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앞의 연화세계를 표현한 '한지 지화전', 이송자 작가 모습.

불상 앞에 연꽃이 곱게 올라온 연밭이 펼쳐졌다. 감로탱을 재현한 모습이다.

지난 11월 6일까지 불일미술관에는 종이로 만든 꽃[지화(紙花)]이 부처님을 공양하는 전시가 열렸다. 향기만 없다 뿐이지 실제 꽃에 비견할만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종이가 어쩜 이렇게 예쁜 꽃이 될 수 있어요?”

관람객들은 저마다 눈을 떼지 못했다.

이송자 지화장도 종이가 꽃이 되는 매력에 빠져 35년 넘게 꽃을 만들고 있다.

11월 중순, 연등회의 전승전통등 경연대회의 심사를 마치고 나온 이송자 지화장을 만났다.

절일 돕다 배운 지화에 빠져

이송자 씨가 아직 아이가 없던 30대 새댁 시절, 집에서 가까운 법륜사에 갔다. 채공이 셋, 공양주가 두 명일 정도의 규모 큰 법륜사에 가면 강아지 손도 빌릴 정도로 바빴다. 초하루면 700여 명이 오고, 6인 상을 100개 이상 차리는데 반찬이 20여 가지였다. 양반집이나 상궁을 지낸 어른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서 모든 것이 여법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태고종의 총무원장과 종정을 지내신 덕암 스님이 계셨다. 후원에서 일손을 도우라는 말씀을 돌려서 “후원 좀 들여다봤습니까?”라고 하시던 어른스님었다.

이송자 씨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석주 스님 계시던 칠보사에 다녀서 절이 낯설지 않았다. 법륜사에서는 친정아버지처럼 자신을 예뻐해 주시는 덕암 스님의 말씀이 좋아 절의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며’ 손을 보탰다. 종이꽃를 배운 것도, 고임새를 배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동지를 세고 나면 연꽃을 만들려고 종이를 비비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단순히 일을 돕다가 점점 꽃 만드는 일이 너무 재밌어졌어요. 그래서 노스님들만 보면 쫓아가서 만드는 방법을 여쭤보았지요.”

 

더 예쁘게 만들고 싶어하다보니 어느 스님이 봉덕사 경운 스님을 일러주셨다. 한달음에 달려가 “꽃 가르쳐 주세요”하며 배웠다.

그런데 경운 스님이 가르쳐준 방법 중에는 종이를 씹어서 만드는 방법도 있었다. 미농지에 화학염료로 염색한 종이를 씹으면서, 입 주변이 빨갛게 물드는 걸 보니 너무 몸에 안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학염료가 나오기 전인 옛날에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며 종이 천연염색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미 그는 민화를 그리고, 옷감에 천염염색을 하는 등 취미활동을 하던 터였다.

옷감과 달리 종이는 천연염색하기가 어려워 수많은 실패 끝에 순지로 천연염색을 성공했다. 순지는 닥이 많이 들어간 종이로 그나마 두껍고 단단하다. 종이를 자르고 물들이고 나면 발다듬이로 주름을 펴야한다. 그래서 20여 년 전부터는 지화 만드는 종이를 천연염색으로 완전히 바꿔서 했다.

화합해 복을 받는 지화 작업

꽃을 만드는 일이니 고상하고 기품 있는 작업과정일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긴 머리는 둘둘 말아 비녀처럼 막대 하나 꾹 찍어놓고 옷도 염색으로 얼룩덜룩해진 작업복을 입고 퍼질러 앉는다.

또 수륙재나 영산재 등 큰 재일수록 본인이 사다리에 올라 상‧중단의 꽃을 직접 살핀다. 주위에서는 남자들 시키라며 만류하지만 직접 봐야 조화가 이뤄지는지, 똑바로 꼽혔는지 알 수 있다며 꼭 본인이 체크한다. 간혹 위험할 때도 있지만 “신중, 영가들이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그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처음에는 예쁜 꽃 만드는 것을 쫓아 만들었지만 어느 정도 숙련이 되자 개인적인 취향이나 관심보다는 문화재로서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종이꽃을 만드는 것은 재에 신도들이 참여하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에 한 방에 모여 꽃을 만드는 이 모두 화합해서 복을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누구 하나가 잘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다 같이 합심해서 해내는 게 중요합니다.”

이송자 지화장은 사찰의 요청이 오면 사찰 단위로 신도들에게 교육한다. 자신의 후계자를 양성하기 보다는 여법하게 사찰의 재를 치르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재로 제주 약천사 회주 혜인 스님 열반일에 급하게 가서 그곳 신도 일곱 명과 2천 개의 꽃을 만든 일이다. 꽃을 전문적으로 만들어보지 않은 이들에게 한 부분씩만 작업을 정해 분업화하면서, 재료도 아직 준비되지 않아 우선 나무젓가락에 연꽃을 만들었다. 만들어 놓은 꽃은 행여 구겨지거나 눅눅해질까봐 스티로폼 단에 꼽아놓았는데 나중에는 그것 자체가 장관이었다. 영전에 놓인 연꽃은 나중에 다비하는 연화대를 장식했다. 생화라면 못할 일이다.

 

그는 일의 어려움이나 갑작스러움 등을 따지지 않고 부탁이 들어오는 일은 다 해내려고 한다. 개인의 일로 생각했다면 할 수 없었을 거라고 했다. 내가 조금 힘들면 전통을 지키는 일이고, 후세에도 전통이 이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내 손으로 만들지만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다.

또 돈을 쫓지도 않았다. 돈이라면 먹고 살만큼 있었다며 그가 웃었다. 아마 돈을 벌려 했다면 꽃을 만들어서 납품하는 방식이었겠지만 그는 사찰신도회에 전수하는 방식으로 해왔다.

수륙재로 문화재가 된 삼화사에서도 1년을 살다시피 하면서 여법하게 전통을 살려 꽃을 만들고 꽂는 방법을 전수했고 현재 문화재 등록을 목표로 하는 부여수륙재와 함안수륙재의 보존회에도 자신이 배운 대로의 방법을 신도들에게 교육했다.

전통지화의 대중화를 고민하다 풍선막대를 생각했다. 그래서 풍선막대에 꽃 만드는 작업을 해서 성공한 후 저작권 등록을 했다. 오동통한 연꽃을 붙여 연등회 내내 흔들고 다니는 외국인들의 행복한 표정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어머니 가시는 길에 놓아드린 꽃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일이 많지만 그 중 지난 해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종단협의회에서 주최한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한 기원법회’를 떠올렸다. 정상회담을 열흘 앞둔 4월 17일, 각계 불교인사들이 모여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를 모시고 기원법회를 했는데 이 자리에서 한반도 모형판에 연꽃을 부착해 한반도의 평화를 비는 의식을 하였다. 이 모형판과 연꽃을 이송자 지화장이 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휴전선 중앙에, 김정숙 여사는 휴전선 오른쪽, 당시 총무원장 설정 스님은 왼쪽에 연꽃을 부착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모으는 퍼포먼스였는데 아주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보며 이 지화장이 남모를 뿌듯함을 느낀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는 세월호 사건 당시 군산사암연합회에서 큰 재를 지낼 때 목단을 만들었던 일, 군법당에 꽃을 장식해놓으면 위압감이 낮아지고 차분함이 더해진다고 장병들이 좋아하던 일 등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꽃을 만들기 시작해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밤낮없이 염불을 틀어놓고 꽃을 접어 일주일 남기고 완성해 49재를 마쳤던 일이다. 어머니에게 받은 것만 있지 드린 것은 없다는 생각으로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지극히 염원하며 꽃을 접었다.

 

상단에는 연꽃, 중단에는 작약과 모란, 불두화를 올린 어머니의 49재는 아름답고 장엄했다. 그는 ‘그 동안 제가 꽃을 접어 부처님께 올린 공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 엄마 잘 좀 봐주이소’라고 빌었다. 참석자 모두 고인의 딸이 접은 연꽃을 들고 법성게를 하며 돌았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 목소리로 염원을 하니 ‘어머니는 분명 극락왕생 하실 것’이라며 참석자 모두 너무 좋다고, 부럽다고 했다.

불교를 접하게 해준 어머니, 그 불교를 공양하는 방법으로 꽃을 접기 시작해 35년 넘게 이어온 작업, 그 꽃으로 어머니 가신 길을 배웅한 딸.

꽃을 만들며 간혹 고생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어머니의 49재를 끝나고 이송자 지화장은 생각했다. “이거면 됐다”

그 뒤 전시회까지 마치고 그는 인생에서 점 하나를 찍은 기분이라고 했다. 이제 점 이후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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