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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봉이라는 장수를 만난 나는 그의 병사”
-백봉 김기추 거사의 전기 쓴 최운초 작가
2020년 05월 06일 (수) 15:59:26 박선영 기자 budjn2009@gmail.com
   
▲ 한국의 '유마거사'라는 백봉 김기추 거사.

거사불교를 주창하며 생활에서 선(禪)을 수행하도록 문하에 많은 제자를 양성해 ‘한국의 유마거사’로 알려진 백봉 김기추 거사의 제자 최운초(본명 최명돈) 씨는 《눈을 부릅뜨고 와 귀를 가리고 가다》라는 백봉의 전기를 지난 2월 출간했다. 8년 동안 100명이 넘는 백봉의 제자와 가족을 한 차례 이상 인터뷰했고 일제 강점기의 신문을 포함한 여러 신문에서 그의 행적을 파악하거나,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 맥락을 파악했다. 그 외에도 스승의 삶을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되는 장소와 기록을 모두 찾아 방문했다. 조사한 자료의 조각을 맞추고, 원고를 쓰는 데 또 2년이 걸렸다. 도합 10년간 제자는 스승의 흔적을 쫓으며 되새겼다.

백봉과의 운명적 만남

최운초 씨는 스물아홉 살에 백봉 김기추 거사를 만났다.

최 씨가 불교를 접한 건 기독교고등학교에 다니던 성경시간, 세계 4대 종교를 기독교와 대비한 설명을 들었다.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4성제 8정도에 대해서도 듣게 됐다. 그때 그는 신에 예속되지 않고, 인간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열린 인간관에 매료돼 ‘내 종교는 불교가 되겠구나.’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1973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해, 1학년 불교학생회에 가입했다. 졸업 후에는 이기영 박사가 1주일 동안 청소년회관에서 개최한 기초교리강좌를 듣고 일요일마다 구도회에 다녔다. 대학 졸업 후에는 대전의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특례보충역으로 근무하면서 ‘일심회’라는 불교모임을 만들었다. 일심회는 대전의 불교청년단체인 금강회와 연합해 금강경을 공부하며 철야기도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불교계 신문을 보다가 ‘하계 철야정진 안내’라는 작은 광고가 눈에 뜨였다. ‘백봉 김기추’가 누구인지 몰랐고 다만 젊은 혈기에 ‘철야정진’에 도전해보려는 마음이 생겼다. 철야정진이 7월말이었기에 여름휴가를 포기했다. 부산 남천동 보림선원에서 토요일 오후 3시부터 시작한 정진은 설법이 주를 이뤘는데 선(禪)을 이해하지 않으면 어려울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다행히 최 씨는 일심회에서 《혈맥론》, 《임제록》 등을 공부해서 선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잠을 자지 않으니 2, 3일째가 제일 힘들었지만 도망가서 눈 부치는 쪽을 택하지 않고 정면 승부를 택했다.

“몸이 나인 줄 알고 살았는데 그것과 다른 이야기였어요. 허공으로서의 ‘나’에 대한 설법이었지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리’,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것’이라고 했어요. 우주에는 생멸이 있지만 허공인 나에게는 생멸이 없구나 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정진 마지막 날, 스승님께 절을 하는데 눈물이 줄줄 흘렀다.

거기에서 얻은 감동을 함께 공부하는 일심회 회원들과 나누고 싶었다. 백봉거사의 제자들은 토요일마다 철야정진을 했다. 그가 회원들을 설득해 10월 말에 10여명의 회원들과 부산에 내려갔다. 금요일 퇴근하고 부산에 밤늦게 도착했는데, 백봉거사가 그들에게 “지금부터 철야하래이”라고 지시했다. 졸지에 2박 3일 동안 철야정진을 하게 됐다. 예상보다 더 힘들었던 탓인지 그들 중 다시 백봉거사를 찾은 이는 최운초 본인 말고는 없었다. 그는 ‘허공으로서의 나’를 잊지 않고 새기기 위해 돌아와서 기숙사 벽에 글귀를 써서 걸어두었다.

인연이란 묘한 것이다. 흔히 ‘부처가 내 옆집에 살아도 못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최운초 씨도 “당시 부산시내에서 설법을 많이 했고, 서울 삼보회관에서도 정기적으로 설법을 해서 많은 이들이 들었지만 그 중 가르침을 이해하고 공부로 이어간 이는 일부였다”고 말한다.

그는 본격적으로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 2월 의무복무기간이 끝나고 대부분이 재계약을 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당시 국가가 심혈을 기울이는 연구기관이어서 급여나 복지 등 여러 차원에서 월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재계약하지 않고 보림선원에 입주하는 것을 택했다. 당시 보림선원에는 대여섯 명, 많을 때는 10여 명의 젊은이들이 입주해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기로 백봉거사는 자비심으로 학인을 지도하는 스승이었다. 그리고 백봉거사와 함께 한 자리는 늘 선기가 넘쳤다.

최운초 씨가 만난 수많은 백봉의 제자들은 “제자들이 깨닫기를 기다리지 않았고 깨달을 때까지 방치하지 않았다”라며 “그는 설법의 가치를 믿었으며 올바로 공부하면 지견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지견이 안 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라고 입을 모았다.

“눈만 마주쳐도 움찔하게 됐지요.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하는 의문을 주는 눈빛이었으니까요. 도인의 에너지로 집중이 잘 됐고, 또 공부에 열의를 가진 알토란 같은 이들이 모여 있으니 집단의 에너지도 대단했지요. 말 한마디도 조심하게 되고 잠시도 한눈 팔지 못하니, 공부가 순일하게 됐습니다.”

스승은 “눈이 보는 게 아니다, 귀가 듣는 게 아니다, 빛과 소리와 냄새가 떠난 자리인 허공이 그걸 본다”는 말을 하고 또 했다. 모든 경전을 선(禪)의 도리로 풀었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연 2회의 일주일 철야정진은 서울 정릉 보림사에서 했는데 1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해 열기

   
 

가 뜨거웠다. 백봉거사는 10시, 2시, 7시에 설법을 했고 이는 이미 연로한 때였다. 기력이 있을 땐 밤에 6번씩 설법을 했다고 한다. 백봉은 “죽는둥 사는둥해야 깨닫기 쉽다”고 했다. 백봉이 주창한 ‘거사불교’는 일터로 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최운초 씨는 백봉의 집에 입주해 9개월간 공부한 후, 삼성에 취직했다. 합격소식을 들은 스승은 “섭섭하다”라고 한 마디 하셨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회사에 다니면서도 보림선원의 토요일 철야정진에는 참석했다. 백봉 문하의 사람들은 “토요일은 집에서 잠을 안잔다.”고 했다. 그리고 여름, 겨울의 정진법회에도 휴가를 내고 참석했다.

1985년 백봉거사가 지리산 선원에서 입적했지만 그 뒤로도 “자석에 끌리듯 다른 길을 갈 수 없는 이들”인 백봉 문하의 이들은 스승의 육성을 틀어놓으며 스승이 주창한 ‘새말귀’ 수행을 이어갔다.

불교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을 말합니다. 우선 믿고 그 후에 이해하라고 하지요. 그러나 나의 스승은 ‘해’로 시작했어요. ‘이치에 맞는 말인지 아닌지를 따져보고 이치에 맞으면 그 때 믿어라!’라고 가르쳤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조차 ‘맹목적으로 받아 들이지 말라!’고 외쳤어요.”

바닷가 비닐하우스에 살며 기꺼이 제자 지도한 백봉

많은 이들이 백봉에게 직접 공부를 배운 자신이나 자신의 도반들을 부러워하고 또 궁금해했다.

그래서 2011년 《공겁인》을 출간했다. 2005년 백봉 문하의 도반들에게 각자의 수행기를 쓰도록 요청해 수행기를 받았는데 그것이 토대가 돼 백봉의 제자 11인을 인터뷰해서 정리한 글이다. 그리고 2018년 《공겁인2》가 나왔다. 앞의 11인에 들어가지 않은 이들에게 듣는 원성이 크기도 했고, 남은 제자들에게 스승의 이야기를 들을 날이 많이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최운초 씨는 책을 준비하면서 백봉거사의 밑에서 공부한 것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스승이 다가왔다. 그는 이번 백봉거사의 전기를 준비하면서 300여 개의 백봉 설법테이프를 들었다. 최 씨는 스승을 점점 더 존경하고 왜 그 자리에 그 단어를 썼는지, 왜 저 곳에서, 저 때 저런 말씀을 하셨는지 생각해보게 됐다. 그것이 자신의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그에게 저자로서 가장 마음이 가는 대목을 골라달라고 했다.

1974년 무렵, 학인들의 목마름을 채워주려 서울이나 대전에 있던 자신의 따듯한 공간을 마다하고 바닷바람이 뚫고 들어오는 부산 송도의 비닐하우스에서 지낸 스승 백봉거사를 생각하면, 그 대목을 읽을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했다.

자에게 남은 것은 ‘새말귀’ 수행

최운초 씨는 스승의 입적 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공부에 진전이 없다고 느끼다가 그 뒤 두 차례의 큰 변화를 겪었다. 첫 변화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고 서울대를 나왔으며 한국의 가장 큰 회사에서 인정받는 경험을 한 자신에게 연민, 평등, 화합 등의 감정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남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려 노력했다. 그랬더니 자비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 번째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났다. 한밤 중 잠에서 깨었다가 다시 누웠는데 문득 육신이 잠에 빠져 드는 걸 알았다. 며칠 후 의식이 가라앉기 시작하더니 떨어지고 빨려 들어가는 과정을 지나 순수의 상태가 되었다. 그 순수의 힘은 습성과 오욕칠정을 이기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스승이 가르쳐준 것이 이해가 됐으며 지혜가 나아진 것을 느꼈다.

   
▲ "스승의 전기를 출간해 금생의 할 일은 다했다."는 최운초 씨.

그의 현 직업은 커피 로스터다. 서울에 집이 있지만 안성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지방에서 자신이 일러 준 대로 일하는 젊은 로스터에게 가끔 지시하거나 소통한다.

눈을 뜨면 커피를 두 잔 내려 한 잔을 불단에 올려 모닝커피를 대접하고 자신도 불단을 바라보며 커피를 맛본다. 그리고는 맑은 정신으로 예불을 한다. 커피를 맛보고 예불을 하는 일 외에는 정해놓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하루를 보낸다. 음악도 듣고 스승의 설법도 하루 한 시간 이상 듣는다. 전기 작업을 하기 위해 들었던 법문 중 나중에 다시 듣자고 한 법문이 꽤 많다. 법문 테이프에는 “최군!”하고 자신을 지목해 대답을 채근하는 스승의 목소리도 들어있다.

이런 삶을 살기까지 그도 현실적인 삶이 어려운 적이 있었다.

주말도 없이 일하는 대기업에서 스스로 나와 자신의 회사를 차려 운영하다가 IMF 외환위기를 맞았지만 도리어 기업 컨설팅의 기회가 되어 회생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에는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했고 거래처에도 결제를 해주지 못했다. 그는 여러 고민 끝에 《천수경》을 사서 한 시간씩 읽으며 참회를 했다. 결국 재기하지는 못했지만 딱딱하던 가슴이 풀리고 백일이 지나니 가슴이 텅 비어 청정함만 남았다. 그 뒤로는 흐르는 대로 가고 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미망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았나 싶다.

"스승의 전기를 마치며 금생에 내 할 일은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죽는 날까지 ‘새말귀’, 삼계의 주인공으로서 삶을 굴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백봉이라는 장수를 만난 나는 그의 병사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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