住相布施生天福     주상보시생천복
猶如仰箭射虛空   유여앙전사허공
勢力盡箭還墜     세력진전환추
招得來生不如意   초득내생불여의

 

아상에 집착하면 베풀어 천상가도,
오히려 하늘에다 화살을 쏨과 같다.
그 힘이 다할 때에 되돌아 떨어지니,
업대로 받는 것은 뜻대로 할 수 없네.

 

무엇이라도 구하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비록 청상세계에 나는 복을 얻게 되더라도 그 복은 한정된 것이기에 그 복력이 다하면 다시 로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마치 하늘에다 쏜 화살이 그 힘이 다하면 도로 다시 떨어지는 것과 같아서 금생에서는 모양에 머무는[住相] 복을 닦느라 집착함이 없는[無住相] 마음 닦는 바른 공부하지 못하고, 그 다음 생에는 금생에 지은 복 받느라 공부 못하고 그 다음 생에는 복이 다하여 타락해서 박복한 과보 받느라 공부하지 못하게 되니 결국 모양에 집착하여 아상(我相)을 여의지 못하고 하는 일들은 오히려 바라지 않는 과보를 부르게 된다.

주상(住相) - 물질로 이루어진 물건의 모양에 집착하는 것. 즉 명예나 이익 등 무엇인가 얻어질 것을 기대하여 남에게 보시(布施)하는 것이니, 『금강경』에서 “아상 등 4상을 버리고 무주상으로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사량(思量)할 수조차 없다”고 하였다.
보시(布施) - 범어 Dana의 번역. 보(布)는 널리 펴는 것. 시(施)는 남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는 것. 이 보시는 보살도(菩薩道)를 닦는 6도(六度) 즉, 6바라밀의 하나이니, 이것을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나누게 된다.
①재보시(財布施) : 물질적인 것 즉, 재물 등을 베풀어 주는 것. ②법보시(法布施) : 부처님 가르침 즉, 교법을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일러주어 알게 하는 것. ③무외시(無畏施) : 남에게 두려워하는 생각을 없게 하여 안심을 주는 것.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가한 뒤 6년 동안 가장 혹독한 단련과 철저한 수행 끝에 마가타국 가야 땅 보리수나무 밑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였을 때, 깨달음을 얻은 뒤의 첫마디를, 우리가 알기 쉽게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야 참으로 휘한하구나. 이렇게 수행하여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은 나 하나만이 아닌 것이로구나. 이 세상의 그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며, 모두 다 부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다만 모두가 그런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로구나.”(『화엄경』제1권)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중생에게 부처님과 같이 되는 데는 52위의 단계 즉, 10신위(十信位)·10주위(十住位)·10행위(十行位)·10회향위(十回向位)·10지위(十地位)·등각위(等覺位)를 차례로 거쳐서 묘각위(妙覺位)에 이르러서는 부처님과 같은 지위에 이르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단계에서 일관되게 닦아야 하는 수행이 바로 육바라밀임을 아낌없이 상세하게 보여준다.
바라밀은 범어의 Paramita의 한자 음역이며, 뜻은 ‘저 언덕으로 이른다[到彼岸]’고 번역한다.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예부터 항상 중생세계인 육도윤회에서 맴돌고 있으니, 육도윤호에서 벗어나야 미망의 이 중생세계 즉, ‘이 언덕’ 서 깨달음의 부처님 세계 즉, ‘저 언덕’에 이르러 갈 수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육도(六度)라고 한다. 중생을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실어다 주는 훌륭한 배가 바라 육바라밀이라는 것이다.
비유자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손의 다섯 손가락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 등 5바라밀과 같다고 하면, 제 6의 지혜바라밀(智慧波羅密)은 다섯 손가락을 근본적으로 받쳐주면서 그 다섯 손가락이 유기적으로 자유자재로 역할을 하게 하는 손바닥과 같은 존재이니 지혜바라밀은 5바라밀에 동일하게 역할을 하는 존재라 하겠다.
각각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다섯 손가락 가운데서도 엄지손가락이 첫째로 꼽히듯이 육바라밀 가운데 대표적으로 첫째에 언급되는 것이 보시바라밀이다. 『증도가』에서도 육바라밀의 첫 번째로 보시를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영가 스님은 여기서 보시를 남에게 베풀어 나누어 줌으로써 보시공덕을 짓는다고 하는 일반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한발 더 나아가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시를 말하고 있다. 즉, 중생이 사는 미망(迷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나와 남을 대립시키는 잘못된 관념 위에 세워지니, 그러한 상대적인 세계에 서서 나와 남을 구별하여 집착하는 관념이 강한 사람은 보시를 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근본적인 진정한 세계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며[自他不二] 그러한 것이 아주 다 없어진 오직 하나의 세게이므로 나와 남이라는 대립관념이란 것이 아예 없는 세계인데 그런 본래부터 차별 없는 참으로 평등한 세계인데도 불구하고 공연히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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