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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시대정신 키운 만해사상의 고향
길 따라 떠나는 사찰순례 8 -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 봉정암
2019년 12월 12일 (목) 08:45:16 이창윤 기자 budjn2009@gmail.com
   
▲ 만해 스님이 오갔던 오세암길.

‘제2의 금강산’ 설악산

설악산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산 중 하나입니다. 한라산, 지리산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로 높은 설악산에는 사시사철 탐방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설악(雪嶽)’이라는 이름은 ‘한가위에 덮이기 시작한 눈이 하지에 이르러서야 녹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 덮이고, 암석이 눈같이 희다’는 뜻에서 ‘설악’으로 불리게 됐다”고 합니다.

설악산은 흔히 ‘제2의 금강산’으로 불립니다. 험준하지만 수려한 산세, 맑은 계곡과 어우러진 기암괴석, 자연과 하나가 된 암자가 절경을 이룹니다. 설악산에 들어 능선과 계곡을 살펴보면 “금강산은 수려하지만 웅장하지 않고, 지리산은 웅장하지만 수려하지 않은데, 설악산은 수려하면서도 웅장하다”는 옛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백담계곡과 수렴동계곡, 구곡담계곡 일원은 설악산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힙니다. 이곳이 아름다운 것은 자연이 빚어낸 절경 때문만은 아닙니다. 백담사(百潭寺), 영시암(永矢庵), 오세암(五歲庵), 봉정암(鳳頂庵) 등 여러 사찰과 암자가 출가자의 수행처이자 불자들의 의지처로 천 년 넘게 법등을 밝히며 문화적 경관을 구축해온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입니다.

   
▲ 백담사는 만해 스님이 출가한 사찰이다. 이곳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했다.

백담사, 자장 율사 창건…화재·재건 7차례

내설악 사찰 순례는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시작합니다. 마을버스를 타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6.5km 남짓 백담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영실천을 품은 백담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백담사는 원래 인제군 한계리에 있던 사찰입니다. 진덕왕 원년(647) 자장 스님이 절을 짓고 한계사(寒溪寺)라 이름 한 것이 시초입니다. 신문왕 10년(690) 한계사가 불타고 30여 년 뒤인 성덕왕 18년(719) 낭천현(지금의 화천군) 비금사를 이곳에 옮겨 중창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절이 불탄 뒤 터를 옮겨 다시 짓는 일이 일곱 차례나 반복됐습니다. 그 사이 절 이름도 운흥사(雲興寺), 심원사(深源寺), 선구사(旋龜寺), 영축사(靈鷲寺) 등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절이 ‘백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세조 3년(1457)의 일입니다. 절이 불타자 재익(載益), 재화(載和), 신열(愼悅) 스님 등이 상류 20리 지점에 절을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백담’이라 지었다 합니다. 백담사는 최붕(最鵬), 태현(太賢), 태수(太守) 스님 등이 영조 51년(1775) 불탄 절을 다시 지으면서 심원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9년 뒤인 정조 7년(1783) 중건되면서 ‘백담’이라는 이름을 되찾습니다.

‘백담’이라는 절 이름에는 거듭되는 화재를 막아보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주지 스님이 백발노인이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를 세어보라.”고 당부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튿날 일어나 세어보니 100개였습니다. 스님은 ‘웅덩이 담(潭)’ 자를 넣어 ‘백담사’라 이름 짓고 지금 장소로 절을 옮겼다고 합니다.

만해 출가·불교유신론 집필처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스님이 불교와 인연을 맺은 곳이자, 스님의 사상이 무르익어 간 곳입니다.

스님은 흥선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의 명운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던 고종 16년(1879)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열여섯 되던 고종 31년(1894)년, 동학운동이 실패하고 청일전쟁으로 국토가 외세에 짓밟히는 것을 본 스님은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떠돕니다. 그러다 건양 원년(1896)년 백담사의 산내암자인 오세암에 들어가 부목(負木)으로 일하며 불교를 배웠습니다. 스님은 광무 9년(1905) 백담사에서 연곡(蓮谷) 스님을 은사로, 영제(泳濟) 스님을 계사로 득도했습니다.

오세암에는 고종 원년(1865)에 남호 스님이 인출한 해인사 고려대장경을 보관한 대장전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르내리며 경전을 공부하고 선을 배웠습니다. 또 불경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며 사유의 폭을 넓혀 갔습니다. 스님은 청나라 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가 지은 계몽사상서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과 청나라의 지리학자인 쉬지위(徐繼畬)가 지은 세계지리서 《영환지략(瀛環志略)》을 읽고 서양철학과 세계정세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넓은 세계로 나아가 더 많은 문물을 배우겠다고 결심한 스님은 블라디보스톡으로 가 세계 일주에 도전했지만 일진회 회원으로 오인한 교민의 총격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서양의 각종 문물이 일본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스님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융희 2년(1908) 4월 일본으로 건너가 6개월 간 머물며 선진문물을 경험하고 불교와 서양철학을 배운 뒤 돌아왔습니다.

이렇듯 만해 스님은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가며 불교사상을 익히고 참선 수행하며,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에 눈떴습니다. 그 결과물이 1909년 집필을 시작해 이듬해 백담사에서 탈고한 《조선불교유신론》입니다. 만해 스님은 이 책에서 한국불교의 비종교적, 비시대적, 비사회적 인습을 타파·혁신해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승려교육, 참선, 염불당 폐지, 포교 강화, 불교의식 간소화, 주지의 선거, 사원 통괄 등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현재 백담사는 스님이 출가할 당시 모습이 아닙니다. 1915년 겨울 일어난 화재로 70여 칸에 이르는 당우와 경전, 범종이 모두 불탔습니다. 당시 주지인 인공(印空) 스님이 오세암에서 절일을 보면서 복원불사를 시작해 1921년에 낙성했지만, 한국전쟁 때 다시 불타 1957년에야 재건됐습니다.

백담사 경내에서 만해 스님의 옛 자취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경내에 있는 만해 스님의 동상과 스님의 삶과 사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꾸며 놓은 만해기념관이 있어 그나마 이곳이 만해사상의 고향임을 더듬을 수 있을 뿐입니다.

   
▲ 수렴동계곡. 백담사에서부터 영시암을 지나 수렴동대피소까지 4.7km 가량 이어져 있다.

 

   
▲ 조선 중기의 유학자 삼연 김창흡이 창건한 영시암. 폐허가 된 이곳을 영조 때 설정 스님이 중건하고 수행도량으로 삼았다. 봉정암을 오가는 등산객과 마등령, 대청봉 등지로 산행하는 이들이 쉬어가는 절이다.

기도·탐방객이 쉬어가는 암자 ‘영시암’

백담사에서 나와 수렴동계곡을 따라 영시암으로 향했습니다. 노약자도 쉽게 오갈 수 있는 오솔길이 4.7km 가량 이어집니다. 수렴동계곡은 경치가 금강산 수렴동계곡과 견줄만하다는 데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합니다.

영시암은 조선 중기 유학자인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부친 김수항이 사사되고 모친마저 돌아가자 세상을 버리고 은거한 곳입니다. 김창흡은 숙종 33년(1707) 벽운정사를 지어 설악산에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화재로 전소되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영시암을 창건했습니다. ‘영시암’은 김창흡이 영원한 은거를 다짐하짐하며 지은 당호입니다. 숙종 40년(1714) 함께 지내던 최춘금이 호랑이에게 물려죽고 김태흡이 떠나자 영시암은 곧 폐허가 됐습니다. 그 뒤 영조 36년(1760) 설정(雪淨) 스님이 폐허가 된 영시암을 중건했습니다.

영시암은 기도를 위해서든 산행을 위해서든 설악산을 오르는 이들은 꼭 쉬어가는 곳입니다. 경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잠시 목을 축인 뒤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영시암을 벗어나면 오솔길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왼쪽 길을 택하면 오세암을 거쳐, 오른쪽 길을 택하면 구곡담계곡을 거쳐 봉정암으로 갈 수 있습니다. 길은 구곡담계곡 쪽이 한결 편합니다. 하지만 불자 중에는 일부러 힘든 오세암 길을 택하는 이도 있습니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정성을 다하기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부러 고행 길을 택한 것이지요.

   
▲ 오세동자의 전설로 유명한 오세암은 만해 스님이 입산한 암자다. 매월당 설잠 스님도 이곳에서 축발했다.

만해 스님의 오도처 ‘오세암’

영시암에서 한 시간 남짓 산길을 오르면 오세암에 다다릅니다. 오세암은 만해 스님이 언제든 돌아와 쉬던 안식처이자, 스스로를 성찰하고 정진하던 수행처였습니다. 스님은 1917년 12월 오세암에서 참선하던 중 불어온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남아에겐 어느 곳이나 고향이건만
그 몇 사람 나그네 설움에 길이 갇혔나.
한마디 큰 소리 질러 삼천대천세계 뒤흔드니
눈 속에 복사꽃 붉게 피네.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紅

- 만해 스님 오도송

오세암의 원래 이름은 관음암 입니다. 설정 스님이 인조 21년(1643) 중건하고 이름을 오세암으로 바꾸었습니다. 암자 이름은 월동을 준비하려고 장을 보러 나갔다가 폭설이 내려 이듬해 3월까지 돌아오지 못한 설정 스님을 대신해 다섯 살 어린아이를 돌본 관세음보살의 영험담에서 비롯됐다 합니다.

또 이곳에서 출가한 설잠(雪岑, 김시습, 1435~1493) 스님이 다섯 살〔五歲〕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아는 신동이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거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출가한 설잠 스님이 스스로를 빗대 오세(傲世), 즉 ‘세상을 비웃는다’고 한데서 유래됐다고도 합니다.

설잠 스님은 세조 2년(1456) 무렵 오세암에 주석했습니다. 만해 스님이 지은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기(乾鳳寺及乾鳳寺末寺事蹟)》와 《백담사사적》에 따르면 “2483년(세조 2년, 1456) 영축사가 불타고, 매월당 김시습이 관음암에 와서 머리를 깎고 치(緇, 승복)를 입었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까지도 오세암에는 선비와 스님 모습의 설잠 스님 초상 두 점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권용정(權用正, 1801~?)은 <설악내기(雪嶽內記)>에서 “암자 왼쪽 작은 방에 매월당의 초상 두 폭을 모셨다. 한 폭은 넓고 둥근 갓을 쓰고 남색 도포를 입었다. 또 한 폭은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있었는데, 눈이 맑아 마치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기록했습니다.

설잠 스님은 오세암에 머물며 중국 당나라 동안 상찰(同安 常察) 스님이 지은 《십현담(十玄談)》을 주석한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를 지었습니다. 만해 스님은 1925년 오세암에서 여름을 날 때 《십현담》과 《십현담요해》를 보고 “두 주석이 각각 오묘함이 있어 원문의 뜻을 해석하는데 충분하지만, 말 밖의 뜻에 이르러서는 나의 견해와 더러 같고 다른 바가 있다”며 《심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지었습니다.

   
▲ 자장 율사가 모셔온 부처님 뇌사리가 봉안된 봉정암 불뇌사리탑. 보물 제1832호로 지정돼 있다. 지정 명칭은 ‘인제 봉정암 오층석탑’이다.

오세암을 참배하고 봉정암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날씨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영시암을 떠날 때부터 소슬하게 계곡을 헤집던 바람은 오세암을 지나 봉정암으로 향하자 비를 몰고 와 ‘어서 돌아가라’는 듯 등을 때렸습니다. 겨우 몸을 가려주던 비옷은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바람에 흩날리고, 젖은 신발은 더는 가지 말라는 듯 발을 부여잡았습니다. 가야할 길은 된비알인데, 설상가상으로 두 허벅지에서는 경련이 일어나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힘들었습니다. 불현듯 목적지에 도착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고통의 끝에 다다르면 의지할 곳을 찾기 마련입니다. 절로 ‘관세음보살’의 명호가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정근을 하며 힘을 내 다시 산길을 올랐습니다. 마음이 편해져서일까요? 힘이 조금씩 생겨났습니다. 고통스러운 발걸음을 쉬었다 옮기길 수백 번, 날이 저물고서야 봉정암에 도착했습니다. 오느라 고생했다는 듯 눈앞에 불빛이 반깁니다.

누구나 평탄한 삶을 바라지만 때론 힘든 길을 가야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이의 뜻을 따라 그 길을 가는 이도 있지만, 스스로 그 길에 뛰어든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본질을 찾아 지난한 출가수행자의 길을 택한 이나, 그릇된 현실을 바로잡고자 삶을 투쟁의 험지에 던진 이들이 그런 이들입니다. 설악산 깊은 곳에서 세상의 변혁을 꿈꾼 만해 스님은 출가 수행자로서, 또 독립운동가로서 고난으로 점철된 길을 ‘고독하게’ 걸어갔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된비알을 고통스럽게 오르며 만해 스님의 삶이 위대함을 새삼 느꼈습니다.

부처님 뇌사리 봉안한 적멸보궁 ‘봉정암’

봉정암은 자장 율사가 선덕왕 13년(644)에 창건한 암자입니다. 자장 율사는 중국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할 곳을 찾아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나타난 봉황이 율사를 인도한 곳이 봉정암이라고 합니다. 봉황은 이곳에 이르러 부처님 얼굴 모습을 한 바위 꼭대기에서 사라졌는데, ‘봉정’이란 이름은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봉정암은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중대, 정선 정암사, 영월 법흥사와 함께 5대 적멸보궁 중 한 곳입니다. 이곳 사리탑에는 부처님의 뇌사리가 모셔져 있다 합니다. 그래서 이 탑을 ‘불뇌보탑(佛腦寶塔)’ 또는 ‘불뇌사리보탑(佛腦舍利寶塔)’이라고 부릅니다.

진신사리탑은 자연암석을 기단부 삼아 그 위에 오층 탑신과 옥개석을 얹었습니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처럼 설악산 전체가 이 탑의 기단인 셈이지요. 기단으로 삼은 바위에는 한 면에 4개씩 모두 16개의 연꽃잎을 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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