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초여름에 영화로 제작된 극영화 ‘나랏말싸미’는 개봉 한 달도 안 돼 전국 영화관에서 내려야 했다. ‘훈민정음’ 하면 오로지 세종대왕의 독창적인 문자 창제로 역사에 길이 빛날 일인데 느닷없이 일개 무명 승려가 창제의 주역이라 하니 관객들이 발끈한 것이다. 그리고 극중 천민 신분인 승려가 대왕을 가르치고 훈계한 것이 몹시 거슬리고 신성모독이라는 듯 화가 난 대중들이 모두 들고일어난 탓이다.

보통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한다. 사실과 픽션을 가미해 만드는 사극에서는 더욱 그러함에도 한국인은 기나긴 세월 영웅에 목말랐고, 조선의 대표적인 역사 인물 세종과 이순신을 숭배한 나머지 어떤 다른 이론을 제기하면 안 된다는 대중들의 함의가 있어다.

그러함에도 십여 년의 오랜 기간 조감독 시절부터 ‘세종과 신미’에 대해 숨은 자료를 찾고 고민한 감독은 상영 후 야기될 여러 부작용과 거부감을 예상 못 했으며 차단도 못 하였을 것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명제는 틀렸다. 민감한 주제와 소재는 피해야 하며 적당히 오락성을 섞어 관객을 울리고 웃기면 흥행이 보장된다는 것을 감독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작품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만든 것이 화근이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일반적인 흥행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만들어 재미보다 유명 감독이나 평론가도 잘 만든 영화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은 작품성 위주 영화다.

수많은 한글학자와 국어국문학 학자들은 올해도 다름없이 훈민정음 창제는 오직 세종 혼자만의 작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에 의거해서다. 그렇다고 왕실과 기득권의 기록만으로 나라와 사회를 전부 담을 수 있을까?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기록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사실이 얼마든지 있다. 하물며 600년 전 경천동지할 대사건인 문자 창제의 비밀이 단 한 줄 ‘세종의 창제’로 규정된다. 이것으로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치찬란한 발상이고 학자와 후손들의 직무 태만이다. 불과 몇 년, 몇십 년 전의 대통령과 정부 기밀이 공개되지 않는 기록물이 수두룩하다. 백 년여 전 마지막 왕실인 고종과 명성황후에 관한 사건도, 그 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도 아직도 규명 연구 중에 있는 현실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세종의 ‘유일창제론’ 외에 이론을 제기하는 것은 불충이고 역사 왜곡이며 신성모독이라고 폄하해서 입을 막아버린다는 사실이다.

오래전부터 한글을 연구해온 저명한 언어학자 정광 교수는 여러 권의 저서와 논문에서 “우리의 한글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문자가 아니며, 여러 나라의 문자와 음성학을 연구하고 참고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당연히 그런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세종은 형님인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신미 대사를 만나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세종이 신미를 만나고 무엇을 깨달았을까? 당시 명나라의 속국인 조선이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속국이 아닌 완전 독립국가를 의미하는 바 국가기밀에 속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일설에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조선왕조실록에 세종이 한글 창제 후 왕비 심 씨가 돌아가시고 49재를 지내면서 비로소 신미를 처음 만났으니 훈민정음과 신미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는 기록만으로 성립될 수 없고 당시의 역사 배경과 전후좌우 사정의 기록되지 못한 진실을 찾아야 제대로 된 역사가 될 수 있다. 정광 교수를 비롯해 한글을 연구한 학자들은 신미 대사를 조선왕조실록에 넣지 못한 것은 당시의 유교 지배 정권의 거부감과 혹시도 생길지 모르는 중국과의 마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미 대사가 없었으면 한글 창제도 한글 보급과 계승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신라 때부터 기호와 문자 해석, 목판인쇄와 고려의 금속활자, 대장경목판 등을 승려들이 주도했고 언어 문자학자들도 많았다. 앞으로 더 많은 한글 국어 역사 국문학 언어학자들이 다양하게 배출돼 한글의 창제와 구성 배경 등을 규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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