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변하면서 가족이라는 개념도 변했다. 예전에는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로 한정해 가족이라 했지만 현재의 가족은 ‘혈연, 인연, 입양으로 연결된 일정 범위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라며 그 범위가 넓어졌다.

하지만 개인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있는 것처럼, 사회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구성원들이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예술은 보편타당한 것보다는 주류를 형성하지 못하는 의견, 세력, 계층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의 구성에서 ‘사랑’이 우선인지, 구성원의 ‘자격’이 우선인지 질문을 던진 영화 두 편을 소개한다.

남남커플과 다운증후군 소년은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초콜렛 도넛(2012, 미국, 트래비스 파인 감독)

 

다운증후군 소년 마르코는 마약중독인 젊은 엄마와 살고 있다. 그 옆집에 사는 루디는 게이이며 밤무대 쇼댄서로 근근이 살아간다. 엄마에게 쫓겨나 방치된 채 복도에 서있는 마르코를 루디가 보살피면서 둘은 인연을 맺는다. 여기에 밤무대에 출연한 루디에게 반해 사랑하게 되는 검사 폴이 등장한다. 이 세 명이 영화를 끌어간다.

영화의 배경은 1970년대로, 미국에서도 동성애를 색안경을 쓰고 보던 때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 또한 지금 같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조차 돌보지 않는 마르코를 루디는 정말 사랑스러워한다. 마르코의 엄마가 말없이 사라지자 셋은 가족처럼 살았다. 셋이 놀러 다니는 장면이 홈비디오를 통해 나올 때, 모두 너무나 행복한 모습이다.

마르코의 엄마가 마약투약 혐의로 구속되자, 마르코는 보호시설로 보내진다. 이제는 만날 수도 없어서 루디와 존은 법적으로 입양을 하려고 마음먹는다. 그들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흑인인 이유도 사회에서 주류가 아닌 인물을 감독이 선택한 것이리라.

입양을 하기 위한 법적 절차를 밟는 와중에 폴의 성 정체성이 밝혀지고 결국 그는 검사의 자리에서 파면 당한다. 폴은 어렵게 검사의 자리까지 갔지만, 그 자리는 가장 보수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시설에서 루디와 폴을 기다리는 마르코에게 루디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시설로 전화해 조금만 참으면 데리러 간다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이고, 마르코는 그 말을 듣고 방으로 가서 짐을 싸서 문 앞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루디에게는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시간이다.

 

법정에서 루디와 폴이 마르코에게 좋은 부모가 될 것이라는 증언이 이어진다. 마르코의 선생님이나, 의심의 눈초리로 그들을 보던 아동시설 파견 감시관도 그들이 마르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증언한다. 하지만 검사와 판사는 그들이 단지 게이라는 이유로, 밤무대에서 노래한다는 이유로 입양을 반대한다.

결국 마르코는 시설에서 도망 나와 거리를 헤매다 비참하게 죽고 만다.

“세상 어떤 사람도 마르코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만 빼고! 우린 마르코를 원합니다. 마르코를 사랑해요. 이래도 부족합니까?”

이렇게 절규하며 마르코를 원하는 루디를 두고서.

동물적인 본능으로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다

어느 가족(2018,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좀도둑 오사무와 시간제 아르바이트 하는 노부요 부부는 생계가 어렵지만 며칠 동안 본 내쫓긴 아이, 유리를 결국 데려온다. 노부요는 유리의 몸을 씻기다가 부모가 만든 다리미 화상 상처를 보고 “사랑하니까 때린다는 건 거짓말이야. 사랑하면 때리지 않아!”라고 말한다. 노부요 자신의 상처도 내보이면서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엄마와 딸이 돼간다.

정작 유리의 부모는 신경도 안 쓰지만 매스컴에서는 일제히 유괴사건으로 보도한다.

이들 가족은 할머니 하츠에, 큰딸 아키, 작은아들 쇼타 등 5명이었다가 돌아가지 않겠다는 유리를 받아들여 6명이 되었다.

그런데 극이 전개될수록 가족의 구성이 이상하다. 부부는 정식결혼하지 않았으며 매춘부와 손님으로 만난 관계이고, 할머니는 엄마와 친척인데다 연금을 타기 때문에 유일한 정기적 수입원이다. 아키도 실제 딸이 아니라 할머니의 전남편의 손자, 그러니까 하츠에와는 피가 섞이지 않은 손자다. 오사무와 같이 다니며 마트에서 좀도둑을 돕는 쇼타는 초등학생의 나이지만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쇼타도 주차장에서 부모를 놓치고 배회하던 아이였다는 게 밝혀진다. 거기에 유리까지.

어느 하나 사회에서 ‘정상’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구성원과 관계도.

영화를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미 전작에서 가족의 구성에 대해 계속 질문했다.

가출한 엄마 때문에 네 명의 남매가 사회에서도 버려진 채 굶어 죽어간 실화를 그린 〈아무도 모른다〉, 태어나자마자 뒤바뀐 아이를 나중에 알고 다시 바꾸면서, 낳은 정과 기른 정을 그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오래전 가족을 버린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만난 이복동생과 함께 살게 되는 〈바닷마을 다이어리〉, 이혼한 상태에서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친가에 방문해 벌어지는 단 하루 동안의 이야기 〈태풍이 지나가고〉 등이 그렇다.

꼬이고 배배 틀린 가족의 형태를 가지고 감독은 가족의 의미를 묻고 또 묻는다.

2018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세계의 각종상을 휩쓴 〈어느 가족〉은 사회의 규범, 도덕보다는 끈질긴 생명력, 동물적인 본능을 그렸다. 집 잃은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모여 사는 것과 같다.

 

“아이에게 도둑질시키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나?”라는 형사의 질문에 “그것 말고는 가르칠 게 없었습니다.”라며 고개 숙이는 아버지.

“유괴가 아니라 주워온 거예요. 버린 사람은 따로 있잖아요. 낳으면 다 엄마인가요?”라는 엄마와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죠.”라는 여형사의 대화.

진짜 가족이란 무엇일까.

사회가 만든 가족의 틀만 정상일까. 나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지 않은가.

잘 만든 영화를 보면 고민이 깊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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