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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왜 불교인가 Ⅱ - 산은 여전히 그 산인가
이미지가 이미지 낳는 시대, 끊임없이 의심해야
2019년 04월 08일 (월) 14:58:36 김문갑 meastree@naver.com

1.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계절은 어김없이 돌고 돌아 다시 봄이다. 뜨락엔 벌써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 남녘에선 진즉에 매화가 활짝 피었다고 한다. 생뚱맞은 질문 하나 해보자. 저것이 꽃인 줄 어떻게 아는가? 여전히 한겨울인데 나는 지금 꽃이 활짝 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데카르트(1596〜1650)는 이렇게 의심했었다.

틈이 벌어진 암벽 사이에 핀 꽃
그 암벽에서 널 뽑아 들었다
여기 뿌리까지 널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하지만 내가 너의 본질을
뿌리까지 송두리째 이해할 수 있다면
하느님과 인간이 무언지 알 수 있으련만


장영희 선생이 번역한 영국의 계관시인 A. 테니슨(1809〜1892)의 〈암벽 사이에 핀 꽃〉이란 시다. 시인은 꽃을 뽑아 모양이며 색깔, 그리고 향기 등을 꼼꼼히 살펴본다. 경험을 통해 사물의 실체를 아는 것이다. 논리는 귀납론이고, 판단은 종합판단이다.

경험에 근거한 종합판단은 태생적인 결함이 있다. 경험 자체가 근본적으로 객관적이지 못한 것이다. 이 사람의 경험과 저 사람의 경험은 서로 다를 수 있고, 한 사람의 경험이라고 할지라도 어제의 경험과 오늘의 경험은 또한 다를 수 있다. 누구는 사과가 맛있다고 하지만, 다른 누구는 맛이 없다고 한다. 같은 사람이 어제는 사과가 맛있었는데 오늘은 맛이 없기도 하다. 경험론은 어떻게 하든 진리의 객관성이나 보편성을 보장할 수 없다. 모름지기 진리란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라도 진리이여야 한다면, 경험을 통해서는 이런 진리의 보편성을 절대로 확보하지 못한다.

귀납법 또한 결코 진리를 보장하지 못한다. 언제라도 단 하나의 예외가 발견되는 순간 진리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검은 백조가 발견되는 순간 하얀 새, 백조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것이다.

결국 영국 경험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D. 흄(1711〜1776)은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다만 믿음에 불과한 것임을 주장하게 된다. 수천 년 동안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현상을 경험했다고 해서 내일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른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테니슨은 결코 진리라고 확증할 수 없는 방법으로 꽃의 본질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더구나 신을 알고 인간을 이해하고자 했으니, 자가당착도 이만한 게 없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1804)는 흄의 회의론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칸트에 의하면 경험은 비록 진리의 보편성을 보장할 수 없지만, 경험이 일어나는 공간과 시간은 절대적이며 보편적이다. 그리고 인간의 오성(悟性)은 범주(範疇, category)를 적용하여 판단하는데, 이 범주는 선험적(先驗的)이기 때문에 진리의 보편성, 혹은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칸트의 주장에 의하면 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꽃 자체의 어떤 실체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사유를 통해 여러 개의 범주를 적용하여 구성해내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은 자연의 입법자”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칸트 철학에 의하면,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인간이 이름을 지음으로써 꽃은 비로소 꽃이 되는 것이다.

2.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칸트 말대로 인간은 참으로 자연의 입법자일까? 나는 어떤 자연물도 내가 명명해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십여 년 전 지인들과 중국 후난성 장사(長沙)에서 전통 시장을 찾았을 때였다. 한 허름한 식당에서 민물가재 요리를 시켰는데, 모두 강한 향신료 때문에 잘 먹지 못하였다. 왜 중국인들은 맛있게 잘 먹는 요리를 한국인은 잘 먹지 못할까? 만약 한국인이 중국의 장사에 태어나 자랐어도 그 민물가재 요리를 못 먹을까?

나는 알고 있소, 이 스테이크는 실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것을 내 입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내 두뇌에 맛있다는 신호를 보내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소.

영화 《매트릭스》에서 사이퍼가 스테이크를 먹으며 한 말이다. 불교에서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즉 모든 존재에는 자성(自性)이 없다고 하였다. 스테이크에는 스테이크의 자성이 없다. 스테이크라는 이름이 있을 뿐, 스테이크는 실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스테이크 맛 또한 그 실체가 없다.

스테이크란 이름이며 맛은 잠시 빌린 것, 가법(假法)이다. 환경과 여건에 따라 이렇게도 빌리고, 저렇게도 빌리는 것이다. 만약 1년 365일 중의 364일 동안 스테이크를 먹어야 하고, 단 하루만 푸성귀를 먹을 수 있다면, 거친 푸성귀가 가장 맛 좋은 음식일 거다.

그렇다면 이런 환경과 느낌 등을 프로그램화하여 우리들의 뇌에 입력한다면 어떻게 될까? 중국인의 경험을 압축해서 한국인의 두뇌에 입력한다면 한국인도 장사의 민물가재 요리를 맛있게 먹지 않을까?

칸트로 돌아가 보자. 과연 우리는 이것은 꽃이고 저것은 돌이라고 명명하는 입법자인가? 불행히도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것은 꽃이고 저것은 돌이라고 부르는 세계에 태어나 꽃과 돌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며 살아왔다. 꽃을 돌이라고 하거나, 돌을 나무라고 하면 꾸중을 듣거나 어쩌면 왕따를 당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꽃이며 돌이라고 명명된 세계에 태어나 그 세계에 적응하며 살아온 것이다.

적응의 과정은 무수히 많은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집, 학교, 절, 교회, 시장…… 그리고 영화, 드라마, TV, 광고 등 모든 곳에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데이터가 우리의 두뇌에 입력되고 우리의 몸에 저장된다. 그렇게 입력되고 저장된 데이터인 지식, 교양, 습관 등등이 꽃을 보며 기쁜 감정을, 스테이크를 먹으며 맛있는 느낌이 들도록 해주는 것이다. 산이라고 부르니까 산인 거지 산은 본래 산이라 할 게 없는 것이다.

3. 산은 여전히 그 산인가

영화 《매트릭스》에서 소파를 만지며 진짜(real)냐고 묻는 네오에게 모피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 진짜인가? 너는 진짜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만약 네가 느끼고, 네가 냄새 맡고, 네가 맛보며 보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면, 진짜는 다만 네 두뇌에 의해 해석된 전자 신호에 불과한 걸.

   
▲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플라톤에 의한다면 이 현실 세계는 이데아계의 복제(copy)에 불과하다. 꽃은 ‘꽃이데아’의 복제품이니, 꽃 그림은 복제의 복제가 된다. 이 복제의 복제를 플라톤은 ‘시뮬라크르(simulacre)’라고 하였다. 복제되면 될수록 진짜와는 더욱 멀어진다. 시뮬라크르는 잠시라도 동일한 자기로 있을 수 없는 존재, 지금 여기에 실재하지 않는 가짜이다.

지금 내 모니터에 떠 있는 고흐의 〈해바라기〉는 복제의 복제, 복제를 수천 번 한 복제이다. 그러고 보면 문화가 융성할수록, 문명이 발달할수록 시뮬라크르는 더욱더 많아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도로 정교해진 컴퓨터 그래픽 기술은 실재와는 많이 동떨어진 이미지들을 하루에도 수백만, 수천만 개씩 만들어 낸다.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 플라톤이 볼 때, 온통 카피본과 이미지로 가득한 현대는 거대한 쓰레기 산과 다를 게 없다. 현대인은 《매트릭스》에서 그린 것처럼 완전히 진짜가 메말라버린 사막에 사는 것이다.

“유위(有爲)가 만들어 내는 모든 존재는 꿈이요, 환상이요, 거품이요, 그림자 같은 것이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금강경》 사구게의 말처럼 참으로 그렇다. 현대인은 진실로 이미지와 복제로 만들어진 환상 속에 산다. 그것이 거품이요, 그림자인 줄도 모르고 거짓된 감각에 맡긴 채 살아간다.

산업사회는 기계장치에 의해 상품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사회이다. 대량생산 체제가 가능하게 하려면 대량 소비가 따라주어야 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는 산업사회의 기본질서이다. 산업혁명 이후의 역사, 예컨대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건설, 대규모 전쟁 등등은 모두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를 완성하거나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종차별주의, 대량파괴와 대량살육 등과 같은 비극이 일어났고, 어떤 것은 현재진행형이다.

식민지 경영이나 전쟁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이제 남은 방법은 이 시스템의 구성원들이 더 많이 소비해 주는 것이다. 천 벌의 옷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한 벌을 더 사고, 신발장에 백 켤레의 구두가 있어도 한 켤레를 더 사야 한다.

   
▲ 현대자동차 그랜저 광고.
몇 년 전에 이런 자동차 광고가 있었다. 오래간만에 우연히 동창생을 만난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 친구에게 그랜저를 보여준다. 놀라는 친구의 눈빛. 그리고 의기양양한 드라이빙. 부드러운 6단 자동변속기는 그냥 곁다리로 한 줄 넣어주는 것에 불과하다. “당신의 오늘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이 광고가 하고자 하는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 상품은 하나의 기호(記號)이다. 자동차, 아파트, 냉장고 등등은 물건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 사회적 지위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기호이다. 현대인이 수백만 원씩 비싼 값을 지불하며 명품을 사는 이유는 품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마크와 특허 등록된 디자인 때문이다. 명품 특유의 디자인과 마크가 소유자의 품격이나 지위를 나타낸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현대인은 상품이 아닌 기호를 소비한다.

대량소비가 가능하게 하려면 많은 돈이 있어야 하고, 많은 돈을 벌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 게으름이야말로 산업사회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다. 학교에서든 시장에서든, 영화에서 혹은 TV에서 열심히 일한 사람이 누리는 멋진 인생을 수시로 보여준다. ‘열정을 다해 일하시오. 성공적인 삶, 멋진 인생이 당신 앞에 펼쳐질 것이요.’라고 쉼 없이 속삭인다.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최두석 시인의 〈성에꽃〉이란 시이다.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처녀, 총각,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새벽 시내버스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더운 입김을 내뿜는다. ‘정열의 숨결’을 토해내며 오늘도 일터로 나간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 멋진 인생일까? 애석하게도 멋진 인생은 그냥 꿈일 뿐이다. 꿈은 오늘의 고통을 견디게 해주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은 이런 꿈조차 꾸지 않는다. ‘막막한 한숨’을 내쉬며 그저 오늘을 버틴다.

노승이 30년 전 아직 선에 들지 않았을 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다.
후에 선지식을 친견하고 깨우침을 얻은 뒤에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었다.
이제 쉴 곳을 얻고 예전에 보던 산을 보니 다만 산이요 물 또한 그저 물이다
대중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당나라 청원 유신(靑源 惟信) 선사가 남긴 법문이다.

산이 산인지 아닌지 모를 때가 있다. 마치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인지 노예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내가 참으로 내 인생을 사는 건가. 아니면 남의 인생을 살아주는 건가.

현대는 복제가 다시 복제되고,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낳는 시대이다. 중중무진(重重無盡), 온갖 가법(假法)이 층층이 쌓여 이미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구별이 무의미해진 지 오래되었다. 그 속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른 채 환영을 좇는다. 열정을 다해 열심히 일하면 내일의 멋진 삶이 펼쳐질 거라고 믿으며 오늘의 고통을 견딘다. 정교하게 짜진 프로그램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나를 어떻게 통제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래서 저항할 줄도 모르고, 도망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스템을 위해 새벽부터 열심히 일하는 노예이면서, 내일의 성공을 꿈꾸며 오늘을 열심히 사는 주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의심해야 한다. 내 생각을 의심하고, 내 마음을 물리쳐야 한다. 산은 여전히 그 산이다 싶을 때, 다시 한번 돌이켜봐야 한다. 왜냐하면 정답을 얻으려면 먼저 질문부터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의심 없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야말로 노예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연재를 마치며] 그동안 <철학 卍행>을 하며 주로 진실을 가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체제의 노예로 순치시키는 곳을 찾아 헤맸다. 근·현대 이후에는 제대로 가보지도 못할 정도로, 거짓이 참을 덮고 독단이 자유를 억압하는 사례들이 너무도 많았다. 파사현정(破邪顯正), 거짓을 깨부수고, 독단을 물리치는 일에는 불교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산중 가람만큼은 청정 국토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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