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시작한 ‘자비’라는 단어가 ‘이타심’이라는 말로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현상이다.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경제’에도 이타심이나 공유의 바람이 불고 있다.

불평등의 심화가 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이를 해결하는 방안에 전문가들이 머리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기심이 극대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나보다 가난한 이가 나타나면 내 밥그릇이 줄어들까 두려움을 갖고 배타적으로 군다. 실례로 우리 사회가 난민이나 외국인노동자를 대하는 자세에서 알 수 있다.

이번에 72회 칸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은 계층 간의 구조를 주제로 했다. 영화 개봉 두 달 만에 관람객이 900만 명을 넘으며 국민들이 수상을 축하하고 있다. 곧 천만 관객에 도달할 것 같다.

이 정도면 영화를 상세하게 소개해도 ‘스포일러’를 했다고 손가락질 받지는 않을 것 같아서 〈기생충〉과 2016년 69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소개한다.

그 손을 놓지 말고 꼭 잡아

‘나, 다니엘 블레이크’(켄 로치 감독, 영국)

 

주인공은 영국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사내다. 그는 정신병으로 고생하던 아내를 간병하다 지금은 아내를 잃고, 40년 간 목수로 일했지만 심장병으로 일을 쉬라는 의사의 권고 때문에 직장을 그만 뒀다. 문제는 그가 실업급여를 신청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그는 상담사와의 통화에서 심장이 좋지 않다고 여러 차례 호소하지만 상담사는 이야기를 듣기보다 “메뉴얼에 적힌대로”를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결국 다니엘은 질병수당 신청에서 탈락하고 만다. 항소를 하려고 해보지만 인터넷으로 신청해야 하는 시스템 때문에 ‘마우스’를 움직일 줄도 모르는 그는 열불을 홀로 삭혀야 했다.

다니엘이 항소를 위해 찾아간 관공서에서 싱글맘 케이티를 만난다. 두 아이를 데리고 관공서로 구직급여를 받기 위해 온 케이티는 예약한 시간에 늦었다고 구직급여 제재대상이 된다. “이사 와서 지리를 몰라 시간에 늦었다”고 설명해보지만 관공서의 직원은 그녀의 요구를 묵살하고 청원경찰이 그녀와 아이들을 밖으로 내몰려한다. 그걸 보고 다니엘이 나서서 대항하다가 결국 같이 쫓겨나고 만다.

그때부터 다니엘이 케이티와 그녀의 아이들을 돕는다. 자신의 손재주를 이용해 이사 온 집을 수리해주고 자신이 깎은 목재 모빌을 아이 방에 달아주며 따듯한 이웃을 자처한다. 전기가 끊겨 온기가 없는 집을 걱정하며 우선 전기요금을 내라고 쪽지와 함께 돈을 남기기도 한다.

이들은 서로를 도우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을까? 예전 같으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모든 것이 자본주의화 된 오늘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다니엘은 손으로 발로, 몸뚱이를 움직여 일하던 세대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이력서를 쓰고 구직활동도 열심히 하지만 관공서의 상담원은 그에게 ‘컴퓨터로 작성하지 않았다’, ‘휴대폰 촬영으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며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든다. 그는 점점 희망을 잃어간다.

케이티 또한 두 아이를 데리고 지독한 배고픔 속에 산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식료품지원소에서 통조림을 받은 케이티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손으로 통조림을 꺼내먹는다. 그러고는 바로 수치심에 눈물을 흘린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는 딸과 아들. 아직 20대의 이 젊은이와 어린 자녀들에게 인생은 너무나 무겁고 가혹하다. 하지만 이걸로도 끝이 아니다.

케이티는 생리대를 훔치다 잡혔고 딸아이가 찢어진 운동화 때문에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결국 유일하게 가진 몸뚱이를 팔기 위해 나선 케이티. 그걸 알게 된 다니엘이 찾아가 만류하지만 케이티는 당장 먹을거리를 사야 하기 때문에 그를 피한다.

이 영화는 스토리 중심의 영화다. 카메라의 기법, 음향, 색감, 대사 등 영화의 연출 기술로 승부할 생각을 전혀 안하고 주인공을 따라 가는 스토리로 집중한다. 그래서 요즘의 화려한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은 아쉽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사실주의 영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온 감독 켄 로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후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라고 소감을 전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서 개인으로 등장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따듯하고 이웃을 보살핀다. 같이 근무했던 다니엘의 동료는 그의 건강을 걱정하고, 옆집에 사는 흑인청년은 철없어 보이지만 다니엘이 돈 떨어져 가구를 팔자 진심으로 돕고 싶어 한다. 또 관공서에서 만난 한 직원도 다니엘을 도와주려 하다가 상사의 제지를 받는다.

그런 선한 개인들이 시스템과 메뉴얼 하에 들어오면 ‘효율성’을 이유로 힘없는 개인을 절망을 향해 내몰리게 된다. 회생할 수 있는 개인을 돕지 않고 손을 놔버리는 것이야말로 ‘공공성의 뿌리침’이라고 할 것이다.

시스템과 메뉴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감독은 다니엘의 입을 빌어 “민영화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말한다. 실제 영국은 1979년 보수당 내각이 들어서면서 민영화정책을 강령으로 채택,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기 시작했다. 공공서비스가 민영화되지 않은 우리나라도 2014년 발생한 송파 세 모녀 자살사건을 통해 복지의 사각지대를 여실히 보였다.

켄 로치 감독은 칸영화제에서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사람들에게 ‘가난은 너의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잔인함이 문제”라고 말했다.

올라갈 사다리는 애초부터 없었다

‘기생충’ (봉준호 감독, 한국)

 

국민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은 부인, 아들, 딸이 몽땅 백수로 지하방에 산다. 네 식구가 피자상자를 접으며 소정의 돈을 받고 사니 생활은 궁핍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인터넷 사용비를 내지 않아 끊기자 지하 방과 화장실을 돌며 와이파이를 잡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이 낙천적이라서 피자상자 접은 돈을 받아 맥주 한 캔씩 함께 하는 등 사이좋은 모습이다. 그러다 아들 기우의 친구가 유학을 가며 넘겨준 과외, 거기서부터 거짓이 시작됐다. 기우는 대학생이 아니라 삼수를 하고도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오랜 입시 경험으로 인해 훌륭한 과외선생이 된다. 젊은 사업가 동익네 부부의 집에서 큰딸의 영어를 가르치며 신임을 얻은 기우는 그 집 작은아들의 미술 과외교사로 자신의 동생인 기정을 소개한다. 동생이라는 것도 속이고 해외유학파라고 포장한다. 이미 가족은 피자상자를 접는 아르바이트할 때 불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요령껏 돈을 받아내는 뻔뻔함을 보였다.

사실 가난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뻔뻔함만큼 필요한 게 없다. 그래서 이들 가족이 한 명씩 차례로 거짓말을 하고 한 가정에 들어가는 설정은 과장되지만 불가능하다고 보이지 않는다. 아들과 딸이 과외교사로 취업하고는 사장의 기사와 가정부를 모함하여 해고하게 만든다. 그 자리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들어가 자리를 꿰차고 이제 이 집은 기택의 가족이 주름잡는다. 중간에 주인집 작은아이가 “같은 냄새가 난다”라는 말을 하는 대목에서 잠깐 긴장이 고조돼, 기택네 식구들은 대책을 세우려하지만 지하에서 나는 냄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건은, 동익네 가족이 캠핑을 가는 날 밤에 일어난다. 주인집 가족이 집을 비우자 기택네 가족이 주인인 양 집을 차지하고 술판을 벌이는데, 그때 이들의 모함으로 경황없이 쫓겨난 가정부 문광이 절박한 모습으로 집에 들여보내달라고 간청한다.

문광은 들어와서 곧장 주인도 모르는 지하 벙커를 열고 숨겨놓은 남편에게 향한다. 지난 몇 년간 빚쟁이를 피해 남편을 지하에 숨겨두고 아무도 몰래 보살펴왔던 것이다. 이들은 기택네 식구에게 자신들을 눈감아달라고 부탁하지만 현재 자신들이 속이고 있는 내용마저 탄로날까봐 기택네는 필사적으로 문광 부부를 막는다. 여기부터 치열한 몸싸움이 일어난다.

이 부분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다. 더 깊은 지하에서 올라오려는 자와 그걸 막는 지하에 사는 자, 우리 사회에서 계층 간의 갈등을 표현한 것이다.

부자인 동익 부부는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게다가 인품도 좋아 보인다. 영화에서 기택네 부부는 동익네를 두고 이런 대사를 주고받는다.

“부자인데 착하기까지 해.”

“부자인데 착한 게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거야. 돈이 다리미야, 돈만 있어봐. 내 주름살 쫙 펴지지.”

이렇게 동익네서 혜택을 받는 기택네는 동익네 가족을 좋게 생각하지만 동익네의 생각은 다르다.

“선을 넘지 않아서 마음에 들어요.” “선을 아슬아슬하게 안 넘어.”

단지 월급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선’을 지켜 더 이상 다가오지 말고 인간적인 관계로 절대 발전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또 기택에게서 지독한 냄새가 난다며 “지하철 타는 사람 특유의 냄새”를 언급한다. 숨어서 그 말을 듣던 기택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다. 착하고 구김 없다고 생각한 부자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폭우가 쏟아져도 쾌적함을 유지하는 동익네에서 험난한 길을 거쳐 자신의 집에 도착한 기택네 가족은 지하 방이 물에 잠겨 있음을 본다. 그전까지는 돈 나올 구멍 없이 가난했지만 집안에는 재밌고 밝은 기운이 넘쳤는데 부자들의 생활에 발을 담그고 부자들의 생각을 읽고 난 후의 기택네 가족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되었다.

이들은 과연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그들보다 더 지하에서 살던 문광부부는 지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아직 개봉 중인 영화라서 결말까지 얘기하는 건 접고 여기까지만 이야기를 해야겠다.

두 영화는 가난한 계층이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태도, 사회학적으로 보면 계층 간의 모습을 주제로 했다. 앞의 영화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손을 내밀고 잡는 것이 신자유주의를 견딜 방법이라 강조했고 뒤의 영화는 계층 간의 사다리라는 것은 허상이며, 사다리 자체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두 영화 모두 칸영화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는 데서 칸영화제의 고민이 신자유주의, 불평등 해소 등과 맞닿아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제 뿐 아니라 양극화가 심각한 개별 국가와 세계시민들이 이 문제를 공감하고 나서야 할 때다.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