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링링이 서해안을 따라 올라온다는 소식을 들은 날,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창문 틈 사이에 종이를 끼워 유격을 없앴고 옥상과 베란다에 있는 화분은 실내로 들여 놓았다. 그리고 집 주변을 살피며 서당을 거쳐 산으로 갔다. 박새, 곤줄박이, 청딱따구리, 솔부엉이, 새호리기, 까치 등 새들의 둥지와 옹달샘, 빗물저금통 그리고 새 먹이통을 점검하였다. 바람 한 점 없는 성미산은 하늘 풍경이 바뀔 거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하고 오히려 적막감이 돌 뿐 이었다. 간간히 먹구름 사이로 햇살도 비추었다. 기상예보에는 바람이 강하게 분다고 해서 긴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오후 2시경이 되자 비바람이 성산동 일대를 강타했다. 늦은 저녁 까지 그 위세가 대단하였는데 까치의 둥지는 돌풍에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졌고 작은 새들은 나무 틈 사이 구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수령이 20년쯤 되는 아카시아는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통째로 뽑혀 나갔고 익기 시작한 갈참나무와 상수리나무, 졸참나무의 가지는 분질러지고 열매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금세라도 모든 것이 멈출 것만 같은 아비규환의 상황이었다. 다음날 일찍 산에 가보았다.

곳곳의 산책로는 쓰러진 나무로 통제 되었고 폭격을 맞은 듯 땅은 파이고 나뭇잎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어수선하였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인가?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하였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는 뜻이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비추고 얼었던 물이 녹아 산천초목이 자라나도록 하더니 왜 어느 날 갑자기 모진 시련과 고통을 주고 생명을 죽이기까지 하는 것인가? 되돌려 그 의미를 새겨본다. 자연의 이치는 사사로운 정(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리고 하늘과 땅은 그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지도 않는다. 오직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주체가 돼 스스로를 강건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소멸되는 것은 끝난 것이 아닌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소쩍새 구출작전

저녁 강의가 끝나고 늦은 저녁식사를 할 무렵 인근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새 한 마리가 어린이집 담벼락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있다는 것이다. 얼핏 보아도 참새나 비둘기 같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 장소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새가 있는 장소에 도착하여 우선 스마트폰 조명으로 먼발치에서 윤곽을 살폈다. 날개는 쳐져 있고 탈진한 것처럼 움직임도 없었다.

▲ 구조한 소쩍새.

어두운 갈색과 흰색의 깃털은 보호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도 잘 모르겠던 차에 머리 부분 위쪽으로 귀처럼 쫑긋하게 솟아오른 부위가 있었다. 직감적으로 올빼미과로 판단하고 좀더 가까이 다가갔다. 사진을 찍고 전문가에게 확인하였더니 천연기념물 제324-6호로 지정된 소쩍새였다. 상태가 심각해 보여 구조관련 기관에 연락을 취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해 조류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직 접구조에 나서기로 했다. 혹시라도 실수를 해서 불상사가 벌어질 수 도 있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포획망이 없다보니 고민하다가 함께 구조에 참여한 분이 입고 온 얇은 겉옷으로 그물망을 대신하였다. 주변 조명은 모두 끄고 구조에 참여하는 인원이 어둠속에 수신호를 해가며 거리를 좁혀 나갔다. 소쩍새는 인기척에 놀랐는지 건물 한쪽 구석으로 들어가 깊이 숨었다.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후 미리 준비해둔 고양이용 케이지 문을 열었다.

단 한 번의 기회로 구조해야한다는 생각에 집중하였고 세 명의 조력을 받아 무사히 구조에 성공하였다. 구조 직후 소쩍새의 상태를 확인하니 탈진으로 매우 지쳐 보였다. 우선 안전한 장소로 이동 후 전해질 보충음료를 작은 접시에 담아 주었다. 그리고 기나긴 밤이 지나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 때 쯤 상태를 보니 접시에 앉아 있었다. 열이 나서 물에 들어가고 싶었나 했는데 가만 보니 케이지 바닥이 플라스틱 재질이라서 소쩍새가 앉아 있기에 불편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문을 조심스레 열고 푹신한 패드를 깔아주었다. 그리고 먼 발치에서 지켜보니 잠시 후 그 위에 올라갔고 편안한지 잠이 들었다.

오전 10시에 ‘서울시야생동물센터’의 관계자가 왔다. 문진 결과 소쩍새의 꼬리 깃털 12개 중에 11개가 뽑혔고 탈진이 왔다는 것이다. 장거리 비행을 하려면 꼬리 깃털이 필수이라고 한다. 그런데 꼬리 깃털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야생에서 고양이 등의 포유류에 의해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성미산에는 고양이의 개체수가 제법 있는데 어미로부터 독립한지 얼마 안 된 소쩍새가 경험 부족으로 먹이 활동을 하다가 공격을 받은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었다. 다른 곳은 특별한 이상이 없어 보이지만 정밀 검사를 해야 하고 그 이후 꼬리깃털은 이식 수술을 해 주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재활 훈련을 통해 남쪽으로 날아가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단 전제조건이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구조한 조류 중에서 건강상태가 나쁘거나 날 수 없는 개체는 안락사를 시킨다는 것이다. 부디 건강을 회복하여 내년에 다시 이곳 성미산에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와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안전하게 인수인계를 하였다.

그 후 보름 가까이이 시간이 흘렀다. 치료가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하여 연락을 취했는데 구조한지 2일 만에 폐사 하였다고 한다. 애잔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가을밤 공기만큼이나 가슴 한켠이 차가웠다. 구조당시 체중도 93g 으로 보통 소쩍새의 70g 보다 많이 나가서 치료에 기대를 했는데, X-레이 검사 결과 왼쪽 대퇴골이 빠져 있었고 그것이 새들에겐 치명상이라고 한다. 결국 자연에서는 강한 개체만이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자연에서는 ‘어미’가 스승이다

▲ 먹이로 유인하는 비행훈련.

성미산에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여름철새들이 떠날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그 과정은 분주하고 세밀하며 집중적이다.

올해 성미산엔 새호리기 부부가 한 마리의 새끼를 키워냈다. 어미 새들은 몇 달 동안 어린 새끼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나날이 성장에 속도를 내니 이들 부부의 먹이사냥도 더욱 빈번해졌다. 처음 한 달 동안은 먹이를 사냥하여 둥지로 돌아와 새끼를 배불리 먹였는데 어린 새끼가 제법 날갯짓도 하고 우렁찬 소리도 내기 시작하면서 이소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어미새호리기는 먹이를 사냥하고 나면 어린새끼를 둥지 밖으로 불러냈다. 새끼가 처음엔 나뭇가지 위를 조금씩 이동하였는데 어느새 날갯짓을 반복하며 가지와 가지 사이를 날아서 이동했다. 서툴고 어색하여 나뭇가지 위에 착지하려고 하면 발을 헛딛거나 중심을 잡지 못해 술에 취한 사람마냥 비틀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애써 어미가 사냥해서 갖다 준 매미도 놓치기 일쑤였다.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절로 일어났다.

어미 새의 교육은 더욱 정밀하게 진행되었다. 잠자리를 사냥하여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끼 근처를 맴돌며 하늘로 날아오르도록 유인했다. 어린새끼도 배가 고팠는지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발돋움을 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때부터 놀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어미 새는 기류를 타고 더욱 높이 상승한다. 새끼도 따라 올라간다. 이 과정에서 고공비행에 필요한 다양한 기술 전수가 함께 이루어진다. 어미는 잡힐 듯 말 듯, 먹이를 줄 듯 말 듯 새끼를 애타게 만든다. 그럴수록 새끼는 더욱 힘을 낸다. 결국 어미가 만족했는지 공중에서 먹이를 건네주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완성을 보는 듯 했다.

▲ 착지 연습하는 새끼.

《논어(論語)》 〈학이장(學而章)〉에 ‘배울 학(學)’에 관한 구절이 있다.

“학이시습(學而時習)이면 불역열호(不亦悅乎)아”[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학(學)’에 대한 주석(註釋)을 살펴보면 ‘새가 날기 위해 날개 짓을 반복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어미 새호리기는 철부지 새끼에게 그동안 자신이 배우고 익히면서 터득한 모든 경험적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공중에서 정지 비행, 먹이 낚아채기, 역회전 비행, 깃털 고르기, 먹이 손질하기, 천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장술, 기류 타는 법 등 거친 야생에서 강한 개체만이 살아남는 현실에 맞도록 철저하게 훈련을 시켰다.

사람도 부모에게 양육을 받는다. 자연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들은 대체로 스승에게 훈육을 받는 것이고 자연에서는 어미가 곧 스승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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