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기에 설립된 불교계 사학(私學)에 대한 연구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에 집중돼 있다. 불교교육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다양한 연구 성과가 이어지고 있지만, 불교종립학교와 교육에 대한 연구, 특히 여성교육기관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일제 강점기 설립된 명성여학교(현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여자고등학교)에 대해 학문적 평가를 시도한 논문이 발표됐다.

《대각사상》 제32집에 수록된 김은영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의 논문 <명성여학교의 설립과 운영(1931~1945)>이 그것.

김 연구원은 이 논문에서 정부(당시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받은 불교계 첫 정식 여성교육기관인 명성여학교가 근대 불교교육사에서 갖는 의의를 민족관과 종교관, 여성관으로 나누어 살폈다.

‘민족관’에 대해 김 연구원은 “명성여학교가 개교한 1930년대는 불교계 청년단체의 활동이 부진해지면서 독립운동의 기상이 쇠약해지던 시기였다.”며, “명성여학교 역시 마찬가지여서 독립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흔적을 찾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 연구원은 “학교 인가 당시 교장이었던 최범술이 만당의 일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학교 운영도 민족자주의식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여학교를 중단 없이 유지했다는 것만으로도 교육을 통해 민족여성인재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명성여학교의 ‘민족관’에 대한 평가는 식민지의 엄중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 법인이나 단체의 보호 없이 조선 여성들 위주로 운영되던 학교 처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명성여학교 교실이 있었던 보성고보 교사. 조계사 경내에 있었다.

사회 진출교육 우선… 기본 신행위주 불교관

김 연구원은 “이웃 종교계처럼 외국 선교사 같은 외부 세력과 자본에 의지하지 않고 재가여성불자가 주체가 돼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한 자주성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덧붙였다.

명성여학교의 ‘종교관’에 대해 김 연구원은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위해 준비협의회에 참여하는 등 불교계와 관계는 계속 이어갔다.”면서도, “학교 차원에서 불교의 여성관을 탐구하고 교리 상 여성에 대한 내용을 근거로 포교한 내용은 찾기 힘들다.”고 밝혔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위한 교육이 우선이었고, 여학교 운영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투철한 신앙심 탐구보다는 기본적인 신행활동 위주의 종교관과 불교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 연구원은 또 “1934년 합교한 숭동여학교가 기독교 계열이기는 하지만 이듬해 비종교계인 창명학교와 자하학교를 흡병한 점을 고려하면 불교계가 기독교계 학교를 인수했다기보다는 사정이 어려운 학교를 인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여성관’에 대해 김 연구원은 재가여성불자가 명성여학교를 운영한 것에 주목했다. 김 연구원은 “명성여학교 설립과 초기 운영 과정에서 불교계 여성운동은 남성을 중심으로 한 기존 운동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며, “남성 출가자와 재가신도로 구성된 조선불교청년회가 민족운동과 사회문제, 불교개혁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 데 비해 여자청년회는 여성재가불자의 교육함양에 힘썼다.”고 평가했다. “학교 설립 동력이었던 단체(경성여자동맹)가 유명무실해질 때도 학교 운영은 계속되었다.”고 지적한 김 연구원은 “개화기와 해방 이전 어려운 현실에서 명성여학교의 설립과 운영은 여성교육에 대한 불교계의 사회적 의식을 전환하고, 불교여성의 근대의식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명성여학교 정식인가는 불교계 여성교육기관 인정”

김 연구원은 이 논문에서 명성여학교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도 바로잡았다.

이제까지 명성여학교는 1930년 설립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김 연구원은 개교 준비기간을 포함한 것으로 보았다. 김 연구원에 따르면 명성여학교는 1931년 명성여자실업학원을 개원하면서 시작됐는데 당시 학제상 간이학교였고, 학력을 인정받는 정식학교로 개교한 것은 1935년이라는 것이다. 김 연구원은 “명성여학교로 정식 인가 받은 것은 불교계 여성교육기관이 사회제도상 인정받았다는 의미와 근대불교 중등과정 여성교육기관 중 처음으로 공교육기관의 시발이 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상호 또는 김광호로 알려진 2대 교장도 “김광호 여사가 원장으로 취임했다.”는 학교 기록과 초기 명성학원의 주요 운영 구성원이 경성여자동맹 임원이었던 점을 근거로 김광호로 판단했다.

태고사(현 조계사) 경내에 있었던 보성중 교사와 각황사로만 알려졌던 명성여학교의 위치도 보성고보 교사(1930~36), 보성사(1936~37), 각황사(1938)이었음을 확인했다. 김 연구원은 “여러 차례 이전한 것은 중앙불교계의 사정에 따라야 하는 명성여학교의 처지를 알 수 있는 단초이자 불교계와 관계가 지속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김 연구원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불교계의 학교교육은 한국불교사 측면 뿐 아니라 근대 교육사 및 여성사 측면에서도 필히 참구되어야 할 주제”라며, “초기 명성여학교의 주체였던 여성들에 대한 연구와 조망은 계속되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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