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성의 시대, 위대하고 존엄한 인간

나는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우리 감각은 종종 우리를 기만하므로, 감각이 우리 마음속에 그리는 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아주 단순한 기하학적 문제에 있어서조차 추리를 잘못하여 오류 추리를 범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전에 증명으로 인정했던 모든 근거를 거짓된 것으로 던져 버렸다. 끝으로, 우리가 깨어 있을 때에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잠들어 있을 때에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고, 이때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정신 속에 들어온 것 중에서 내 꿈의 환영보다 더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상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1원리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1)

프랑스 철학자 R. 데카르트는 의심과 의심, 생각과 생각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철학의 제1원리에 도달하였다. 의심하는 나, 생각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명석·판명(clear·distinct)한 것이다. 1637년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출간하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를 철학의 제1원리로 확정하여 제시하였다. 이제 우주의 중심에는 신이 아닌 인간이 서게 되었다. 데카르트 이후, 근대인들은 인간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역사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은 이성적 주체로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데카르트의 뒤를 이어 독일의 철학자 I. 칸트는 모든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고 역설하였다. 어떤 경우라도 인간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목적의 왕국을 실현하는 일은 정언명령이며 지상과제였다.

근대 이전에는 신이 궁극의 목적이었다. 인간은 신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인간의 현세적 삶은 신의 세계, 하느님의 나라에 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하였다. 그랬던 인간이 우주에서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 가장 위대하고 존엄한 존재로 우뚝 서게 되었다. 실로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이 이보다 더 위대하고 존엄했던 적이 없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났다.”는 인권선언이 우연히 나온 게 아니었다. 위대하고 존엄한 인간은 속박되어서도, 차별받아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자유와 평등은 존엄한 인간의 당연한 권리였다.

2. 대감금의 시대, 비이성의 징표, 광기

1640년에 데카르트의 《성찰》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1656년에는 루이14세의 칙령에 따라 프랑스 파리에 로피탈 제네랄(L'hopital general)이라는 구빈원(救貧院)이 설치된다.2) 구빈원은 말 그대로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곳이었다. 이곳에 당시 파리 인구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수용되었다.

로피탈 제네랄은 의료기관도, 종교시설도 아니었다. 중세 때 나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던 행정시설과 비슷한 곳에 미친 자들을 비롯하여 창녀, 부랑자, 걸인, 사기꾼, 마녀, 무신론자 등이 수용되었다. 이들은 이성의 시대에 공존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존재였다. 이성의 시대가 개막됨과 거의 동시에 대감금의 시대 또한 열린 것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광인들이었다. 광기는 본래 인간 본성의 한 부분으로 여겨졌다. 강렬하며 매혹적인 것. 때로는 인간성 속의 동물성, 혹은 비의(秘儀)적인 앎(savoir)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이분법적 사유에서 광기는 이성이 아닌 것이었다.

진리의 영속성 덕분으로 사유가 오류에서 벗어나거나 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광기로부터 사유를 보호하는 것은 진리의 영속성이 아니라. 미칠 가능성의 부정이다. 광기의 불가능성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의 본질이다.……광기는 사유의 불가능 조건이다.3)

꿈에서 깨면 다시 현실을 직시하고 실재를 이해할 수 있다. 뜨락의 나무는 여전히 그 나무이고, 어제 보았던 돌도 그대로이다. 진리의 영속성 덕분에 우리는 어제와 변함없이 오류에 빠지지 않고 오늘을 살아 갈 수 있다. 하지만 광기는 다르다. 어제는 커다란 풍차였던 것이 오늘은 거인 괴물로 변해 있다. 이래가지고는 사유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유하는 주체들이 사는 세계에서 광인은 공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격리되고 배제되었다.

격리 수용된 광인들은 발에 쇠사슬이 채워지고,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갔다. 이들 수용자들의 비참한 실정이 하나씩 알려지면서 이들에게는 강제노역이 아니라 의학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8세기 말 인도주의에 입각한 치료를 주장했던 의사 튜크(W. Tuke)와 피넬(P. Pinel)에 의해 치료를 위한 정신병원이 개원하였다.

영화 《퀼스》에는 당시 광인의 치료법을 놓고 벌어지는 갈등이 잘 드러나 있다. 샤렝턴 정신병원의 원장 쿨미어 신부는 그림 그리기, 글쓰기 등 인도적 치료법을 신봉하지만, 고문의사로 부임하는 로이 콜라는 신체적 고통을 통해 정신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한다. 영화는 전통적인 치료법의 부당함과 그 폭력성을 폭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주의 치료가 반드시 정당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또한 고발한다.

새롭게 구성되고 치장된 정신병동은 광인을 치료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기실 특정한 도덕적 가치들을 야만적인 강제나 육체적인 징벌로써가 아니고 ‘인도주의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더욱 강화시키고 능률적으로 내면화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피넬과 튜크는 정신병동을 건설함으로써 광기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포를, 광인 자신의 숨막히는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대치시켰다. 바꿔 말하면 정신병동은 광인이 갖는 죄의식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직한 것이다.4)

《퀼스》에서 쿨미어 신부가 사드 후작에게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이다. 신에 대한 경배와 절제할 줄 아는 도덕성. 하지만 사드 후작은 끝내 기독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다.

정신병동에 수용된 광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둘 중의 하나였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기독교적 신앙과 복종, 노동의 신성성 등등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이것들을 끝내 거부하고 그곳에서 죽는 것이었다. 건강한 사람과 병든 자의 분리는 정상과 비정상(변태), 이성과 비이성(광기)의 이분법적 체제 속에서 강제되었고, 그런 속에서 신앙과 죄의식, 도덕과 책임감 등의 관념들이 조직되었다.

3. 은밀하게 정교하게

1757년 3월 2일, 다미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밀랍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속옷 차림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서 사형수 호송차에 실려와, 공개적으로 사죄를 할 것.” 다음으로 “상기한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버린다.
5)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감시와 처벌》 (오생근 역) 서두에 나오는 글이다. 다미엥은 루이 15세를 죽이려다가 실패한 시종무관이었다.

지독한 고문과 고통을 극대화한 처형은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이었다. 왕의 위력을 과시하고, 유사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한 의식(儀式)이었다. 그런 만큼이나 형 집행은 굉장한 볼거리였고 때론 축제였다. 다미엥의 처형 당시 처형 장면을 잘 볼 수 있는 자리가 매우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역모, 패륜, 도적 등등의 단어가 연상하는 악과 악을 징벌하는 통쾌함. 공개처형은 권선징악적 도덕성과 선(善)을 위한 폭력의 합법성을 관중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순화하고 지배 권력의 정당성을 유지하였다. 현대인이 영화관에서 얻는 블록버스터급 통쾌함과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의 유사성과 역사적 유구함이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공개 처형이 이렇게 긍정적인 효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형수의 외침이나 끔찍한 처형은 대중의 각성과 저항을 초래하였다. 특히 지배층의 무능과 부패가 횡행하고, 국민들이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는 상황이라면, 사형수들은 때로 영웅이 되거나, 폭넓은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잔인한 고문과 공개 처형은 수정되어야 하였다. 공개 처형은 점차 사라지고,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시작하였다. 격리시키는 장소, 감옥이 이때부터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고대에 감옥은 처형되기 전에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판결은 대개 사형, 태형, 벌금형 등으로 이루어졌고, 판결이 떨어지면 즉각 그대로 시행하여 죽이거나 풀어주었다. 이 시대의 감옥은 범죄자가 임시로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하지만 공개적인 징벌이 곤란한 상황이 되어서는, 범죄자들은 일반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져 그들만의 격리된 공간에서 처벌되었다. 그곳에선 강제노역과 교화가 시행되었다.

근대적 감옥과 사법제도는 범법자들을 교화시켜 선량한 시민으로 사회에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악의 근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하였다. 범죄 발생의 근본 요인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었다. 예컨대 부랑자에 대한 처벌은 나태를 없애는 것이었다. 나태를 고치기 위한 강제 노역이 정당화되고, 노동의 가치가 주입되었다. 나태를 죄악시한 성경 구절이 끊임없이 봉독되었고, 기도는 주요한 일과였다.

4. 나는 네가 한 일을 모두 알고 있다

▲ 판옵티콘 설계도
판옵티콘(Panopticon)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제안한 교도소로, 일망감시시설을 가리키는 말이다. ‘판(pan)’은 그리스어로 ‘모두’란 뜻이며, ‘옵티콘(opticon)’은 ‘본다’는 말이다. 즉 모든 것을 다 본다는 의미이다.

설계도에서 보는 것처럼 원형 감옥의 중앙에는 감시탑이 있고 외곽으로 감방들이 그 내부가 다 보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아울러 중앙의 감시탑은 어둡게 하여 수감자들이 감시자들의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 없게 한다. 이런 장치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수감자들은 언제나 감시받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게 된다. 즉 수감자들은 감시자가 있건 없건 그들이 지켜야할 규율을 준수하며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판옵티콘 장치’는 ‘바라봄-보임’의 결합을 분리시키는 장치이다. 즉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완전히 보이기만 하고 중앙부의 탑 속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결코 보이지는 않는다. 이것은 권력을 자동적인 것이며, 또한 비개성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중요한 장치이다. 그 권력의 근원은 어떤 인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표면, 빛, 시선 등의 신중한 구분 속에서, 그리고 내적인 매커니즘이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 개개인들이 포착되는 그러한 장치 속에 존재한다. 군주가 최고의 권력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예식이나 의식, 표지 등은 쓸모없는 것으로 된다. 오직 비대칭과 불균형, 그리고 차이를 보장해 주는 장치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누가 권력을 행사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연히 걸려든 그 누구라도 이 기계장치를 작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누구라도 쉽게 작동시킬 수 있는 장치, 그래서 언제라도 작동되고 있다고 믿게 되는 장치가 판옵티콘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다 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판옵티콘 장치 속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는 분명 그 속에 태어났다.

푸코는 데카르트의 이성주의를 비판한다. 인간은 결코 인식의 주체가 아니다. 이성이 작동하기 전에 인간은 먼저 어떤 체제 속에 태어나고 그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체제가 추구하는 이상이나 가치를 내면화하고, 체제를 위해 봉사한다. 예컨대 현재의 우리들에게 ‘성공=부’라는 등식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현대인은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그 대가로 넓은 집, 고급 차를 소유한다. 따지고 보면 집과 자동차 등을 소비하기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집도 자동차도 없이 가난하게 살지라도 게으름 피우며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좋다고 한다면,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 체제는 ‘부=성공’과 동시에 ‘가난=실패’라는 등식을 만들어 낸다. 학교에서, TV에서, 드라마, 영화, 책 속에서 이런 등식이 간단없이 되풀이 된다. 은밀하면서도 정교하게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킨다. 이제 가난한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주눅이 든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 누군가가 보고 있다고 느끼며 가난한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도 파이팅을 외친다. 부자가 되어 당당하게 남 앞에 서고자 악을 쓴다.

따지고 보면 가난이 뭐 대수인가. 덜 벌면 덜 쓰면 된다. 옛 선사들은 무소유를 지향하였다. 그들은 헤진 누더기에 바리때 하나면 충분하였다. 당당하고 자유로운 영혼들. 하지만 이들마저 어느새 추방되고 없다. 정말로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다.

주) -----
1) 데카르트, 《방법서설》
2) 허경,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 읽기》
3) 위의 책
4) 윤평중,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
5)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감시와 처벌》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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