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 음식은 수행을 전제로 하는 출가자에게도 예외일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삶의 요소이다. 또 사찰음식은 이제까지 역사적인 범위와 개념 그리고 불교의 식문화 정신 등에 대하여 대중의 논의를 거쳐 합의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원형보존이란 입장에서는 더욱 어려워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사찰음식’이라 함은 불교 즉 승가의 공동체 생활에서 만들어진 무형의 소산으로, 구체적인 모습이나 모양이 없는 식생활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것이란 정도의 이해일 것이다. 불교의 역사성, 정체성, 수행성을 담은 음식을 사찰음식으로 말할 수 있다.

한국 불교음식의 기원인 떡과 유밀과

불교에서는 금기음식물과 공양물의 종류로 식생활의 특징을 드러낸다. 살생과 주육(酒肉)금지를 받아들인 양무제(梁武帝)의 묘사(廟社)제도와 소선(素膳; 고기나 생선이 들어 있지 아니한 반찬)문화가 백제로 전래되면서 한국의 불교음식은 시작되었다. 백제불교는 혈식(血食; 산동물을 제물로 해 국가의 제사를 지냄)을 버리고 밀가루・과일・채소만을 사용하도록 한 소선으로 100미(味)와 5과(果)를 갖추어 분(盆)에 담아 꽃으로 꾸미고[華飾, 화식] 비단을 잘라 아름답게[剪綵, 전채] 한 상차림으로 진설(陳設)하도록 하였다. 신라에서는 끽다와 과자(果子)를 즐기는 풍습이 생겨나고, 이 흐름은 고려로 이어졌다. 끽다와 함께 먹는 과자에는 떡과 각종 유밀과를 포함한다.

당(唐)에서는 밀가루에 물과 꿀을 넣고 반죽하여 다양한 모양으로 빚어 기름에 튀겨내는, 철 냄비를 사용한 조리법이 나타났다. 이를 당(唐)과자 중에 몇몇이 한반도에 전래되어 기름과 꿀을 재료로 하는 유밀과(油蜜果)로 발전하게 된다. 한과(韓果)・다식(茶食)・정과(正果)인데, 고려인은 왕실에서 조차 유밀과를 필요한 만큼 조달하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먹지도 못하였다. 왕실 연회를 위해 유밀을 사찰에서 구하기도 하며, 연등회와 팔관회에는 당시 최고급품의 음식이었던 유밀과의 사용을 금하고 허락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다과(茶果)도 마찬가지였으니, 유밀은 사찰의 필수품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왕실 속제(俗祭) 속의 유밀과

조선시대에 들어 유밀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유교 이념으로 큰 변화를 맞는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후 지금까지 불교는 소선과 떡, 유교는 고기와 혈식이란 기준은 변함이 없다.

▲ 변. 사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제공.

고려 왕실은 유교의 혈식제의를 통해 정치의 정당성을 얻고, 불교의 소채와 유밀과를 통해 문화의 선진화를 드러냈다. 조선의 왕실은 혈식으로 종묘인 정제(正祭)를 삼고, 소채와 유밀과 그리고 떡으로 왕의 직계 제사인 속제(俗祭)를 만들어 낸다. 정제에 쓰이는 떡은 변(籩; 대나무로 만든 제기)에 담는 음식의 한 종류이지만, 속제에서 떡은 협탁(俠卓; 작은 탁자) 상차림의 중심이다. 여기에 왕의 진영(眞影)도 함께 차려진다. 고려 진전(眞殿; 역대 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전각)의 역할은 조선 초기에는 문소전(文昭殿)에서 이루어졌고, 임진왜란 후에는 영희전(永禧殿)에서 설행되었다. 다만 진설(陳設; 법식에 따라 상 위에 차려 놓는 음식)에 국수가 추가되는 변화가 생겼다. 1405년 태종은 신하와의 대화에서, 진영 봉안은 도교와 불교에서 시작되었고, 소찬은 당송(唐宋)을 이은 불교에서 비롯되었다고 기원을 밝히고 있다.

▲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이욱, 한국중앙학연구원출판부, 2015)

영희전의 진설은 찬탁(饌卓; 유밀과와 과실을 얹어 놓는 탁자)과 협탁(俠卓)으로 구성된다. 찬탁에는 중배기, 홍산자(2), 백산자(3), 전다식(3), 백다식(3)을 진설하는데, 모두 유밀과 종류로 우리(于里; 과자를 쌓는 그릇)에 담고, 제4행에 호도, 백자, 비자, 황률, 대조, 건시의 6종의 과일을 놓는다. 협탁에는 자박병, 두단자, 상화병, 절병, 당고병, 유병 등 6종의 떡을 놓고, 전증과 백증의 소탕(2), 국수(1), 시접(1), 차(1)를 올린다. 제3행에 3개의 잔을 배열한다. 속제가 불교음식인 유밀과를 중심으로 차려짐을 알 수 있다.

조선 왕실은 제사 종류와 횟수가 다양하고 많아지자, 식재료 수급과 준비에 많은 어려움이 생겼다. 제사음식을 변경하고 분량을 축소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며, 음식의 크기와 우리에 담는 고임의 높이가 규정에 맞지 않게 되어, 위계질서가 무너지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말에 규정을 재정비한 일종의 왕실 레시피인 《태상지(太常志)》를 편찬하게 된다.

《태상지》에는 제사에 필요한 제물에 대하여, 불교 음식인 유밀과를 시작으로 과자와 떡을 만드는 법은 물론 제기의 크기 및 담는 법 등이 그림과 설명이 함께 실려 있다. 도설(圖說; 음식 크기를 그림으로 설명)과 찬품(饌品; 음식 만드는 법을 설명)의 과자류와 떡류는 영희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과(油果)류는 정해진 규격의 크기와 모양으로 만들어 정해진 규격의 우리에 담아야 한다.

▲ 약과・산자・다식을 우리(于里)에 담은 모양과 우리대(于里臺). 국가제례 왕실문화도감(국립고궁박물관, 2017).

음식저장 창고인 장고(醬庫)

승가는 사람이 모여 생활하는 수행공동체이다. 승가가 많은 사람을 위해 사시사철 항상 풍족한 식재료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계절의 식재료는 사찰의 입지조건에 따라 산과 들에서 얻어 활용이 용이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식품을 저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조리법이 다양하지 못했던 고대사회는 더욱 저장수단이 필요했다.

우리 민족은 발효식품인 장(醬) 문화를 발달시켜 해결하였다. 고대 중국은 소금과 누룩을 넣은 육장(肉醬; 고기가 재료)이나 어장(魚醬; 생선이 재료)인데 반해서, 우리는 시(豉; 일종의 청국장)와 두장(豆醬; 메주로 만든 장)이었다. 중국과 달리 콩을 이용했으며 이는 청국장의 원형으로 알려진 발효식품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짠맛・신맛・단맛・쓴맛・매운맛의 오미(五味)가 맛의 상징이지만, 밀 문화권에서는 짠맛・신맛・단맛・쓴맛을 찾고 쌀 문화권에서는 여기에 감칠맛을 더한다. 우리 조상은 만주지역이 원산지인 콩을 식재료로 하여 된장・간장으로 재탄생시켰던 것이다. 우리가 장(醬)에서 나는 글루타민산의 감칠맛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감칠맛의 조미료는 이웃으로 퍼져 대두(大豆) 문화를 형성한다. 경주에서는 규모가 큰 사지(寺址)인 경우 장고를 발견하게 되는데, 일찍부터 발효식품의 발달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저장시설은 조선건국과 관계있는 양주 회암사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사찰의 기본 식재료 및 식생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사찰음식 최소한의 정의

이와 같이 넓은 의미의 불교음식에는 전통 식문화에 영향을 준 유밀과가 있기도 하고, 장과 같이 고유 식문화가 승가에 들어와 사찰음식의 기본 재료가 된 경우도 있다. 여기에 종교적인 이유로 금기해야 할 육식과 오신채도 있다.

그런데 경전과 율장에서 언급한 식재료와 조리법에 대한 오해와 오역이 간혹 있다. 근래에 조사한 ‘사찰음식 원형문화 조사보고서’(2013년 이후)에 의하면, 김・미역・고수・설탕・계피・우유 등의 식재료가 보이고, 의례의식을 동반하는 강정류・유과류・떡류・약식 등의 유과류도 보인다. 이 조사내역에는 경전에서 찾을 수 없는 김・미역 등의 식재료도 있고, 고수・설탕・우유 등과 같이 향신료에 속하거나 고급품에 속하기 때문에 금지하는 식재료도 있다.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식생활의 인식 차이에서 오는 이러한 식재료의 혼재는 사찰음식의 개념을 합의하는 데 충돌할 수 있는 요소이다.

그렇다면, 무형문화로서 현재 사찰음식이라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어야하나.

첫째, 무형에는 불교공동체 내에서 전승되어 후대에 전해야할 가치가 있는 내용이 담겨있어야 한다. 둘째, 식생활에는 불교의 역사・사상의 특징을 보여주는 재료와 조리법이 있어야 한다. 셋째, 식(食)의 본질인 음식의 양(量)에는 수행의 몸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의 양으로, 재료는 삼덕육미(三德六味)의 청정성을 갖추고, 작용은 식체(食體)인 촉미향(觸味香)에 대한 허물이 없는 수행법을 갖추어야 한다.

불교에서 언급할 수 있는 모든 음식을 통틀어 불교음식이라고 하면, 사찰에서 매일 스님을 위한 식단을 사찰음식이라 할 수 있다. 위의 3가지 조건 중에서, 특히 끊어 먹는 단식(段食)에서 촉(觸)과 미(味)와 향(香)은 식체가 된다. 이 식체를 바로 끊어버리는 음식의 수행법이 드러날 때 사찰음식 본연의 모습도 드러나게 된다. 촉미향 3가지 법의 쓰임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을 끊어, 허물이 없는 수행으로 섭취해야 한다.

아직 사찰음식은 자연에서 얻은 식재료를 사용한 건강식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제는 역사와 경전에 근거한 무형의 자산을 구체화하고, 우리 음식의 원형이 무엇인가를 다질 때 무형문화재로서 사찰음식이 제자리를 찾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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