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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애국지사 투옥된 수난과 아픔의 현장
만해 스님과 서대문형무소 ①
2019년 07월 25일 (목) 17:56:23 한국불교선리연구원 budjn2009@gmail.com
   
▲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투옥된 서대문형무소의 모습. 지금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쓰인다. <사진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golbenge/8709900948 | CC BY 라이선스>

1919년 3·1운동 이후 만해 스님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대부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는 3·1운동 민족대표 뿐만 아니라 일제하 독립 운동가가 대거 수용되었던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형무소였다. 이번 장에서는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만해 스님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가 투옥되어 고문을 받거나 처형당한 수난과 아픔의 현장인 서대문형무소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서대문형무소는 경성감옥에서 유래되었다. 1907년 12월 27일 법부령 제1호로 한성부에 감옥서(監獄署)를 설치하고 경성감옥서라 칭하였다. 이듬해인 1908년 10월 21일 법부고시(法部告示) 제8호로, 경성감옥을 10월 19일 독립문 밖 신축 감옥으로 이전하였음을 고시하였다. 이로써 서대문형무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경성감옥은 일제의 한국침략에 저항했던 의병세력과 계몽운동세력을 일반 대중과 격리·감금하여 민족적 저항의지를 꺾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당시 이 감옥은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기 힘든 곳, 병신이 돼서 나오는 곳’으로 대중에게 인식되었다.

1912년 9월 3일 경성부 공덕리(孔德里, 현재의 공덕동)에 경성감옥을 설치하고 종래의 경성감옥을 ‘서대문감옥’로 개칭하였다. 1923년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이름을 바꾸면서 일제강점기 식민지 정권의 감옥으로 운영되었다.

초기 목재로 지은 건물은 해를 거듭할수록 붉은 벽돌 건물로 바뀌어 규모와 수용인원이 늘어났다. 처음 신축했을 때는 480평 규모, 80평 부속시설, 수용인원 500명 규모였으나 1937년 당시 총 면적 5만 5,000㎡(약 1만 6,500여 평), 수용인원 2,500여 명, 운영인력 343명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최대 규모의 감옥으로 운영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감옥으로 운용되었다. 이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1987년 10월까지 총 80년간 감옥으로 운용되었고, 현재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감옥은 이렇게 일본 식민지하에서 출발하였다. 즉 조선의 전통적 제도가 종지부를 찍고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일본 행형제도가 도입됨으로써 식민지 행형이 시작된 것이다.

소위 ‘사상범’이라는 죄명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 운동가의 삶과 생활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감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