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룸비니 마야데비 사원의 석주. 사진=서현욱 기자
현대 인도에서 아쇼까 왕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도를 갈 때 필요한 비자에 찍힌 인장에서부터 아쇼까를 만난다. 인도화폐 루삐에서도 아쇼까의 석주를 만날 수 있다. 모든 공문서에는 아쇼까의 석주가 새겨진 도장이 찍힌다. 바로 인도 공화국의 문장(紋章)이 아쇼까의 석주에서 따온 것이다. 바로 부처님 초전법륜 장소인 사르나트에 세워진 아쇼카 석주의 기둥머리에서 따온 것으로 대좌에는 법륜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 서로 등을 맞대고 앉은 4마리의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 법륜은 불교의 법만을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고 종파나 인종을 초월한 보편적인 진리이며, 아쇼까 왕에 의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정치이념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현대 인도에서 아쇼까는 살아있는 왕이자 군주이다. 간디와 함께 인도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 바로 아쇼까인 것이다.


불교에서도 아쇼까 왕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제외하고 그의 업적에 비견할 만한 인물을 찾기 어렵다. 불교가 세계화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담마사절단’을 세계 각국에 파견에 불법을 전했다. 그의 자녀인 마힌다 비구는 스리랑카를 불국토가 되게 했다. 불교 세계화의 선구자가 바로 아쇼까이다. 심지어 아함부 경전에는 <아육왕전>이 전해 질 정도 이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아쇼까 왕의 삶과 행적, 사상의 전모를 알기는 어려웠다.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을 냈던 일아 스님이 새책 《아소까-각문과 역사적 연구》를 펴냈다. 《아소까》의 제목은 아쇼까 왕 당시 서민들이 썼던 쁘라끄리따 원음 그대로 표기한 것. 일아 스님은 ‘아쇼까’를 ‘아소까’로 표기한 것은 그가 남긴 대부분의 석주와 석벽의 석문들이 쁘라끄리따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 아쇼까는 산스끄리뜨가 아닌 쁘라끄리따로 석문을 남겼을까? 이는 대중들이 모두 부처님의 법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란 게 일아 스님의 설명이다.

▲ 룸비니 인근 고띠하와(현지명=GOTIHAWA)의 아쇼까 석주. 사진=서현욱

일아 스님은 아쇼까 왕이 남긴 석주와 바위에 남긴 각문에서 아쇼까왕의 행적과 그의 사상을 좇는다. 일아 스님이 아쇼까에 집중한 이유는 그가 불교를 세계화한 첫 인물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불교가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첫 공로자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인도 전역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미얀마에 흩어진 아쇼까 석주와 바위의 각문을 모아 해독 가능한 38개의 각문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밝혔다. 또 아쇼까 왕의 생애를 조명했고, 각문의 판독과 언어, 발견 장소와 그 배경 등을 상세히 밝혔다. 더욱이 아쇼까와 불교의 관계, 아쇼까 담마와 빠알리 경전의 담마 비교, 각문에 담긴 복지와 자선활동, 아쇼까 왕이 잊혀진 이유와 현대 인도불교의 부흥 등을 상세히 다뤘다.

불교를 세계종교로 만든 인물, 아쇼까 왕. 일아 스님은 우선 세계 역사에서 유일하게 전쟁을 완전히 포기한 왕으로서 아쇼까를 만난다. 하지만 스님은 아쇼까를 일개 제왕이 아닌 인간 행복을 최상의 목표로 삼은 성인군자 같은 왕이란 점에 집중한다. 일아 스님은 “아쇼까는 한때 출가했던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수도승 이상의 성자였다”고 말한다.

▲ 다울리 언덕의 아쇼까 각문 석벽 위 코끼리 상. 사진=서현욱 자료사진

전쟁을 완전히 포기한 왕.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제왕. 아쇼까왕이 전쟁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깔링가 평원의 대전쟁 이후이다. 즉위 8년 인도 내에서 가장 강력한 독립왕국으로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던 지금의 오리사주 부바네스와르의 칼링가 지방을 정복했다. 이 때 15만 명의 포로중 10만 명이 살해 됐으며, 또 그 몇 배가 되는 사람이 전쟁으로 사망했다. 아쇼까는 이 전쟁을 끝으로 전쟁을 완전히 포기한다. 그 사실은 다울리 석벽에 각문으로 남아있다.

▲ 다울리 언덕의 아쇼까 석벽. 사진=서현욱 자료사진

아쇼까는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의 왕이었지만 힘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았다.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면서 바른 윤리를 바탕으로 백성들의 행복을 염원했다. “자신의 통치이념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찾았지만, 다른 종교를 배타적으로 보지 않은 바다와 같은 자비의 왕이었다”고 일아 스님은 설명한다.

아쇼까왕의 정책중 일아 스님은 ‘담마정책’에 관심을 두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전쟁없는 평화로운 이상세계를 실현하겠다는 아쇼까의 담마정책은 인도를 넘어 세계 각국으로 번졌다. ‘담마사절단’을 구성해 세계 각국에 외교사절단으로 보냈다. 일아 스님은 “힌두교나 자인교(자이나교)처럼 인도의 지방 종교에 불과했을지 모를 불교가 세계종교로 추앙받은 것은 이 담마정책의 힘이라고 보았다.

▲ 룸비니 인근 니갈리 사가르(현지명=NILGLIHAWA) 석주. 사진=서현욱 자료사진

일아 스님은 아쇼까의 담마정책의 목표에 다시 집중한다. 우물을 파고 나무를 심고 물 마시는 곳을 만들었다. 망고 나무로 숲을 이뤄 그 열매를 먹게 하고 약초를 심고 진료소를 만들었다. 사람만 아닌 동물까지를 위한 일이었다. 일아 스님은 ‘복지와 자선 사업’의 모델을 아쇼까를 통해 보았다고 말한다. 왕과 왕비 왕자의 자선사업을 위한 행정관을 두어 국가 차원의 복지 및 자서사업을 펼쳤다. 이같은 복지활동은 인도에만 머무르지 않고 국외까지 넓혔다. 외교와 담마(부처님 가르침), 복지를 손에 들고 담마사절단은 세계를 누볐다.
살생도 금지했다.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공경하고 사치와 향락을 금했다. 다른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자기 종교를 해하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아쇼까는 다른 종교에도 보시하고 공경을 표했다.

아쇼까의 각문이 인도 전역에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아 스님은 아쇼까 왕이 성지순례를 하면서 석주와 석문 등을 남겼다고 보았다. 다른 왕들이 사냥이나 오락을 즐길 때 아쇼까는 정기적으로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면서 돌기둥을 세우고 사람들을 찾아 담마토론을 하고, 보시하였다. 룸비니 니갈리사가르의 석주에는 이곳이 부처님의 탄생지이므로 세금을 감면해 준다는 각문이 남아있다. 사실 아쇼까 왕의 석주가 없었다면 부처님 탄생지 조차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 일아 스님.
일아 스님은 “아쇼까 각문은 이 시대 모든 계층의 사람들, 모든 종교의 사람들, 특히 정치인, 행정가, 지도자들의 필수 지침서임에 틀림없다”고 강조한다. 아쇼까의 담마정책을 좇으면 대통령의 청와대예배 같은 종교편향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일아 스님의 부연 설명이다.
일아 스님은 “아쇼까 각문을 읽으면 대인관계나 종교갈등, 인간의 가장 중요한 윤리, 나와 남, 생명있는 존재들이 우선돼야 하는 이유, 어떻게 전쟁 없는 세상이 가능한지, 공직자들이 탐욕과 부패에 물들지 않을 수 있는 이유, 소외되고 비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왜 필요한 지를 배울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일아 스님/민족사/25,000원
서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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