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본기》에 이르기를 “소수림왕 즉위 2년 임신(372)은 즉 동진의 함안2년으로 효무제가 즉위한 해이다.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스님 순도를 통해 불상과 경문을 보냈다.(당시 부견은 관중 즉 장안을 도읍으로 삼았다) 또 4년 갑술(374)에는 아도가 진나라로부터 왔다. 이듬해 을해(375) 2월에는 초문사를 창건하여 순도를 배치하고 또 이불란사를 세워서는 아도를 배치하니 이것이 고구려 불교의 시초이다.”라고 하였다.

‘고려본기’는 ‘고구려본기’의 준말이라고 유추해본다. 당시에는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렀던 것 같다. 당시란 고구려 즉 삼국시대거나 통일신라시대를 말한다. 고려시대에 고려본기에 고구려 기사를 실었을 수도 있지만 개연성은 낮다. 이 책의 ‘함안2년’은 간문제(簡文帝) 2년이기도 하다. 같은 해에 왕에서 물러나고 새 왕이 올라오면서 2개 이상의 연호가 사용된 것이다.

중국의 5호 16국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전진의 부견왕이 해동 가운데 고구려에 불교를 보냈다는 내용이다. 지금으로 치면 국제포교단을 보낸 것인데 매우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불교는 고등종교로서 다른 나라에 알려주는 것을 꺼렸을 법한데 대국의 왕으로서 불교를 숭상했던 풍모를 느낄 수 있다. 부견왕은 천하통일의 야망을 품고 동진을 침범했지만 대패하고 목숨을 끊은 인물인데 우리나라에는 정말 좋은 일을 했다. 덕분에 372년에 순도가, 374년에는 아도가 중국에서 건너와서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세웠으니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승전》 에 “순도와 아도가 위나라로부터 왔다”는 말은 틀린 것이다. 실상은 전진으로부터 왔다. 또 이르기를 “초문사는 지금의 흥국사요, 이불란사는 지금의 흥복사”라고 한 것도 역시 잘못이다. 살펴보면, “고구려 당시의 도읍은 안시성으로 안정홀”이라고 했다. 요수의 북쪽에 있다. 요수는 압록이라고도 했는데, 지금은 안민강이라고 부른다. (이렇다면) 송도(개성)에 어찌 흥국사라는 이름이 있었던가!

《해동고승전》에는 순도가 전진이 아닌 진(秦)에서 왔으며, 아도만이 진이 아닌 위(魏)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한 ‘승전’은 해동고승전이 아닌 건가? 단순 기억력에 의존해서 쓴 것인지 어떤지 여하튼 석연찮은 부분이다.

아울러 당시의 수도는 안시성이 아니라 국내성(집안현)이다. 《삼국유사》 〈왕력편〉 ‘고구려 국원왕조’에는 ‘제십륙국원왕(第十六國原王)……임인팔월이도안시성(壬寅八月移道安市城)……’이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주체가 일연이라면 큰 실수를 한 것이거나 잘못된 전거를 참고한 것이 된다. 살펴본 대상이 구체적인 것이 아니어서 승전이나 앞 문장에 이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에 구체적으로 구할 수 있는 사료적 한계로 인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이 부분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는 한없이 추락하고 만다. 정확한 근거에 따른 확실한 대안 제시가 없는 단순 비판은 적절한 사료비판이라고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또 초문사, 이불란사, 흥국사, 흥복사 모두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다. 당시라면 집안현일텐데 그다지 큰 사찰도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후 확장을 거듭했을 수도 있으므로,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고 그런 사실이 있었다고만 하면 될 듯싶다. 아울러, 고려시대에 집안현은 고려 땅도 아닌데 어떻게 잘 아는지도 좀 궁금하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 집안현은 우리 역사상 잊혀졌다고 봐야 할 듯 싶다. 그렇기에 이와 같은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닐지 추측해본다.

찬하여 말한다. 압록강 봄도 깊어 물가의 풀도 곱다. 백사장에서 한가로이 졸던 백로가 저 멀리 노 젓는 소리에 놀라 깨니, 어디서 온 배인지 안개 속에 손님이 오셨네.

압록강 변의 들꽃이 파릇파릇할 때 중국 어느 나라인지 좀 단정하긴 어렵지만 스님이 배로 건너와 불교를 전했다는 의미를 담은 시 같다.

난타벽제(難陁闢濟)

백제본기에 ‘≪승전(僧傳)≫에서는 14대’라고 했으나 잘못이고 제15대 침류왕(枕流王) 즉위 갑신 동진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9년(384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晉)에서 왔는데, (그를) 맞이하여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예우하였다. 이듬해 을유(385년)에 절을 새 서울인 한산주(漢山州)에 세우고, 승려 열 명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 불교의 시초이다. 또 아신왕(阿莘王)이 즉위한 태원 17년(392년) 2월에 불법을 신봉하여 복을 구하라고 교령을 내렸다. 마라난타는 번역하면 동학(童學)이라고 한다. 그의 특이한 행적은 ≪승전≫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흥법제삼의 두 번째 조목인 난타벽제의 첫 문장이다. 침류왕이 14대가 아니라 15대라며 《승전》에 대해서 비판적인 모습을 보인다. 한편 아신왕 관련 기사는 《해동고승전》에 보이지 않으니 유실된 뒷부분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관련 기사는 《삼국사기》에도 보이지 않고 다만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침류왕 원년 9월조에는 ‘호승마라난타자진지(胡僧摩羅難陀自晉至) 왕영지치궁내(王迎之致宮內) 례경언(禮敬焉) 불법시어차(佛法始於此)’이라는 기사와 함께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침류왕 2년 춘2월조’에는 ‘창불사어한산(創佛寺於漢山) 도승십인(度僧十人)’이라는 기사가 함께 있어 앞부분의 사료적 신빙성을 높인다.

결국 백제에는 384년에 마라난타가 왔으며 385년에는 한산주에 절을 세우고 승려를 배치했다는 이야기인데 절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

찬왈(讚曰)
천조종내초매간(天造從來草昧間) 대도위기야응난(大都爲伎也應難).
옹옹자해정가무(翁翁自解呈歌舞) 인득방인차안간(引得旁人借眼看)

찬에 이른다.
하늘의 조화는 아직 어두컴컴하여 모두 함께 재주를 부려도 보기만 하고 응하질 않네.
늙은이들이 스스로 나서서 노래와 춤을 바쳐서 주변 사람을 끌여 들여 눈뜨게 했네.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불법이 들어와도 모두들 쳐다보기만 하고 믿어주질 않았다. 나이 든 어른들이 믿고 숭배하며 좋아하니 그제야 주변의 가족, 이웃들이 불법에 눈을 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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