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구는 며칠 전부터 학교가 끝나자마자 부지런히 발을 놀려 마을 어귀의 절로 향했다. 아침저녁으로 불공을 올리는 상구 할머니의 엄명으로 지난 닷새간 뻔질나게 오간 길이라 이젠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할머니 성화에 못 이기는 척 간다고 했지만, 사실 아버지를 따라 산에 가서 나뭇짐을 지는 것보다 절에서 하는 일이 훨씬 쉽고 재미도 났다. 또 큰 잔치를 앞두고 있는지라 명절에나 겨우 맛볼 수 있는 유과라든지 일명 ‘기레빠시’라고 하는 떡 부스러기도 맛볼 수 있어 재미가 쏠쏠했다. 상구로서는 부처님 생신이 일 년에 한 번 있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오늘은 운재 스님이 절 마당에 등간燈을 세워 그 위에 꿩의 꼬리를 꽂고, 비단으로 만든 기를 다는 ‘호기’를 만든다고 했다. 운재 스님은 키가 모자란 상구에게 등간이나 잘 잡으라고 했지만, 목마만 태워준다면 무슨 일 이든 할 자신이 있었다. 지난해 이맘때에도 아버지 어깨에 올라탄 채 마을을 돌면서 추녀 끝이나 나무에 매어놓은 줄에 등을 달았다. 마치 농사 품앗이를 하듯 집집마다 소원을 담아 만든 등에다가 솜씨 좋은 이들은 그림이 나 글씨를 써 넣었고, 힘이 좋은 이들은 수월하게 달아주는 일을 나누어서 하기로 한 것이다. 연꽃 모양의 연등이 대부분이었지만 재주가 좋은 이들은 선인(仙人)이나 물고기, 새 모양 등 각양각색의 등을 선보였다. 상구도 보기 좋은 학이나 거북이 모양의 등을 만들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상구나 아버지는 그만한 손재주가 없었다.

스님들과 동네 청년들이 힘을 합한 덕에 일이 수월해져 오후쯤에 모두 끝이 났다. 스님은 하루 일찍 등불을 달 수 있게 되자 고마운 마음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초파일 느티떡을 내왔다.

“정월에는 보름날 달떡이 제격이요, 이월엔 한식 송병이 으뜸입니다. 삼월엔 쑥떡, 사월엔 뭐니 뭐니 해도 초파일 느티떡이 최고지요.”

“그럼요, 향긋한 느티떡이야말로 이맘때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진미지. 초파일의 상징인데…. 안 그러냐 상구야?”

청년들 말을 듣는 둥 마는 등, 상구는 허겁지겁 배를 채우느라 대답을 못 했지만 그들과 생각이 조금 달랐다. 초파일의 상징은 휘황한 관등행렬 아니던가. 부처님을 모셔 들고 맨 앞에서 행렬을 이끄는 스님들, 그 뒤를 따르며 악공들이 연주하는 범패, 새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다른 명절날에는 볼 수 없는 그 행사야말로 부처님오신날을 으뜸으로 꼽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비록 지금은 두 볼이 터지도록 입에 떡을 쑤셔 넣고 있지만, 어린 마음에도 먹는 것과 감흥은 별개 문제가 아닌가 싶었다.

 

부처님오신날의 예전 풍경을 이야기 형식으로 써보았다.

부처님오신날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거리를 수놓은 연등이다. 연등은 석가모니 재세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양의 한 방법이었으며, 중국 동진의 고승 법현 스님이 쓴 인도 구법 여행기 《법현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래 되었다. 여행기를 실은 《법현전》에는 당시 중인도 지역 부 처님 오신 날 행사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출가자·재가자들이 사원에 모여 예능을 겨루고 꽃과 향을 공양한다. 또 사찰 뿐 아니라 불상을 모신 수레를 화려하게 치장해서 읍내까지 순례한다.”

오늘날의 제등행렬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우리나라에는 불교가 전래된 후 팔관회와 연등회가 열렸다. 의미는 약간 다르지만 등을 밝히는 축제라는 면에서는 거의 비슷했다. 특히 민간이 참가하는 연등회는 정월 보름에 등불을 밝히고 부처님께 한 해의 복을 기원하는 행사로, 이날은 나라에서 다과를 베풀었고 사람들은 음악과 춤을 즐겼으며, 시골 마을까지 집집마다 등을 켰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성(王城)에서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정월 대보름에는 14일부터 이틀간 저녁에 연등을 달았다고 한다. 이를 고려 무신정권 집권자인 최이가 4월 8일로 옮겼다고 한다. 연등축제는 이때부터 음력 사월초파일로 고정 되어 지금까지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통행금지가 있었지만, 부처님 오신 날만은 예외를 두었을 만큼 연등행렬은 서민생활 깊숙이 자리한 풍속이었다.

이날 사람들은 낮에 사찰에서 공양을 올리고, 저녁에는 집집마다 세운 등대에 자녀수만큼 등을 밝혔다. 또 밤에는 온 장안의 남녀가 등을 들고 나와 장관 을 이뤘다고 한다. 당시 시골 노인들은 한양의 남산에 올라 불야성을 이룬 시내 거리를 구경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고 할 정도다.

성종 때는 한양의 대표적 경치 가운데 하나로 종로 연등축제가 꼽힐 정도로 성행했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사찰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승려도성출입금지법’이 해제된 1900년대 초부터 연등축제가 부활된 것으로 보인다.

▲ <매일신보> 3면, 오른쪽 상단에 팔일(초파일)의 설법이 실렸다. 3,4,5단이 관련 기사다.

일제 치하 당시 부처님 오신 날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매일신보》 1917년 5월 29일자 3면에 자세히 나온다.

호사롭게 구경 다니는 아이들이 초파일날 식전부터 경성 길에 널리어서, 거리를 바라보면 마치 꽃밭이 열려 있는 듯하다. 연두저고리에 다홍치마 입은 계집아이와 색모자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 든든한 집 아이들은 윤이 흐르는 색비단을 감았지만 그렇지 못한 도성 바깥의 아이들까지도 넝마를 빨아서라도 곱게 물을 들여 입고 동무끼리 손목을 이끌고 명일도 한때라고 벙글벙글 돌아다닌다.

사월초파일을 앞둔 경성 시내는 울긋불긋한 줄등이 거리 이쪽에서 저쪽까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져, 수많은 연등이 장관을 이루었다. 등불 지지대 위에서 날리는 화려한 오색 깃발만큼이나 많은 수의 남녀노소가 거리마다 가득 들어찼으며, 아이들 역 시 마치 명절날처럼 색동옷을 챙겨 입었다는 자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매일신보》에는 총 4면인 지면에서 이 기사 말고도 제3면의 절반을 할애해서 사월초파일을 앞둔 아이들의 풍경과 시중의 경황, 사찰의 법요, 초파일을 맞은 종로통 모습, 각황사 설법전 등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당시 부처님오신날의 위상과 사람들의 인식을 가늠하는 척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불교계 유산인 연등회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자비사상을 등으로 표현한 이 문화유산을 통해 불자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것은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누는 전 국민의 축제로 승화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비록 지금은 연등이 거리를 밝히는 네온사인과 수많은 불빛에 섞여서 오래 전 칠흑처럼 캄캄한 밤을 밝히는 연등만큼 밝고 환하게 보이진 않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 마음만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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