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투옥된 서대문형무소의 모습. 지금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쓰인다. <사진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golbenge/8709900948 | CC BY 라이선스>

1919년 3·1운동 이후 만해 스님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대부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는 3·1운동 민족대표 뿐만 아니라 일제하 독립 운동가가 대거 수용되었던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형무소였다. 이번 장에서는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만해 스님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가 투옥되어 고문을 받거나 처형당한 수난과 아픔의 현장인 서대문형무소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서대문형무소는 경성감옥에서 유래되었다. 1907년 12월 27일 법부령 제1호로 한성부에 감옥서(監獄署)를 설치하고 경성감옥서라 칭하였다. 이듬해인 1908년 10월 21일 법부고시(法部告示) 제8호로, 경성감옥을 10월 19일 독립문 밖 신축 감옥으로 이전하였음을 고시하였다. 이로써 서대문형무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경성감옥은 일제의 한국침략에 저항했던 의병세력과 계몽운동세력을 일반 대중과 격리·감금하여 민족적 저항의지를 꺾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당시 이 감옥은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기 힘든 곳, 병신이 돼서 나오는 곳’으로 대중에게 인식되었다.

1912년 9월 3일 경성부 공덕리(孔德里, 현재의 공덕동)에 경성감옥을 설치하고 종래의 경성감옥을 ‘서대문감옥’로 개칭하였다. 1923년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이름을 바꾸면서 일제강점기 식민지 정권의 감옥으로 운영되었다.

초기 목재로 지은 건물은 해를 거듭할수록 붉은 벽돌 건물로 바뀌어 규모와 수용인원이 늘어났다. 처음 신축했을 때는 480평 규모, 80평 부속시설, 수용인원 500명 규모였으나 1937년 당시 총 면적 5만 5,000㎡(약 1만 6,500여 평), 수용인원 2,500여 명, 운영인력 343명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최대 규모의 감옥으로 운영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감옥으로 운용되었다. 이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1987년 10월까지 총 80년간 감옥으로 운용되었고, 현재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감옥은 이렇게 일본 식민지하에서 출발하였다. 즉 조선의 전통적 제도가 종지부를 찍고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일본 행형제도가 도입됨으로써 식민지 행형이 시작된 것이다.

소위 ‘사상범’이라는 죄명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 운동가의 삶과 생활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감옥 안에서도 끝까지 일제에 저항하였고, 목숨을 담보로 투쟁하며 온갖 고문을 견뎠을 것이다. 그러나 감옥도 정해진 기간 동안 살아야했던 생활 공간이었다. 많은 사람이 모인 집단생활이었기에 하루하루의 일과가 있었고, 나름대로 일상이 이어졌다. 서대문형무소의 일상에 대한 흔적은 총독부 기록물과 서대문형무소 생산 기록물, 수감자의 회고기록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선형무소 사진첩》은 1920년대 한국에서 운용되었던 형무소 사진 자료가 담겨 있고, 《조선구시의 형정(朝鮮舊時の刑政)》과 《조선의 행형제도(朝鮮の行刑制度)》에서는 형무소 관련 수감인원, 노역 현황 등 각종 통계가 기록되어 있어 일제의 감옥 운영방침과 그 실태에 대한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서대문형무소 예규류찬(西大門刑務所 例規類纂)》은 서대문형무소 교도관이 직접 편찬한 것으로 감옥 관리에 따른 제반 실무를 서무과, 작업과, 계호과, 구치과, 의무과, 교무과 6개과별로 총 116개의 제반규칙과 문서 양식 등에 관한 기록을 담았다. 이 기록은 서대문형무소가 어떤 조직체계로 운영되었는가, 실무운영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수형기록카드’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람 개개인에 대한 사진과 생년, 주소, 형량, 형기 등을 기록한 문서다. 남아있는 수형기록카드는 모두 소위 ‘사상범’이라는 죄명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 운동가의 면면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현재 6,000여 장의 수형카드가 남아있다.

입는 것〔衣〕

수인복(囚人服)은 주로 경찰서에서 미결감으로 이송되었을 때 지급되었다. 서대문형무소의 경우 경찰서에서 피의자를 인계받으면 보안과 청사 지하의 조사실에서 신체 조사를 마치고 지급하였다. 색깔은 미결수는 청색, 기결수는 붉은 감색이었다. 형태는 일본의 옷 ‘기모노’와 비슷하게 일자형으로 되어 있고, 허리춤을 올렸다 내리면서 높낮이를 조절하고 허리끈으로 조여 고정할 수 있도록 했다. 수인복의 배급이 원활치 않아 여름철과 겨울철 구분 없이 단벌만 지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겨울에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외부로부터 차입(差入)한 솜을 수인복 안에 넣어 누벼 입거나, 내의나 스웨터 등을 여러 겹으로 껴입어야 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지원이 없거나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대부분의 수감자는 그저 단벌옷으로 기나긴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야만 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입감되는 순간부터 ‘입는’ 문제는 단순히 무엇을 입는 것이 아닌, 혹독한 추위와 싸우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었던 것이다.

먹는 것〔食〕

감옥에서 먹는다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적과의 싸움이었다. 밥은 규정상 총 9개의 등급으로 양을 구분하여 배급하였다. 소위 ‘범죄의 질’에 따라, ‘노역의 정도’에 따라 밥 양에 차등을 두었다. 일반범에게는 노역을 시키고 특등~3·4등급의 밥을 지급하였고, 노역을 시키지 않은 독립운동가에게는 주로 4~5등급 이하의 밥을 배급하였다. 밥의 양은 소위 ‘틀밥(가다밥)’이라고 하여 밑판은 1~9의 등급이 매겨져 있고, 밑판의 두께가 등급에 따라 각기 다르다. 밥의 혼합배율은 백미 10%, 조 또는 보리 등 잡곡 50%, 콩(대두) 40%로 주로 눈에 띄는 것은 콩이었다. 우리가 흔히 감옥 가는 것을 ‘콩밥 먹는다’고 하는 유래도 일제강점기 감옥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미결수는 스스로 구입하거나(자변, 自辯), 외부에서 차입(差入)해 먹을 수 있었다. 형편이 되는 미결수는 먹는 문제에서 조금 여유로울 수 있었지만, ‘일제에 저항한 죄’를 확정 받은 기결수는 먹는 것에도 일체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1930년대 이후 일제의 대륙침략이 가속화되면서 배급 상황은 극도로 악화됐다. 이에 따라 생명 부지를 위한 영양소마저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하였다. 수감자 가운데 제때 영양공급을 받지 못하여 질병에 걸려 옥사(獄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 식민지 운영에 있어 그들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에 대한 극단적인 처우를 보여주는 것이다.

생활공간〔住〕

감방 내부의 상황은 입는 것, 먹는 것 못지않게 열악하였다. 별도의 화장실이 옥사(獄舍)에 없었기 때문에 가장 기초적인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것조차 원활치 않았다. 해결방법으로 감방 안에 2중으로 된 나무 양동이, 일명 ‘뺑끼통’을 놓고 그곳에 용변을 보았다. 겨울이야 그럭저럭 견뎠겠지만 섭씨 30도를 웃도는 한여름에는 통 안에서 새어나오는 냄새와 가스 때문에 수감자는 참을 수 없는 고역을 겪어야 했다. 더욱이 1930년대 감방 1평당 수용밀도는 3.12명으로 같은 시기 대만이 1.37명, 일본이 1.19명이었던 것에 비하여 수용밀도가 매우 높았다. 1981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 보도기사에 의하면, 1평에 4명 이상이 수용되어 한 여름에는 ‘초열지옥(焦熱地獄)의 철창’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감옥 수감 실태가 열악하였다. 여름철 더위를 물리칠 수 있는 도구라고는 부채 밖에 없었다. 부채마저도 미결수는 차입이 1인당 1개가 허용되었으나, 기결수는 5명당 1개의 부채 밖에 지급되지 않아, 부채질 하는 것조차 식민지 감옥에서는 자유롭게 허락되지 않았다.

겨울철은 더욱 문제였다. 감방 안에는 일체의 난방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얇은 이불조각과 수인복, 그리고 동료 수감자의 체온만으로 혹한의 추위를 견뎌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피부병·장티푸스·발진티푸스 등의 전염병과 치질·신경통·정신공항·동상 등은 다반사였고, 고문으로 인한 복막염·늑막염·골절 등으로 병이 심해져 옥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제국주의 권력의 가혹함이 감옥 운영과 수감자 처우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독립운동가’의 하루 일과

감옥에서의 일과는 크게 노역(勞役)에 동원되었던 일반범 수감자와 동원되지 않았던 ‘사상범’ 수감자로 구분된다. 소위 ‘사상범’으로 분류되었던 독립 운동가가 함께 모이면 위험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노역을 시키지 않았다. 노역에 동원된 일반범은 형무소 내 공장에서 하루 종일 고된 노역에 시달렸지만, 그들보다 노역에 동원되지 않았던 ‘사상범’이 더욱 힘든 감옥생활을 견뎌야 했다. 이들의 일과는 여름철의 경우 오전 6시에 기상하여 방 정리와 세면을 마치고 7시에 아침밥을 먹었다. 10시에는 교도관의 방검사(검방, 檢房)가 있었고, 이때 변기통을 밖으로 내어 놓고 오후 2시에 다시 들여 놓았다. 12시에 점심, 17시에 저녁, 21시에 취침했다. 감방 안에 있을 때는 바른 자세(정좌, 正坐)로 앉아있어야 했다. 누울 수 있는 시간은 취침시간이 되어서야 가능하였다. 이렇게 수감자는 식민지 지배 권력이 정해 놓은 엄격한 시간의 틀 속에서 통제되었고, 일제는 이를 통해 수감자의 시간을 효과적으로 지배함으로써 행동을 장악하고 수감자를 보다 쉽게, 보다 효율적으로, 보다 순종적으로 관리하는데 만전을 기하였다.

〔참고 자료〕 △박경목, 《기록으로 보는 일제 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일상》, 국가기록원, 2014. △양성숙, <일제하 서대문형무소 연구 - 의병투쟁과 105인사건을 중심으로>, 성신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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