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무장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126호.

무장사지(鍪藏寺址)는 고향처럼 늘 그리운 곳입니다. “문무왕(《삼국유사》엔 태종무열왕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이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와 투구를 묻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그리움이 생겼지요. 15년 전, 네 번의 시도 만에 간 무장사지는 잔설로 덮여 있었습니다. 스산한 바람이 나뭇가지 끝을 스쳤지만 샘솟던 감동까지 덮진 못했습니다.

‘참다운 평화는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덕치로 이루어야 한다’고 충고한 의상(義湘, 625~702) 스님과 그 가르침을 쫓아 인적 드문 골짜기에 병기를 묻은 문무왕의 자취를 찾아 경주 무장사지로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여정은 분황사에서 시작했습니다.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즉위 3년(634)에 지은 절입니다. 이곳은 과거세 부처님 당시 절터였다는 ‘칠처가람(七處伽藍)’ 중 한 곳입니다.

분황사는 의상 스님의 도반이자 대학승인 원효(元曉, 617~686) 스님이 출가하고 주석한 사찰입니다. 중국에 유학해 지엄(智儼, 602~668) 스님의 화엄학을 계승한 의상 스님과는 달리 원효 스님은 국내에서 자신만의 독창적 학문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의상 스님과 함께 중국 유학길에 나섰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후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함’을 깨닫고 되돌아온 일화는 유명합니다. ‘진나보살의 후신’으로 칭송받을 정도로 큰 학문적 업적을 남긴 스님은 이곳 분황사에서 《화엄소》를 짓다가 제4 <십회향품>에 이르러 붓을 놓았다 합니다.

분황사에는 아들 설총(薛聰, 655~?)이 스님의 유골을 부수어 조성한 소상(塑像)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설총이 소상에 절을 올리자 스님의 소상이 돌아보았다 하지요. 소상은 고려 때까지도 남아있었습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은 “지금도 돌아본 그대로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고려 숙종은 즉위 6년(1101)에 원효, 의상 두 스님을 기려 각각 ‘화쟁국사(和諍國師)’와 ‘원교국사(圓敎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를 세워 그 공덕을 길이 보전케 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원효 스님의 비는 90여 년 뒤인 명종 20년(1190)에 분황사에 세워졌습니다. 현재 경내에는 비부만 남아있습니다. 분황사 부근에 방치돼 있던 것을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를 찾으려고 경주를 방문한 추사 김정희가 발견했다 합니다. 추사는 비부에 ‘此和靜國師之碑跀 金正喜’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靜’ 자는 ‘諍’의 잘못 입니다.

▲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는 원효 스님이 출가한 사찰이다.

원효 스님이 왕과 여러 대신, 전국의 고승에게 《금강삼매경》을 강설했다는 분황사 앞 황룡사지를 돌아본 뒤 다시 분황사로 돌아와 동쪽 큰길(산업로)을 건너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700m 쯤 걸어 낭산 북쪽 기슭에 다다르면, 다시 왼쪽으로 700m 가량 산을 감싸고 돌아듭니다. 언덕 같이 나지막한 산기슭에 우뚝 선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어서 오라’ 순례자를 반깁니다.

의상 스님은 진덕(여)왕 6년(652), 29살 때 이곳 황복사에서 출가했습니다. 황복사를 누가 언제 창건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942년 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사리함(舍利函)에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란 명문이 있어 종묘 기능을 수행한 왕실사원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경문왕이 돌아가자 이 절에서 화장했다고 합니다.

절터는 지금 한창 발굴 중입니다. 2016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에서 제34대 효성왕(737~742)의 것으로 추정하는 미완성 왕릉과 건물지, 남북 도로 등을 확인했습니다. 또 신라 왕실사원임을 추정할 수 있는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대석단 기단 건물지 등 대규모 유구와 금동불상 등을 발굴했다 합니다.

▲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국보 제37호. 황복사는 의상 스님이 출가한 사찰이다.

발길을 돌려 황복사지와 마주보고 있는 보문동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에는 진평왕릉과 함께 설총의 묘로 전하는 무덤이 있습니다.

설총은 강수, 최치원과 함께 통일신라 3대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설총은 이두를 집대성하고 유학을 연구·발전시키는 데 공헌해 ‘신라 유학의 종주’로 일컬어집니다. 고려 현종이 즉위 13년(1022)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추증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설총 묘에서 진평왕릉 앞으로 나와 북쪽으로 길을 잡습니다. 마을을 벗어날 즈음 농수로를 따라 이어진 벚나무 산책로로 들어섭니다. 조성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오가는 이가 드뭅니다. 이따금 순례자를 경계하는 개들의 짖음만이 정적을 깨울 뿐입니다. 1.6km 가량 걸으니 보문호를 돌아 감포로 이어지는 경감로를 마주합니다. 이 길을 따라 추령을 넘으면 동해구(東海口)에 다다릅니다. 그곳에는 의상 스님의 충언을 받들어 덕치를 펼친 문무왕의 능과 호국룡이 된 문무왕을 위해 지은 감은사지가 있습니다.

산책로를 따라 보문호를 감싸고 걷습니다. 보문호는 1952년 착공해 1963년 준공한 저수지입니다. 1971년 정부가 경주 관광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보문관광단지를 조성하면서 숙박시설과 위락시설, 공원이 즐비한 관광지가 되었지만, 1400여 년 전엔 원효, 의상 두 스님이 서로를 탁마하며 오갔을 계곡이었겠지요. 의상 스님의 가르침을 받든 문무왕이 무장사를 향해 나아갔던 옛길도 지금은 보문호 깊은 물속에 잠겨있을 터입니다.

보문관광단지에서 포항·천곡 방면 천북남로로 접어드니 차도와 인도의 경계가 없어집니다.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재빨리 피할 수 있도록 차량을 마주보며 왼쪽 차선으로 걷습니다. 700m 가량 걸으니 갈림길이 나옵니다. 암곡동으로 들어가는 보덕로로 발길을 돌립니다.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고갯길을 오르니 길 오른편으로 언뜻 언뜻 덕동호가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이야 천북남로와 보덕로를 거쳐 무장사지로 들어가지만 1975년 덕동댐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물속에 잠긴 덕동 계곡을 따라 들어갔을 테지요. 깊고 푸른 덕동호 물속에는 원효 스님이 만년에 머물렀던 고선사지가 잠겨 있습니다.

▲ 경주 무장사지 계곡 입구 다리.

보덕로는 대성마을을 지나 와동마을, 왕산마을로 이어집니다. 무장사지 계곡 입구에 다다르니 15년 전에는 없던 국립공원관리공단 공원지킴이터가 있습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무장사지를 소개한 뒤 이곳을 찾는 이가 많아졌나 봅니다. 가을이면 무장봉에 펼쳐진 억새군락을 보러 오는 이도 많다 합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계곡길을 잘 정비해 놓아 무장사지까지 2.4km 구간은 산책하듯 편하게 다녀올 수 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더니 그 말을 새삼 실감합니다.

“그윽한 골짜기는 너무도 험준하여 마치 깎아 세운 듯하다. 그곳은 깊숙하고 어두침침하므로 저절로 허백(虛白, 마음이 비면 절로 순백이 일어남)이 생길 것이므로, 참으로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길만한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일연 스님의 표현대로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울울창창한 숲과 깊은 계곡뿐입니다.

무장사는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 대아간 효양이 숙부 파진찬을 추모하여 세운 절이라 합니다. 이 절에는 신라 제39대 소성왕의 비 계화왕후(桂花王后)가 돌아간 왕의 명복을 빌며 조성한 아미타불과 신중상이 있었습니다.

계화부인은 여섯 종류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9부에 저장했던 재물을 다 내어 명장(名匠)에게 아미타불을 조성하도록 했습니다. 장엄하고 아름다웠을 불상과 지아비를 향한 애틋한 사연이 담겼을 비신은 사라지고, 새로 조성한 비신을 짊어진 ‘아미타불조상사적비’의 귀부와 이수만이 옛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 신라 제39대 소성왕의 비 계화왕후(桂花王后)가 돌아간 왕의 명복을 빌며 아미타불과 신중상을 조성한 내력을 새긴 ‘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보물 제125호). 비신은 최근 새로 조성한 것이다.

세월의 흐름은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마저도 역사의 뒤안길로 돌려 놓는가 봅니다. 무장사지에 서면 그래서 더욱,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애장왕 2년(801)년에 건립된 ‘아미타불조상사적비’는 무장사가 폐사된 후 그 행방을 알지 못했는데, 영조 38년(1760)에 경주부윤 홍양호가 암곡동에서 찾았다 합니다. 그 뒤 다시 잃었다가 순조 17년(1817) 추사 김정희가 경주 일대를 뒤져 깨진 비석 두 부분을 찾았다 합니다.

무장사지에는 삼층석탑도 남아있습니다. 석탑 앞에서 사지 옆으로 이어진 깊은 계곡을 바라보며 “문무왕이 묻었던 병기와 투구는 어디로 갔을까. 혹 저 물길을 따라 떠내려가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왕의 정치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고 해도 백성은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씻어버리고 복을 오래할 수 있습니다. 정치가 진실로 밝지가 못하면 비록 장성을 쌓는다 하여도 재해를 없애지는 못할 것입니다.”

문무왕이 경주에 성곽을 쌓으려 하자 그 소식을 들은 의상 스님이 왕에게 보낸 편지 내용입니다. 《삼국유사》 <문호왕법민> 조에 전하지요. 왕은 스님의 편지를 받고 역사를 중단시켰다고 합니다. 스승의 충언을 귀담아 듣고 실행한 문무왕이기에 병기와 투구를 이 깊은 산중에 감추어 둘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삼층석탑을 둘러싼 낮은 울타리에 걸터앉아 석탑을 바라봤습니다. 석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무기를 묻으며 “평화로운 시대를 일구겠다”고 다짐하던 문무왕을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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