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만드는 전통기술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된 것은 2016년이다. 차를 만드는 기술, 바로 제다(製茶)를 국가가 보호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인정한 셈이니 그 중요성을 널리 알린 계기였으며, 전통 차의 문화적 특성이 보존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제다의 의미는 무엇이며 제다는 무엇 때문에 차 문화의 근간이라 하는 것일까. 그 연유를 살펴보자.

제다는 차를 만드는 공정과정을 통칭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차는 사람에게 유익한 음료로 변화된다. 그러므로 제다의 가치와 목적은 좋은 차를 얻기 위함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아무리 여린 차 싹이라도 불이나 증기에 찌거나 덖어내지 않고 먹으면 배가 아프다든지, 속이 쓰린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차의 근원적인 이익을 알았던 사람들은 불이나 증기, 혹은 햇빛을 이용하여 차의 독성을 제거해 사람에게 이로운 차를 얻었다.

▲ 동춘차의 찻잎. 박동춘Ⓒ

중국의 차가 승려 통해 한국으로

원래 차의 원산지는 중국이다. 우리나라에 차가 처음 소개된 것은 7세기경이며 수행 승려들이 중국에서 만든 차를 가져왔기 때문에, 수입 초기의 차는 부처님께 공양하는 귀한 물품으로 인식되었다. 9세기경에 이르러 제다법이 처음 유입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무렵 제다 방법은 육우에 의해 개량된 제다 기술이 승려들을 통해 신라에 소개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육우(陸羽, 733~804)는 성당(盛唐) 때 인물로, 당대의 제다법을 혁신‧집대성하여 다성(茶聖)으로 칭송된다. 그는 묘희사 승려 교연(皎然)과 교유하며 선종의 제다법에 영향을 받아 개량된 방법으로 차를 만들었다. 이를 토대로 제다법은 점차 발전을 거듭하였다. 송대에는 차를 즐기는 이들의 차에 대한 인식과 기호가 반영된 제다법이 출현하여 보다 세련되고 향미가 풍부한 차를 만들었으니 이는 송대와 고려에서 유행했던 단차(團茶)의 제다법이 그것이다.

한국에 제다법을 소개한 것은 도당(渡唐) 구법승(求法僧)들이다. 특히 선종에서 차를 마시며 수행체계를 익혔던 신라 승려들은 체화된 수행의 전통을 신라에 소개하였다. 그러므로 나말려초(羅末麗初)의 차 문화는 사찰을 중심으로 왕실, 귀족과 관료 문인으로 확산되었다. 수행 승려들이 제다와 차 끓이는 법[湯法]의 실질적인 이론을 갖춘 차의 이론가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선 수행법의 최대 장애인 잠을 적게 하는 데 차가 유용하다는 인식은 불교와 차가 융합된 연유이다. 차가 독특한 불교문화로 구축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고려에서도 초기 제다를 주도했던 것은 승려들이라 추정된다. 특히 고려 초 왕실이나 사찰에서 필요한 차는 차 산지 부근 사찰의 ‘다촌(茶村)’에서 생산했으며 제다를 주도한 것은 사원의 승려였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계층이 관료 문인으로 확산하는 등 차의 수요가 많아지자, 왕실에서는 특화된 기술력이 집약된 다소(茶所, 조정에 차를 만들어 바치는 지방)를 만들어 공납(貢納) 차를 만들었다. 이후 차산지에 차세(茶稅)를 부과하면서 왕실에 올리는 토공(土貢) 차는 지방관리가 관리하였다.

12세기에 유행했던 백차(白茶)는 고액(엽록소)을 짜내는 공정 과정을 거치는데 이는 송 휘종이 좋아했던 차이다. 그 제다법은 이렇게 진행한다. △좋은 차싹을 고른다 △차싹을 딴다 △증기로 찻잎을 찐다 △ 엽록소를 짜낸다 △절구에 찧는다 △다시 연[멧돌]에 넣어 곱게 갈아 낸다 △간 차 가루를 형틀에 넣고 둥글거나 모나거나 꽃 모양으로 찍어 낸다 △약한 불에 말려 보관한다.

고려 시대에서도 12세기 이후 찻잎을 쪄서 엽록소를 짜내 차를 만들어 흰 거품이 일어나는 백차(白茶: 흰 거품이 나는 차)를 선호함에 따라 백차를 만들었는데 이는 송나라와 동시대적인 차 문화를 향유했음을 의미한다. 고려의 승려와 귀족, 문인들이 즐겼던 백차는 많은 노동력이 요구되는 제다법이다.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었기에 조선 초기 왕실에서는 차를 멀리하도록 조치했다.

이런 고급 차를 만드는 공정에서 필요한 노동력의 과도함을 이유로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에는 국법으로 단차 생산을 금지했다. 그리고 잎차 제다법을 권장해 유행했다. 잎차의 제다 공정 과정은 △찻잎을 따서 △선별한 후 △뜨거운 솥에 넣고 덖어낸다.(이것을 살청, 혹은 쇄청, 초청이라 한다.) △찻잎 비비기 △다시 말리기 △포장보관을 거치면 차를 완성한 것이다. 실제 중국에서는 이런 잎차의 제다법이 발전하여 청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좋은 차 얻으려는 노력, 제다의 변천사

제다의 공정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찻잎이다. 차나무가 자라는 환경인 바람과 토양과 물과 햇빛은 찻잎을 기르는 천연 조건이다. 그러므로 차가 어떤 자연환경에서 자란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명차의 첫째 조건이다. 그다음은 ‘제다하는 사람(製茶人)’이다. 제다할 때 제다인은 불[火]과 차[茶]의 간극을 잘 알아차리는 경험과 순발력, 판단력이 요구된다. 찻잎을 어떻게 하면 잘 익혀내는가 하는 문제는 차의 품질로 결정된다. 결국 어떤 인식과 감성,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 차를 만들었는가하는 점이다. 차는 환경조건, 사람의 기호에 따라 제다법의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라마다 특성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제다의 주체는 차를 만드는 사람이다. 좋은 차를 얻으려는 이들의 노력은 어느 시대나 동일하다. 이를 위해 획기적인 제다의 방법이 연구되었다. 바로 이것이 제다의 변천사이다. 어찌 보면 차 문화는 제다방법의 변천에 따라 연기적으로 차 문화의 토층을 형성해 나갔던 셈이다. 따라서 제다는 차 문화를 형성하는 토대라 하겠다.

아울러 제다법의 변천은 탕법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찻그릇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시대와 나라마다 조금씩 찻그릇이 변화한 것은 제다와 탕법의 변화에 따른 것이니 결과적으로 제다의 변천은 차 문화에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조선의 건국은 제다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건국 공신이나 지배층은 차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개혁하고자 했다. 이외에도 불교의 정치, 사회적 영향력의 쇠락은 차 문화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런 시대 상황에서도 조선 초기까지의 제다법은 고려 말의 습속을 따랐다. 가루차를 즐기는 문인들의 기호는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차 마시는 층을 새롭게 확보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좋은 차를 만들 수 있는 여력도 미미해졌으나 그런대로 차 문화를 주도한 것은 역시 승려들이었다.

차 문화는 임진왜란과 호란을 겪은 이후 더욱 쇠락하여 차를 아는 이가 드물었다. 차가 나던 산지에서는 찻잎을 말려두거나 거친 떡차를 만들어 감기나 이질을 치료하는 약으로 전락하였다.

▲ 찻잎 따기, 유념, 재벌 덖음, 건조 과정. 박동춘Ⓒ

초의 선사 ‘동다송’으로 제다법 확립

제다의 중요성을 다시 눈뜬 시기는 조선후기이다. 대흥사 초의선사(1786~1866)는 사찰에 전해진 선차를 복원, 좋은 차를 만들 수 있는 제다법과 이론을 확립, 초의차를 완성함으로써 차 문화를 중흥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가 차에 깊이 천착한 시기는 1809년 이후이며 제다에 더욱 심혈을 기울인 시기는 1830년 이후이다. 그의 제다법에 대한 이론은 《동다송》에서 드러난다.

《동다송》에 드러난 제다법은 잎차를 만드는 법이다. 그가 말한 잎차의 제다방법을 살펴보면 △찻잎을 딴다 △좋은 찻잎을 고른다 △찻잎을 무쇠 솥에서 덖는다 △덖어낸 찻잎을 비벼 턴다 △낮은 온도에서 다시 말린다 △온돌방에서 하룻밤을 재워 둔다 등이다. 이는 명대에 유행했던 잎차의 제다법이다. 초의의 제다법에서 주목할 점은 다 만든 차를 하루 동안 온돌방에서 재워 두며, 거품이 나도록 유념(찻잎 비비기)한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과 달리 맑고 시원한 맛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기호에 적합한 차를 만들기 위한 제다법이다. 조선 후기 초의와 교유했던 김정희, 홍현주, 이만용, 신위, 박영보 등과 다산의 자제들이 칭송했던 초의차의 제다법은 초의의 제자인 범해, 원응, 응송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차를 즐긴 연유는 무엇일까. 첫째, 병을 치료하거나 오래 살기 위한 것이며 둘째,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뿐 아니라 정치적인 수난을 겪었던 문인들은 자신의 근심을 잊게 하는 위안처로 차를 즐겼다. 물론 뜻이 맞는 벗과 돈독한 정을 나눌 때나 문예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차를 마셨던 것이다. 따라서 차를 마셔야 하는 목적은 현대에도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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