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열린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점심식사가 채식으로 차려졌다. 이보다 앞선 골든 글로브상과 미국배우조합상도 마찬가지로 채식 메뉴로 제공되었다.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조커〉의 주인공 호아킨 피닉스는 이런 채식 메뉴 제공을 수상소감에서 먼저 입에 올렸다.

그는 “축산업과 기후 변화의 관계성을 인정해 줘서 주최 측에 감사하다”며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단절되고 있고,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소를 인공적으로 수정시키고, 태어난 송아지를 강탈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며 “송아지가 먹어야 할 우유를 빼앗아 커피나 시리얼에 넣는다.”고 꼬집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모든 존재를 위해, 그리고 환경에 이로운 구조적인 변화를 위해 창조·발전시킬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 인터뷰를 유튜브로 보여준 것은, 현재 전등사에서 〈우리사이의 동물들〉 전시를 하고 있는 정은혜 작가다.

▲ 전등사 무설전 앞에서 정은혜 작가가 '피어오르리' 작품을 손보고 있다.(사진 선견 스님)

슬픔을 딛고 희망으로 띄운 배에 태운 작은 존재들

전등사는 지난해 청년작가 전시지원 공모사업을 진행해, 한국화가 한경희 작가와 도자조각가 정은혜 작가를 선정했다. 현대적인 법당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지어진 무설전의 회랑과 야외공간을 ‘서운갤러리’라는 이름으로 활용해 선정작가의 작품을 전시한다.

정은혜 작가의 작품은 2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3개월간 전시되며 도록과 작품운송 지원, 소정의 창작지원금이 수여된다.

무설전 앞뜰에서 60척의 배에 탄 동물이 관람객을 맞는다. 파랗고 작은 배에는 한, 둘의 동물이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맨 앞의 말은 횃불을 들었고, 닭, 고양이, 돼지, 소, 양, 염소, 오리, 토끼, 염소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앞쪽의 작품은 작고 뒤로 갈수록 큰 것을 배치했다. 제일 작은 작품은 배 길이가 8cm이고 크다고 해도 30cm 내외다. 그래서 몸을 낮추고 보아야 그들 각자가 어떤 몸짓을 하는지 보인다. 가족도 있고 기타나 나팔을 연주하기도 하고, 꽹과리를 든 염소도 보인다. 뽀뽀하는 아빠와 아들도 있고, 책을 보거나 양손을 입에 대고 소리치는 소도 있다. ‘등파고랑(登波鼓浪)’이라는 제목의 작품, 이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 등파고랑(登波鼓浪) 부분 ceramic 2014~2017

도예학과를 졸업한 이래 계속 동물과 관련한 작업을 해왔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장면을 차지하는 세월호 사건으로 그의 작품세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당시 무척 바쁜 때였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청계천 광장으로 가 집회에 참석한 많은 이들을 보고 슬픔을 함께 할 뿐이었지요. 진도에 직접 가보지 못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생각하다, 도자로 동물작업을 해왔으니 그걸로 표현해보자고 하나씩 빚기 시작했어요.”

그의 작품은 두 가지 화법을 갖고 있다. 직설적이면서도 우화적인 화법. 보는 이에 따라 한 가지 형식으로 이해해도 되지만 둘을 다 안다면 훨씬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그가 선택한 ‘푸른 배’는 바닷물을 흠뻑 머금어 더 이상 가라앉을 수 없음을 상징한다. 절망이자 더 이상은 절망하지 않겠다는 희망의 몸부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배에 탄 동물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존재들이다. 처음에는 세월호 희생자를 형상화하려다 기존 자신의 방식으로 동물을 의인화했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모두 같은 희생을 당할 수 있다는 좀 더 넓은 의미를 두자고 생각했다.

그는 어떠한 틀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하나하나 동물과 배를 만들어나갔다. 작은 동물을 앞에 배치한 것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존재에게 발언권을 주고 싶은 이유에서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60점을 만들었는데 그는 “아직 끝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실은 동물을 한 쌍으로 만들 때마다 자신이 가장 위로 받았다. 기도 같은 의식이었다.

인간 위주의 세상에서 동물이 느끼는 고통

본래 어릴 적부터 강아지를 키우며 동물을 좋아하던 정은혜 작가는 2008년 태국 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코끼리 트레킹을 하게 됐다. 그때 코끼리 몸에 난 수많은 상처를 보았고 귀국 후 자료를 찾아보다 ‘파잔 의식’을 알았다. 새끼 코끼리를 어미에게서 강제로 떼어내 좁은 곳에 묶어놓고 찌르고 때리고 학대하며 인간에게 복종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그때부터 그는 줄곧 동물을 형상화해왔다.

이번 전시회에는 없지만 ‘서커스 유랑단’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광대가 네 발로 땅에 있고 코끼리는 광대의 등을 딛고 서있다. 작가의 안쓰럽고 화나는 마음이 작품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 너는 늙어봤느냐 IV 33×32×62cm ceramic 2018

정 작가는 일관되게 동물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생명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작가 노트에 “현시대에 가장 고통 받는 존재라고 생각되는 동물을 소중히 다루어져야 하는 도자로 형상화함으로써 동물도 하나의 생명체로 존중받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너는 늙어봤느냐’ 시리즈를 보면 두건을 쓴 늙은 돼지가 보행 보조기를 밀고, 안경을 닦는 늙은 소, 병아리를 업은 수탉이 등장한다. 만약 제 수명대로 살았다면 자연스럽게 늙어갈 동물이지만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서는 단지 ‘먹잇감’으로 살다 죽어가는 상황이 안타까워 만들었다. 그는 동물들이 살고 싶은 만큼 살다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작품들을 만들었다고 했다.

▲ 피에타(pieta-2) 16×14×26cm ceramic 2019

‘피에타’ 시리즈는 민중 미술가인 케테 콜베츠의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에서 영감을 얻었다. 우리가 먹을 것으로만 생각하는 동물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얼핏 보면 사람을 흉내 낸듯한 근엄함이 엉뚱하고 과장된 것 같아 웃음이 나지만 들여다볼수록 뭔가 묘한 느낌이 든다.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은 누구나 똑같을 수 있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돈’에 동물을 새겨 넣은 작품도 있다. 〈코인〉 시리즈는 돈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처럼 동물의 권리를 생각하면 어떨까 하는 풍자다.

요상한 자세를 취하는 젖소가 주인공인 작품들은 ‘무제’ 시리즈다. 춤을 추거나 잠을 자는 것 같은 이 모습은 젖소가 요가 하는 모습이다. 작가 자신이 요가를 하며 위안을 받던 때, 동물도 이런 위안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획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요가에서 ‘아기자세’라 하는 동작의 젖소가 슬쩍 미소 짓는 것 같다.

▲ My Dear (Gamja) 32×41×93cm ceramic 2020

또 멧돼지와 고라니가 주인공인 ‘My Dear’ 시리즈 뒤에는 ‘콩’, ‘감자’ 등이 제목으로 붙었다. 그들이 우리 인간의 삶을 침범해 악동의 이미지로 비춰지지만 실은 먹이를 구하러 내려온 불쌍한 동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두 손으로 양 입꼬리를 올리는 행위는 영화 〈조커〉를 본 딴 것이다.

“조커도 처음부터 악당은 아니었을 거예요. 환경이나 사회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졌지요. 멧돼지나 고라니도 사람에게 피해를 주려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화려한 액자 속 고상한 몸짓을 한 동물들이 ‘Room’에는 스테이크를 앞에 둔 소 부부, 가죽 가방과 쟈켓 사이에 앉은 양 아가씨, 화장대 앞에서 립스틱을 바르려는 토끼, 털 패딩을 입은 오리가 등장한다. 인간처럼 낯익지만 잠시라도 작품 앞에 멈춰서면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그대로 표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토끼의 예민함을 이용해 화장품을 토끼의 눈에 바른 후 그 몸에 이상이 있는지 알아내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결국 토끼는 눈이 멀고 만다. 이런 실상을 비틀어서 그들이 겪는 고통을 담담하게 드러내는 방식이 섬뜩하기도 하다.

▲ Room 102호 53×55×15cm ceramic&mixed media 2019

당신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정 작가의 작품 중 연꽃과 동물이 어우러져 불교색채가 보이는 ‘피어오르리’라는 작품이 두 점 있다.

자신이 사는 김포에서 전등사로 작품 전시 회의를 위해 오가던 2019년 9월 즈음, 아프리카 돼지 열병으로 너무 많은 돼지가 살처분 됐다. 방역초소에서 방제를 하며 내뿜는 연기를 보며 연기 사이로 돼지들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고 그들을 되살리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도자로 되살아난 돼지는 연꽃 위에 있기도 하고, 그들 머리 위로 연꽃이 피어나기도 했다. 마침 그 시기에 전등사와 인연이 되었기에 탄생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그에겐 종교가 따로 있지 않지만 자신이 걱정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불교가 존중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중심이 아니라 생명을 같은 무게로 존중한다는 의미다. 또 지금까지는 실내의 딱딱하고 천편일률적인 공간에서 전시해왔는데 자신의 작품을 야외에서 전시하면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래서 전등사의 1회 신진작가 공모전에 출품했고, 생각지도 못하게 당선됐다고 한다. 심사위원은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닌, 사회적인 메시지를 보여줬다”고 선정 이유를 들려줬다.

그가 표현하는 건 동물의 가장 슬프고 힘든 상황인데 왜 웃기게 보이는 건지 묻자 “나의 작업 속에서나마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유머러스하게 형상화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작가에게 ‘시대정신’과 ‘웃음’을 버무려 주는, 지금과 같은 작업을 지속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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