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백 미터나 되는 공포의 다리가 저 멀리 보인다.

봄날의 정취에 취한 채 1시간 30여분을 행복하게 걸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시련이 닥쳤습니다. 3백 미터나 되는 출렁다리가 나타난 것입니다. 건물 5층 높이에, 아래로는 거세고 깊은 물이 흐르고, 거기다 계속 바람에 흔들리는 다리 위를 15분가량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2층 올라가는 것에도 공포를 느꼈고, 지금도 한강 다리를 걸어갈 때 긴장감을 갖고 걸어가는 편입니다. 이런 나에게 출렁다리는 거의 재앙 수준이었습니다.

공포감에 손을 들어준다면 난 트래킹을 포기하고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선택은 결국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내게 고소공포증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른 그 사실을 수용했습니다.

현실을 수용하는 순간, 편안해지는 마음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면서 ‘수용’의 순간에 많이 직면했습니다. 물러설 곳이 없는 길에 자주 맞닥뜨렸습니다. 히말라야에서는 불평 같은 건 용납이 안 됐습니다. 그저 내 앞에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빠를수록 수월했습니다.

이것이 히말라야가 내게 준 교훈입니다. 히말라야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네팔인들의 삶에서도 이 진리를 엿보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많은 짐을 지고 산을 다니면서도 미소를 지었으며, 불평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현실에서도 결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화를 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으며, 무겁다고 짜증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었습니다. 그저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야 하는 현실이 있을 뿐이니, 생각을 멈추고 그냥 오를 뿐인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선택이고, 히말라야에서는 이렇게 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갈등할 마음의 여유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다리 위를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이 앞서 걷고 다음으로 내가 걷고 포터가 뒤따랐습니다. 내가 너무 긴장한 게 느껴졌는지 포터가 팔을 잡아주었습니다. 포터가 잡아주자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떨어져도 같이 떨어지고 죽어도 동행자가 있다는 생각이 위로가 됐습니다. 그리고 포터는 유능하므로 안 떨어지게 잘 걸을 것이라는 믿음도 한몫 했습니다.

포터 덕분에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이 길기만 한 다리를 마침내 건널 수 있었습니다. 다리를 건너자 온몸에 쌓여있던 긴장감이 풀리면서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었습니다. 잠시 앉았다 가겠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을 먼저 올려 보냈습니다. 포터에게 정말 고마웠습니다. 나의 두려움을 알아채준 섬세한 마음이 고맙고, 덕분에 무사히 건널 수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내려올 때도 이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가끔씩 다리 건널 일을 생각하면 걱정이 됐습니다. 나중에 포터에게 다른 사람들도 이 다리를 무서워하냐고 물었더니 그는 친절하게도 대부분 사람들이 이 다리를 무서워한다고 대답해주었습니다. 남편도 무서웠다고 말해줬습니다.

다리를 건너면서 마음이 많이 비워졌는지 이번 트래킹의 가장 난코스라고 할 수 있는 지누단다에서 촘롱 오르는 구간은 힘들이지 않고 올랐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구간입니다. 거의 두 시간을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입니다. 돌계단으로 돼있는데 하늘에라도 올라가는 것처럼 끝없이 올라가는 편입니다. 지누단다가 1780미터고 촘롱이 2170미터이니 거의 4백 미터를 가파르게 올라가는 코스입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험난한 코스인데 힘들이지 않고 올랐습니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가 놓여있어

다리를 건넌 안도감에 취해 있었고, 오르는 게 내 앞에 주어진 현실이고 난 이 현실에서 벗어

▲ 끝없이 올라가는 지옥의 촘롱구간.

날 수 없으니까 그냥 오르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힘들다, 오르기 싫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이렇게 중무장하고 있었지만 몸은 달랐습니다. 숨이 차고 점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습니다. 그러자 어김없이 마음도 ‘정말 올라가기 싫다, 언제 다 올라가지’ 하는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그럴 때 비장의 무기를 꺼냈습니다. 빨리 올라가고 싶다는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서 최대한 다리를 천천히 들고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명상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움직였더니 이상하게 헐떡거리던 마음도 금방 안정을 찾고 고요해졌습니다. 그러면 힘들다는 생각도 없어졌으며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기까지 했습니다. 오르막계단을 오를 때는 항상 이 방법을 썼습니다.

다만, 포터가 뒤에 따라왔는데 내가 앞을 막고 있는 것 같아서 미안한 생각도 들고, 뒤에 사람이 있으면 재촉당하는 기분도 들고 해서 몇 번이나 포터에게 먼저 가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포터는 나에게 천천히 오라고 하면서 앞으로 갔습니다. 천천히 오라는 말이 참 마음 편하게 들렸습니다.

우리가 올라갈 때 정말 밝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뛰어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정상까지 올라갔다 하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걱정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나중에 그 말의 뜻을 이해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경험해야할 고난은 엄청난데 자신은 이제 거기서 해방됐다는 것이었지요. 즉, 자신은 자유로움과 행복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려는 길에는 두 가지가 분명하게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알 수 없는 고난, 그리고 고난을 경험한 사람의 자신감과 해방감이 그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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