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생에겐 다 불성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중생의 육안으로는 불성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부지런히 정진하라고 한다. 마치 나무가 겉으로는 모르지만, 서로 비비면 거기서 불이 일어나듯이, 우리도 부지런히 정진하면 선정과 지혜가 나와서 불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열반경》에서는 우리 중생이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곧 일체법이 차별상이 없이 공함과 공하지 않음, 제법이 항상함과 무상함, 즐거움과 즐겁지 않음,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내가 가지지 않은 것,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 서로 다른 법[異法]의 끊을 것과 끊지 못할 것, 서로 다른 법의 인연으로 생긴 과보와 생기지 않는 과보 등이다. 따라서 법의 이 두 가지 면을 바로 보면 지혜를 구족하게 되어 불성을 보게 되고, 열반의 무상(無相)을 분명하게 본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활 속에서 때로는 선업을 짓고 혹은 악업을 짓는데, 과연 어느 때 그 과보를 다 받고 언제 불성을 보고 어느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인가.

순타는 《열반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부처님 열반 직전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 음식에 대한 이론이 있지만 여하튼 이 세상에 오신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순타의 공양을 받으시고 열반에 드셨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지대할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순타에게 “너는 이미 불성을 보았으니 대열반을 얻을 것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리라.”고 하셨다.

이러한 무궁(無窮)한 공덕을 지었다면 언제 그 공덕의 과보를 다 받을까? 질문은 다음과 같다.

“세존이시여, 경에 말씀하시기를 ‘축생에게 보시하면 백배의 과보를 받고, (성불할 성품이 없는 사람인) 일천제에게 보시하면 천배의 과보를 받고, 번뇌를 끊은 외도에게 보시하면 한량없는 과보를 받고, 사향사과(四向四果)를 얻은 아라한과 벽지불에게 보시하면 한량없는 과보를 받고, 불퇴전의 보살이나 최후신(最後身, 윤회의 생사가 끊기는 최후의 몸)의 보살이나 여래께 보시하면 받는 과보의 복덕이 한량없고 가없고 헤아릴 수 없다’고 하셨거늘 순타 보살이 이처럼 한량없는 과보를 어느새 다 받고 어느 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습니까?”

첫 번째 문제는 춘다의 경우처럼 이미 불성을 보았는데 거기다가 부처님께 마지막 공양을 올렸으니 그 어마어마한 공덕을 다 받으면 어느 세월에 아뇩다리삼먁삼보리까지 이루겠느냐는 것이다. 우리같은 중생들에게는 부럽기만 한 질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업(業)은 일단 지으면 언제가 되든 어디에 가든 반드시 다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중대한 마음으로 좋은 업이나 나쁜 업을 지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데, 이 세상에서 받기도 하고 다음 세상에서 받기도 하고 후생에서 받기도 한다.’고 하셨습니다. 순타는 중대한 마음으로 선한 업을 지었으니 반드시 업을 받을 것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아뇩다리삼먁삼보리를 성취하며 불성을 보겠습니까?”

곧 두 번째 제기한 문제는 이처럼 중대한 선업을 지었을 때, 이 정해진 업을 다 받고 정말 아뇩다리삼먁삼보리를 이루기는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물었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또한 세 종류 사람에게 보시하면 그 공덕이 다함이 없다고 하셨으니 병자, 부모, 여래라고 하였고, 《법구경》 게송처럼 허공도 바닷속도 산속도 어느 곳을 벗어나서도 업보를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했으며, 밥 한 그릇을 보시하고 8만 겁 동안 악취(惡趣,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고통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순타가 진심으로 보시하고 단바라밀을 성취한 것이야 말해 무엇 할 것인가?”

이렇게 순타는 여래를 공양한 엄청난 공덕을 다 받아야 할 터인데 그렇다면 언제 아뇩다리삼먁삼보리를 이루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선업의 문제였고, 악업을 지은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선한 과보가 끝이 없을진대 ‘방등경’을 비방하고 오역죄를 범하고 사중금(四重禁, 살생, 투도, 사음, 망어를 금지하는 네 가지 계율)을 깨트린 일천제의 죄보인들 어찌 끝이 있겠나이까. 만일 끝이 없다면 어떻게 불성을 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오리까?”

악업을 지었을 경우도 마찬가지이니, 경전을 비방한 큰 죄보와 오역죄 사중금을 지은 일천제는 그 죄보의 끝을 알 수 없을 것인즉 언제 그 과보를 다 받고 어떻게 불성을 보고 아뇩다리삼먁삼보리를 이루겠냐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열반경》에서는 선업과 악업의 두 가지 업을 지었을 경우 그 과보를 언제 어디서 다 받고 불성을 보고 아뇩다리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선남자여, 어떤 중생들이 업의 인연에 대하여 업신여기고 믿지 않기에 이를 제도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였느니라. 선남자여, 온갖 업은 가벼운 것이 있고 무거운 것이 있으며 가벼운 업과 무거운 업 각각에는 결정된 것과 결정되지 않은 업이 있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악한 업이 그 과보가 없나니 악한 업이 결정코 과보가 있다면 어찌하여 기허전다라(氣噓栴陀羅)가 천상에 나고 앙굴마라가 해탈의 과보를 얻었겠는가. 이런 이치로 지은 업으로 과보를 얻기도 하고 얻지 않기도 한다는 잘못된 소견을 없애기 위해 경에서 모든 지은 업은 과보를 받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무량한 공덕과 선악업의 과보를 설한 것은 중생이 업의 인연에 대해서 가벼이 여기고 믿지 않으니 이런 자들을 제도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건 다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였다는 취지이다. 그리고 지은 업은 그 가볍고 중한 차별이 있고, 결정된 업 결정되지 않은 업에 따라 받음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허전다라가 삼악도에 떨어질 죄업을 지었고, 앙굴마라가 지옥에 들어갈 살인을 저질렀거늘 어떻게 천상에 나고 해탈을 얻었는가. 이들은 이 악업의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일까. 경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지혜의 힘으로 지옥에서 받을 중대한 업을 이 세상에서 가볍게 받기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받을 가벼운 업을 지옥에서 중하게 받기도 하느니라.”

곧 무거운 업을 가볍게 받을 수도 있고 혹은 가벼운 업을 무겁게 받을 수도 있는데,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에 따라 그 받음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모든 업이 모두 결정된 과보를 받는 것이 아니며, 비록 얻는 것이 아니지만 얻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때때로 우리는 “그렇게 악업을 지었는데 잘 살기만 하더라.” 혹은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왜 그렇게 못살지?”라는 어리석은 걱정을 할 때가 있다. 이러한 것은 법의 이치를 알고 나면 한낱 기우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에 따라 부지런히 공덕을 쌓으며 선정과 지혜를 닦으면 산 넘고 강 건너 보배성에 이르듯, 어느덧 아뇩다리삼먁삼보리도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지 않을까.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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