비’로 환경보호를 온몸으로 실천한 분이시다. 《행복경》에서는 인간만이 아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행복하기를 발원하기도 했다.

생활·사고 방식 붓다처럼 바꿔야

코로나19는 신이 내린 형벌이 아니라 생명을 경시하고 함부로 대해 온 우리 호모사피엔스가 스스로 내린 형벌이며, 붓다의 가르침을 입으로만 외우고 생활 안에 녹여내지 않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다.

붓다는 ‘공부하는 데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고 아프지 않기를 바라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지식과 문명을 축적하고 누리며 살아온 우리 호모사피엔스에게 큰 자기 반성과 시련을 안겨주었다. 각종 어려움이 그렇듯 이번 사태도 사회적 약자에게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큰 상처를 입혔고, 사회 전반에서 감추고 싶었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낸 계기가 됐다.

이렇듯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보여준 주체가 코로나19 바이러스라면 이제 이 상처를 보듬고 토닥이는 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인 호모사피엔스의 몫이다. 우리가 평생 해나갈 공부의 채찍이 되어 줄 장애라 여기고 겸손하게 다루면서 생활 습관과 문화를 바꿔나간다면 절망할 일도, 우울해 할 일도 없다. 혼자 달려 나가지 않고 살아있는 모든 것의 행복을 위해 함께 손잡고 나간다면 이 상황도 어두운 터널로만 느끼지 않을 것 같다.

입으로만 ‘우리도 부처처럼’을 외칠 것이 아니라, 생활과 사고의 방식을 붓다처럼 바꿔야 한다. 달라이 라마는 늘 친절이 본인의 종교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주변사람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나와 주변의 살아있는 모든 생명과 존재에게 친절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올해는 코로나19 확산으로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이 늦추지고, 연등회가 취소되는 등 봉축행사 대부분이 연기되거나 축소·취소됐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가 전염병 확산에 취약하기 때문인데, 이럴 때일수록 붓다가 오신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내 가족의 건강과 안위를 비는 것도 좋지만 동시에 이 사태가 진정되고 모두 평안할 수 있도록 간절하게 염원하고, 지구의 모든 구성원 간에 연결된 진정한 인드라망을 느끼면서 달라이 라마가 강조한 친절도 생활 속에 실천해 봄이 어떨까?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