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공부를 할 때는 무엇이 되었건 만나는 것마다 모조리 물리쳐야 한다. 오로지 화두만 각인시켜 놓고 그 밖의 어떤 것도 화두가 자리 잡은 곳에 끼어들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화두에 혹을 붙이는 미망의 근거가 되므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라는 임제(臨濟)의 말은 간화선의 처방전에 감초와 같은 요소가 된다. 죽이고 또 죽여서 화두에 대한 이런저런 소식이 남김없이 끊어져야 비로소 화두는 자신의 장막을 벗는다. 소식이 두절된 갑갑한 절애고도의 지경에서 희소식이 날아오는 셈이다. 그래서 조사들은 비비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을 모두 허물어뜨린 상태를 조성해 놓고, 당사자 자신의 목소리로 소식을 전해 보라고 요구한다. 향엄지한(香嚴智閑)이 제시한 시험의 기틀을 보자.
향엄이 대중에게 말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서 온몸을 지탱하고, 손으로는 잡을 가지가 없고 다리도 밟을 여지가 없어 버둥대고 있는데, 나무 아래서 어떤 사람이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고 하자. 만일 대답하고자 입을 연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며,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 질문에 틀리게 응답한 결과와 같다. 바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호두(虎頭)상좌가 나와서 ‘나무에 올라가서 생긴 일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아직 나무에 올라가지 않았던 때의 소식을 화상께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향엄이 껄껄하고 크게 웃었다.
한 마디만 뻥긋해도 명줄이 달린 입은 가지를 놓쳐 버리는데,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어쩌니 저쩌니 생각하고 말할 여유가 있겠는가? 당장 목숨을 보장받을 길도 없는 이 지경에서 향엄은 더 나아가 대답을 안 하고 버티기만 해도 틀린 응답이라고 하여 살 길을 모두 틀어막아 놓았다. 이렇게 떠받쳐 세워주지는 않고 밀어 넘어뜨리기만 하는 향엄의 수법을 무디게 만든 자가 바로 호두상좌였다.
그는 나무에 매달린 일은 불문에 붙여 그 가치를 일시에 멀리 팽개치고, 나무에 올라가지 않았을 때의 소식을 요구했다. 나무에 매달리지 않은 보통의 상황인들 그것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화두는 특별히 고안된 사태에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향엄이 호탕하게 웃기는 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떻게도 해 볼 도리가 없는 기색이 역력했다. 향엄이 대중을 진퇴양난에 빠뜨린 것과 같은 방법으로 호두는 향엄의 입을 그 자리에서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호두는 스승이 본래 팔려던 물건에 덤으로 끼워 넣어 자신의 것까지 팔아먹으려 했지만 별 다른 물건은 아니었다.
향엄이 위산(펨山)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앙산(仰山)에게 전한 잘 알려진 게송 한 수가 있다. “지난해의 빈곤은 빈곤도 아니었다. 올해의 빈곤이 진실로 빈곤이로다. 지난해의 빈곤은 송곳 꽂을 땅이라도 있었건만, 올해의 빈곤은 송곳조차 없구나.”
이렇게 땅도 송곳도 없이 헐벗어 아무 것도 남겨 두지 않았던 향엄이 나무에 분명하게 매달아 놓은 그것으로 인하여 대중을 혼동시켰다. 무선재(無禪才)는 향엄의 이 두 측면을 집어내어 진실을 밝혔다. “땅도 없고 그 땅에 꽂을 송곳도 없어야 진실로 가난한 모습이거늘, 도리에 나무에 올라가 억지로 몸을 매다는구나! 그렇지만 알고지내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궁극적으로 마음을 알아주는 벗은 몇이나 될까?”
향엄은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 파랑을 일으킨 격이었다. 운신할 도리가 없는 나무 위의 그 기틀이 도리어 대중에게 꿈틀거릴 착각의 단서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청정한 빈곤의 극치에서 진흙탕에 몸을 뒹굴며 고의로 자신을 더럽혀 대중을 이끌고자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향엄은 밀어 넘어뜨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떠받쳐 세우기도 했다. 호두는 이런 스승과 장단을 맞춘 것이다. 불혜천(佛慧泉)이 이 뜻을 감파했다. 


껄껄하고 크게 웃을 뿐 바늘과 송곳을 꽂을 틈도 없네.
나무에 매달린 것이 그 이전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설령 향엄이 여러 가지 기량을 부리도록 허용했더라도,
옆에서 지켜보면 틀림없이 양미간을 찌푸렸을 것이다.

呵呵大笑沒針錐
上樹何如未上時
任使香嚴多伎倆
傍觀不免爲?眉 

 

진실로 실현된 화두가 눈앞에 나타나면 어떤 말도 그것에 붙일 수 없게 된다. 알아차리고도 그저 웃음이 나오거나 어깨춤을 출 뿐이지만 그것도 엄밀한 입장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여기에 이르면 갖가지 기량의 달변이 하나같이 무용지물이 되고 어떤 묘책도 통하지 않는다. 이 사정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라면 항복의 깃발 대신 보내는 웃음 정도는 봐주고 넘어가지만, 언어와 분별의 기량으로 그 곤경을 모면하려는 꼴을 보고서는 양미간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방관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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