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물 제406호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덕주 공주가 조성했다 전한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삶의 일부입니다. 사람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희노애락의 대지를 건너야 합니다. 그 여정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삶에서 가장 큰 슬픔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같은 개인 차원의 슬픔도 있겠지만 재난이나 전쟁, 망국(亡國)과 같은 혼란 속에서 마주하는 국가 차원의 슬픔도 있을 것입니다.

슬픈 일과 마주했을 때 반응이 제각각이듯 나라를 잃었을 때 처신 또한 제각각입니다. 변화에 순응하거나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나라를 되찾으려고 투쟁하거나 훗날을 도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라 마지막 태자인 마의 태자(麻衣 太子)는 은둔하는 삶을 택했습니다.

마의 태자는 “천 년을 이어온 나라를 고려에 넘길 수는 없다.”며 반대했지만, “무고한 백성을 더 희생 시킬 수 없다.”는 부왕의 뜻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나라 잃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한 마의 태자는 세상을 등지고 개골산(금강산)으로 향합니다.

마의 태자의 발길이 어느 곳을 거쳐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월악산 자락에 마의 태자와 누나 덕주 공주에 얽힌 설화가 여럿 전하는 것을 보면 충주·제천지역을 거쳐 갔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 하늘재 충주 구간. 하늘재(계립령)는 신라 아달라왕 3년(156)에 개척된, 문헌 기록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우리나라 첫 고갯길 ‘하늘재’

이번 순례의 여정은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시작합니다. 이곳은 문헌 기록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인 하늘재의 문경 쪽 들머리입니다.

하늘재의 옛 이름은 계립령(鷄立嶺)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 아달라왕은 즉위 3년(156)에 한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길을 확보하려고 이 길을 엽니다. 계립령은 이태 뒤 개척된 죽령(竹嶺), 태종 14년(1414)에 열린 문경새재, 그리고 영동의 추풍령과 함께 영남에서 백두대간을 넘는 대표적인 옛길입니다. 이곳을 넘어서면 남한강을 따라 한강 하류까지 쉽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주흘산과 조령산이 빚어낸 험준한 지형 덕에 국방요새였던 문경새재처럼 계립령 또한 예로부터 전략 요충지였습니다. 고구려 온달 장군이 “계립현(鷄立峴)과 죽령 서쪽을 되찾지 못하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삼국사기》 <열전> ‘온달’조)고 공언했을 정도로 중요했던 곳입니다.

문경새재가 열리기 전까지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넘나든 계립령을 따라 마의 태자와 덕주 공주도 금강산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관음리를 관통한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하늘재 정상에 다다르면 호젓한 흙길을 만납니다. 붉노란 단풍이 내려앉은 계립령 옛길을 따라 2km쯤 완만한 고갯길을 내려가다 보면 김연아 선수의 연기 모습과 닮았다는 소나무와 연리목, 도기를 굽던 도요지가 순례객을 반깁니다.

▲ 사적 제317호 충주 미륵대원지. 신라 마지막 태자인 마의 태자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마의 태자가 창건한 석굴사원 ‘미륵대원’

하늘재 고갯길의 끝은 ‘미륵대원지’입니다. 이 절터는 ‘미륵리 사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발굴조사에서 ‘명창 3년 대원사 주지 승원명(明昌 三年 大院寺 住持 僧元明)’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돼 절 이름을 ‘미륵대원(彌勒大院)’으로 추정합니다.

누가 언제 미륵대원을 지었는지, 또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발굴조사 결과를 근거로 통일신라 말, 고려 초에 개창된 절로 추정할 뿐입니다.

다만 이곳에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마의 태자가 이 절을 지었다고 합니다. 금강산으로 길을 떠난 마의 태자와 덕주 공주는 관음보살의 현몽을 받고 보살이 일러준 대로 한터〔大垈〕에 이르러 절을 짓습니다. 그리고 석불을 모시고,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영봉에 마애불을 조성했지요. 마의 태자는 이곳에서 8년을 머물다 경주를 떠나올 때의 다짐대로 병사를 양성할 장소를 찾아 오대산으로 떠나고, 덕주 공주는 동생의 안녕을 기원하며 이곳에서 정진하다 세상을 떠납니다.

다른 전설에서는 동생을 따라나선 덕주 공주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덕주사를 짓고 남향의 마애불을 조성하자, 마의 태자도 공주가 있는 북쪽을 향해 석굴을 지어 불상을 모셨다고 합니다. 두 전설의 줄거리는 사뭇 다르지만 서로 의지하며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랬을 남매의 애틋한 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절터에는 석조여래입상, 오층석탑, 석등, 당간지주, 귀부 등 여러 성보가 남아있습니다. 마의 태자가 조성했다는 석조여래입상을 모신 법당은 석굴입니다. 석굴 전체를 돌로 둥글게 쌓은 석굴암과는 달리 벽을 쌓은 뒤 위에 목조 지붕을 얹은 형태입니다.

절터 왼쪽 편, 절터에서 하늘재로 올라가는 길 오른편에는 출장 관원이나 여행객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원(院) 터가 있습니다. 원은 중요한 도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된 국영 숙박시설입니다. 미륵대원과 파주 혜음원과 같이 사찰은 때때로 원의 기능을 겸하기도 했습니다.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계립령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미륵대원이 원의 기능을 겸한 것은 쉽게 수긍할 수 있습니다.

계립령 주위에는 미륵대원 외에도 여러 사찰이 있었습니다. 경북 문화재자료 제136호 ‘문경 관음리 석불입상’이 자리한 과수원 일대는 관음사의 옛터로 전해져 옵니다. 관음사지는 미륵대원과 같은 원으로 추정합니다. 미륵대원이 계립령의 충주쪽 원이라면 관음원은 문경쪽 원인 셈이지요. 관음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관음리 석조반가사유상과 갈평리 석조약사여래좌상 등 여러 성보와 절터는 계립령을 넘나드는 길손을 보호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 주는 휴식처였을 것입니다.

▲ 보물 제94호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구층석탑. 고려 현종 13년(1022) 국왕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 거란을 물리치기 위해 조성한 석탑이다.

거란 침입 물리치려 세운 ‘사자빈신사지 구층석탑’

미륵대원지를 나서 미륵송계로를 따라 월악산 송계계곡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월악산이 빚어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4km쯤 걷다보면 ‘사자빈신사지(獅子頻迅寺址) 구층석탑’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만납니다. 이정표를 따라 200m 남짓 들어가면 절터입니다.

사자빈신사는 고려 전기에 창건된 사찰입니다. 4층까지만 남아있는 구층석탑과 옥개석 한 점이 지키고 있는 절터는 썰렁하다 못해 휑하기까지 합니다. 사자 네 마리가 석탑을 이고 있는 구층석탑의 모습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을 연상케 합니다. 구층석탑 기단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이 탑은 현종 13년(1022) 국왕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 거란을 물리치기 위해 조성됐습니다.

《화엄경》 <입법계품>에는 “세존이 모든 보살을 여래의 사자빈신삼매에 들어가게 하려고 미간백호로부터 큰 광명을 놓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사지빈신삼매에 들자 모든 세간이 깨끗하게 장엄되고, 서다림(逝多林) 위 하늘과 시방세계의 허공이 보배구름으로 장엄되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부처님의 힘을 빌어 외침을 물리치려 했습니다. 거란이 침입하자 초조대장경을 조성한 것도, 몽고가 침입하자 재조대장경을 조성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고려는 끊임없는 외침에 시달렸습니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으로 왕경이 위험에 빠지자 계립령을 넘어 몽진하기도 했습니다.

네 마리 사자가 외호하는 비로자나불을 탑에 모신 것은 어쩌면 백수의 왕인 사자가 거칠 것 없이 포효하듯, 당당하고 걸림 없는 진실한 가르침으로 예토(穢土)를 부처님의 정토(淨土)로 변화시키려는 염원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나라를 잃고 절치부심하며 통한의 삶을 보냈던 마의 태자와 덕주 공주,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정성 들여 석탑을 조성하며 국난 극복을 염원했을 고려인의 모습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 태조가 덕주 공주를 감금했다는 전설이 전하는 제천 덕주산성 동문.

덕주 공주가 피신한 ‘덕주산성’

사자빈신사지를 나와 다시 길을 떠납니다. 700m쯤 걸으니 떡하니 버티고 선 덕주산성 남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덕주산성은 남북국 시기에 축성된 성곽입니다. 이 산성에도 덕주 공주에 얽힌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덕주 공주가 피난한 성이라고도 하고, 태조 왕건이 공주를 감금한 곳이라고도 합니다.

이 산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군사시설이었습니다. 고려 고종 43년(1256) 몽고군이 충주를 거쳐 이곳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관리와 주민이 이 산성으로 피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우레가 울고, 강풍이 불며, 비와 우박이 쏟아져 몽골군이 ‘신이 돕는 땅’이라며 달아났다 합니다. 또 조선 말기에는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과 권력 암투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로 삼으려고 성문을 축조했다고도 합니다.

덕주산성 남문에서 덕주사 입구까지는 400m 남짓한 거리입니다. 다시 1km쯤 산길을 거슬러 오르면 덕주산성 동문을 지나면 덕주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덕주 공주가 조성한 ‘상덕주사 마애불’

덕주사는 진평왕 9년(587)에 창건된 절이라고 합니다. 전설에는 덕주 공주가 지은 절이라고도 하지요. 《신증동국여지승람》충주목 불우(佛宇) 조에는 “덕주 부인이 절을 세워 덕주사라 이름했다.”고도 합니다.

▲ 하덕주사 전경.

덕주사는 상덕주사와 하덕주사로 나뉩니다. 하덕주사에서 1.7km쯤 올라간 월악산 중턱에 있는 상덕주사는 한국전쟁 때인 1951년 작전상 이유로 소각됐다 합니다.

고려 예종과 인종, 의종 세 임금의 존경을 받은 자은종의 승통 관오(觀奧, 1096~1156) 스님의 묘지명(證智首座觀奧墓誌銘)에 따르면 상덕주사는 국왕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성도량을 설치했던 도량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하덕주사를 승통이 주석하는 승통소(僧統所)로 삼아 삼남(三南)의 승군이 번갈아 지키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덕주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전략적으로 중요한 사찰로 인식됐습니다.

덕주 공주가 조성했다는 덕주사 마애불은 상덕주사에 있습니다. 고려시대 마애불의 특징인 선각에 가까운 조각기법으로 조성한 거대 마애불입니다. 덕주 공주가 조성했다고 하지만 지방 호족세력이 조성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보다 합리적입니다. 거대한 마애불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재력이 있어야 하고, 나라를 잃고 떠도는 덕주 공주가 조성하기는 어렵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월악산을 중심으로 마의 태자와 덕주 공주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마냥 전설로 치부하기도 어렵지 싶습니다. 어쩌면 이곳은 신라의 유민들이 나라 잃은 슬픔을 딛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미륵대원에 미륵불을 조성하고, 덕주사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상덕주사에 올라 마애여래입상을 등지고 장대하게 펼쳐진 월악산 줄기를 바라봅니다. 마주한 덕주봉 너머에는 마의 태자가 머물렀다는 미륵대원의 옛터가 있습니다. 하늘재를 넘어 미륵대원지와 사자빈신사지를 거쳐 상덕주사까지 걸어온 길을 되새겨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 천 년 사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마의 태자와 동생의 꿈이 성취되기를 기원하며 평생 이곳에서 정진한 덕주 공주의 자취를 들춰낸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아파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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