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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랏말싸미’ 영화적 상상력 논란
2019년 08월 09일 (금) 09:57:05 법응 스님 .
   
▲ 법응 스님.

“분과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오. 집에도 다녀가지 못하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울고 갑니다. 어머니 잘 모시고 아기 잘 기르시오. 내년 가을에나 나오고자 하오. 안부가 궁금합니다. 집에 가서 어머님이랑 아이랑 다 반가이 보고 가고자 했는데, 장수가 혼자만 집에 가고 나는 못 가게 해서 다녀가지 못합니다.”

이 내용은 지난 2011년 대전의 안정 나씨 집안이 선조의 묘지를 이장하던 중 한 여인의 관에서 발견한 한글 간찰(편지)의 한 대목이다. 현대 한글로 다시 정리한 글이지만, 1490년에 군관 나신걸(羅臣傑.1461∼1524)이 함경도 경성지방에서 근무하던 중 자신의 부인 신창 맹씨(新昌孟氏)에게 보낸 친필 언문 편지의 부분이다.

한글 반포 후 대략 50여 년 정도 후의 일이니 당시 한글의 전파 속도를 요즘의 시각으로 따지자면 인터넷 광케이블 수준이라 할 것이다. 1400년대의 한글 편지로는 청주에서 출토된 김씨의 편지가 더 있다.

영화 ‘나랏말싸미’에 대해 역사왜곡이라며 악평과 공격이 거세다. 어떤 영화라도 영화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고 감상과 의견도 제각각이니 각자의 생각에 왈가왈부할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 숭배(숭유억불)를 국시로 창건된 나라에서 국왕이 유교 이념으로 무장한 신하들과의 첨예한 갈등 및 원성을 감수하면서까지 갓 창제한 한글을 갖고서 왜 그다지도 불경 간행에 열성이었는지 적잖이 의문이 든다.

물론 먼저 세상을 떠난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고자 했고, 더불어 민중들에게 익숙한 부처님이야기를 통해 한글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도도 분명히 있었을 것임을 가늠하지 못하는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직 건국 초창기였던 상황에서 유교 이념을 조속히 확산해 가야 한다는 국가적 과제가 있었고, 빌미만 잡았다 하면 사사건건 왕권에 도전하려 드는 신하들과의 갈등과 충돌을 고려한다면 부처님 이야기보다는 유교와 관련된 다른 방안을 모색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을 테니 말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그 훈민정음 해례본이 원래 안동 광흥사의 나한상 복장(腹藏) 유물이었다는 주장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유교국의 국왕이 주도해 창제한 문자의 해례서가 어떻게 국가가 배척하는 불가(佛家)의 가장 내밀하고 성스러운 예배 대상의 복장에 모셔진다는 말인가?

어떤 비밀스런 사연이 여기에 깃들어 있는 것인지 단순하지 않은 상념에 젖게 된다. 한글창제 후 왕가의 여섯 대 선조를 칭송한 노래 ‘용비어천가’를 지은 배경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1447년에 세종의 뜻에 따라 수양대군이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을 지어 올리자 세종이 석가의 공덕을 칭송하는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만들었으니 이때가 세종 31년(1449년)의 일이다. ‘월인천강지곡’은 현재 국보 제320호이다.

이후 세조대에 이르기까지 법화경언해, 원각경언해 등 20여 종의 불경 언해본을 제작한다. 이 간경불사에는 신미 스님의 친동생인 김수온(호조판서와 영산부원군 제수)이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유교경전은 100년 후에나 언해본이 나온다. 한 국가의 중앙권력이 특정한 사상이나 종교를 배척하면 그 서적부터 읽지 못하게 하고 불사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 엄한 숭유억불의 시대에 불경들을 한글화 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당시 사회에 뿌리박힌 불교를 통한 한글의 빠른 전파, 유학을 숭상하는 관료 등에 대한 견제 등 다양한 이론이 대두되고 있다. 향후 보다 심도 깊은 연구가 있기를 바란다.

필자가 소장한 조선 중기의 법화경을 보면 아음, 설음 등 범어의 발음에 대한 내용을 별도로 편집한 것이 있다.

언어학은 어느 한 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교가 도래 후 이두와 구결의 발달을 주도한 것이 당시 지식층의 한 부류인 스님들이었으니 자연히 승려들은 어문학에 독보적인 존재였음은 지당하다.

세종이 그리도 원하던 한글을 창제하면서 언어학의 독보적인 존재였던 승려들을 외면했을까? 아니다. 그 중심이 신미 스님일 따름이다.

영화 ‘나랏말싸미’가 역사왜곡이라 뭇매를 맞고 있다. 한글창제에 대해 당시 불교계가 기여했다는 세미나가 몇 번 있었다. 이 기회에 불교계나 관련 분야의 학자들이 심도 깊은 학술회의 등을 개최해 제대로 한판 붙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

법응 스님 | 불교사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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