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산다는 건 밥벌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뭘 먹고 사는가.

밥을 구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은가.

남들 먹는 것을 나도 먹는가.

중년에 접어들면서 내 삶이 자꾸 이런 물음을 스스로 내고 그 답을 구하면서 “그게 산다는 거지, 뭐.”하며 씁쓸하게 자위하고 있다. 이런 내가 안쓰럽지도 않다. 지구 위 77억의 사람들 중 나와 같은 질문으로 삶을 규정하고 가치를 매기지 않는 이가 몇 이나 될 것인가.

19살에 부처님 법을 만나 오늘에 이르렀다. ‘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내 속에서 움튼 이래로 그 답을 찾아 다녔고, 천만다행하게도 고 고익진 교수님께서 “나와 함께 공부해보지 않으련?”이라며 손을 내미신 후로 그 문하에서 도반들과 치열하게 몇 년을 보냈다.

언제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에 빗대어 내 삶의 햇수를 꼽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 나이가 25세니까 아직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전이네’라는 생각에서 조금은 느긋하게 청춘을 보내기도 했고 그러다가 29살이 되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앗! 싯다르타 태자는 29살이 되었을 때 출가했는데 나 지금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하지만 세속의 삶은 또 그것대로 치열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정신이 퍼뜩 들었으니 내 나이 35세가 되었을 때였다. 싯다르타 태자는 그 나이에 성불하였는데 대한민국 수도권에 살고 있는 35살 이미령은 무엇하면서 살고 있는가? 하다못해 세속 사람들처럼 이재(理財)에 밝아서 재물을 쌓는 지름길을 찾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세상이 요구하는 스펙도 내겐 없었다. 붓다의 세속 제자가 되어서 내가 살아가며 나름 세운 원칙이 있었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생계를 위해 줄을 서지 말며, 출가자의 라이프스타일을 세속에서 구현해보자는 것이었다.

원칙은 충실하게 지켜졌는가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야겠다.

“묻지 마세요.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어떤 밥벌이를 하나?

35세에 이미 성불해버리신 부처님을 따라잡기에는 이제 너무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나는 나대로 내 원칙과 적당히 타협을 해가면서 밥벌이와 마음공부와 포교를 버무리며 하루하루 살아오다 오늘에 이르렀다. 늘 마음속으로 사리불 존자의 법문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어느 날 마을에서 탁발한 뒤 길가 나무 아래에서 발우 속 음식을 들고 계시는 사리불 존자에게 타종교인인 여성수행자가 물었다.

“사문께서는 지금 어떤 식사를 하고 계신가요?”

그러면서 앙구식(仰口食), 하구식(下口食), 방구식(方口食), 사유구식(四維口食)을 하고 있는가 물었다. 앙구식이란 얼굴을 위로 향하여 일을 하고서 밥벌이를 하는 것이니 해와 달, 별자리를 관찰하는 일이고, 하구식이란 얼굴을 아래로 향하는 일을 하고서 밥벌이를 하는 것이니 농사 등의 일을 말하고, 방구식은 권력에 빌붙어 아부하고 말재간을 부려서 밥벌이를 하는 것이며, 사유구식은 점을 치거나 주술을 부리거나 부적 같은 것을 써주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법제자라면 당연히 멀리 해야 하는 생계유지방법이다. 사리불 존자의 대답은 당연히 “나는 그렇게 밥을 얻지 않습니다”였고, 법을 구할 뿐이요, 탁발로서 끼니를 때울 뿐이라는 답을 그 여성 외도수행자에게 들려주었다.(《잡아함경》)

탁발을 할 수 없는 재가불자인 나의 밥벌이는 어땠을까. 이 법답지 못한 네 가지 밥벌이를 용케 피해가며 지내왔는가. 그러면서도 궁핍해서 가난의 어둔 그림자를 드리우며 지내지는 않았는가. 세속에서 부처님 제자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이것이 참으로 큰 화두였다. 부처님처럼 성불하여 세상에 법륜을 굴리는 일은 하지 못했어도 네 가지 밥벌이에 나를 얹지는 않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면 이런 삶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렇게 내 삶은 흘러 이제 내가 부처님 생애에서 슬그머니 빗대어볼 일은 부처님 55세에 시자로 아난다 존자를 들이신 일인데, 아무래도 내 처지에 내 그릇에 시자를 들인다는 건 언감생심, 소가 웃을 일이다. 시자는커녕 후배를 키우지도 못하고 살아왔다는 말이다.

살아온 방식 그대로 살겠다

그래도 내가 새롭게 세운 또 하나의 원칙이 있으니 그게 바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아니던가. 나는 그나마 꿋꿋하게 경전을 읽고 글로 풀어내고 강단에 서서 불교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일에서 삶의 보람을 만끽하고 있으니 그만하면 됐다 싶다. 늦은 밤에 파김치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올 때도 나를 통해 부처님 말씀을 만나 행복하다는 분들의 피드백이 나를 또 달뜨게 만드니 난 천상 보살님으로 살아야 할 팔자인가 싶다.

이제 내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에 견주어 불자로서 살아갈 마지막 순간은 그 분의 노후의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년으로서 살아가면서 노년의 삶을 준비해야 할 나이에 이른 것이다. 어르신들은 나를 보고 “참 좋은 나이다.”라고 부러워하지만 나는 안다. 이 좋은 나이에 나는 노년의 삶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부처님 노년의 삶은 어떠했을까.

《대반열반경》에서는 늙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부처님 당신의 입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내 육신은 이미 나이 들어서 허물어지고 있다. 마치 다 낡아 부서진 수레를 가죽 끈으로 칭칭 동여매서 끌고 가듯 지금의 내가 그와 같다.”

해야 할 수행을 모두 마쳤고 몸과 마음을 완벽하게 통제한 부처님이 토해내는 노년의 삶은 아직 중생의 태를 벗지 못한 내게 충격이었다.

부처님도 힘드셨구나. 늙음이란 것이 그렇구나.

부처님도 그러셨듯이 나 역시 그 길을 걸어가겠구나. 아니, 지금 부지런히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구나.

이런 생각들이 오가면서 다시 한 번 씁쓸해졌다. 깨달음을 그토록 노래했건만 난 깨달음의 길이 아닌 생로병사의 길을 아주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어쩌랴. 그 누구도 이 생로병사의 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던가.

하여, 나는 노년에 이른 부처님의 ‘라이프스타일’을 살펴보고, 그걸 따라서 앞으로 살아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부처님 생애 마지막 석 달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대반열반경》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장차 내 삶의 롤모델로 다시 한 번 세울 수 있는 부처님의 모습이 또렷하게 잡혔다. 그건 바로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신이 세운 원칙과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쿠시나가라 두 그루 사라나무 사이에 누우시던 그날까지 맨발로 길을 다니시며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법을 설하셨고 하루 한 끼 탁발식을 멈추지 않았다. 시자에게 업히셨다는 문장은 보이지 않았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그 자리에서조차 법문을 듣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에게 “무엇이든 다 물어보라”며 귀를 기울이셨다.

늙음을 원망하지 않고, 늙음에 기대어 적당한 타협을 하지도 않은 부처님.

그 분의 속가 제자로서 살아온 나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노년의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살아온 방식 그대로 살다 가자는 것. 청춘과 중장년의 삶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그럭저럭 내 삶의 원칙을 지켜왔다면 마지막까지 그 길을 걸어가자는 것.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이런 것쯤은 봐주겠지”라며 타협을 하지는 말자는 것. 그러려면 지금의 내 살아가는 모습이 온전하고 선량하고 반듯해야 한다는 것.

부처님 속가 제자가 되어 ‘보살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나, 그렇다. 보살님에게는 그런 계획이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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