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장안의 화제가 됐던 드라마 〈SKY캐슬〉은 우리나라의 부모·자식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무조건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부모는 자식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자식을 독립된 개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다.

열 달을 뱃속에 품으며 나의 숨을 받고, 내 먹은 음식을 먹고, 내가 자면 휴식을 얻던 존재. 살아있다는 사실을 나에게만 알릴 수 있던, 온전히 내게 기대던 존재. 하지만 아기에서 아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면서 엄마는 점점 자식에게 손을 떼게 된다. 그러다 성인이 되면 엄연한 한 개체가 되어 살아간다. 이게 자연스러운 이치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품을 내어주고 지켜봐주는 것은 어느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통틀어 아름답게 묘사된다. 하지만 모정을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 걸까? 모든 모정이 다 아름다운 것일까? 소개하는 두 영화는 이 질문을 화두로 한다.

한국영화 〈마더〉(2009, 봉준호 연출)

 

 

 

읍내에서 약재상을 하며 아들(원빈 분)과 단 둘이 사는 엄마(김혜자 분)는 이미 성인이 됐지만 지능이 떨어지는 아들 때문에 늘 애를 태운다. 아들이 동네 양아치를 따라 다니며 술을 먹고 사고를 치면 엄마가 뒤에서 해결하는 식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녀가 살해 당했는데 살인범으로 아들이 지목된다. 엄마는 미친 듯이 아들의 무죄를 입증하러 다닌다. 그런데 다닐수록 아들에게 불리한 증거가 드러나고, 이를 덮으려다 엄마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야 만다.

영화는 맹목적이고 원초적인 모성을 드러내기 위해 아들을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표현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모성을 거둬야할 때를 맞지 못하고 다 큰 아들을 여전히 품안의 자식으로 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관객은 대놓고 손가락질을 할 수도 없다.

자기보다 키가 큰 아들을 물가에 내놓은 아기처럼 대하며 노심초사하는 어머니에게 관객은 감정이입을 하며 극이 흘러간다. 그러다가 아들이 무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관객은 흔들린다. 하지만 어머니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이제 증거와 증인을 은폐하는 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관객은 서서히 이성적인 판단으로 돌아선다.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이렇게 극의 후반에 드러난다. 아들을 위해, 이 세상의 단 한 사람을 위해 세상을 등지고 세상의 법과 싸우게 된 어머니. 상식과 도덕을 파괴하면서까지 지키려는 아들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었다.

〈살인의 추억〉, 〈괴물〉 등의 전작으로 ‘천재’로 불리던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서 전작과는 다르게 좁고 깊게 영화를 몰고 갔다. 어머니 역의 김혜자 배우는 이성을 잃고 자식을 덮으려는 어머니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다. 또 아들 역의 원빈 배우는, 이전까지 조각미남의 이미지를 버리고 첫 영화로 저능아 역할을 택했고 무난하게 해냄으로서 배우로서의 성공가능성을 보여줬다.

연출, 배우, 시나리오의 삼박자가 잘 조화돼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많은 상을 받았다. 특히 마지막에 넋이 나간 어머니가 들판에서 몸을 흔들던 장면은 표정이나 연출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으로 꼽힌다.

루마니아 영화 〈아들의 자리〉(2013,칼린 페터 네쩌)

 

 

 

 

 

이 영화에서는 사실 아들을 돌봐줘야 할 이유도 없다.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60세 생일을 맞은 어머니는 아들이 집에서 독립해 연락이 없다는 이유로 우울해한다. 어느 날 아들이 교통사고를 냈다는 소식을 듣자 나서서 아들 대신 일을 처리한다. 앞사람의 차를 추월하려다가 결과적으로 어린아이를 살해한 ‘과실치사’를 저지른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앞에서 운전한 사람에게 거짓증언을 사주하는 등 불법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이용해 경찰을 매수하는 일도 한다.

또 며느리가 없는 틈을 타 아들의 집에 몰래 가서 아들내외가 사는 모습을 훔쳐보기도 한다. 자식을 가진 이혼녀인 며느리가 못마땅하기 때문에 벌이는 일인데, 나중에는 남편과 이별하겠다는 며느리에게 자기 아들을 도와달라고 애원한다.

결국 이 어머니는 자신에게 그렇게 소중한 아들을 지키려는 데 몰두해, 아들이 죽인 소년의 장례식 날 부모를 찾아간다. 아들, 며느리가 함께 가지만 정작 아들은 들어가길 거부하며 차에 남고 어머니는 며느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간다. 어머니는 어이없이 죽은 소년의 부모 앞에서 자신의 아들이 어렸을 때 착했다든지 하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구구하게 늘어놓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에 관객은 어리둥절한다. 실제 아들을 잃은 유족 앞에서 자기가 아들을 잃은 것처럼 흐느껴우는 가해자의 어머니, 이를 어떻게 봐야할까.

늘 자신감에 차있고 상대방과의 기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어머니가 유일하게 무장해제하고 무너지는 모습에서, 아들을 잃은 것처럼 아들이 정서적으로 떨어져 나간 것을 아프게 생각하거나 걱정하는 감정이 읽힌다.

이 영화는 2013년 63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단순한 스토리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연출, 그리고 강렬한 어머니 역의 루미나타 게오르기우 배우의 연기가 잘 어우러졌다.

우리는 흔히 관세음보살을 어머니에 빗대곤 한다. 중생을 바라보는 자비의 마음이, 무조건적 사랑을 주는 어머니와 같다는 의미다.

하지만 자비의 마음은 대신 매를 맞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매를 맞는 자식을 지켜봐주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일 수 있다.

아무리 어머니의 사랑이 커도 자식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며,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사랑한다 해도 대신 성불할 수는 없다. 사랑한다면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넘어지는 것도 지켜보고 아픈 것도 지켜보는 것이 어머니의 역할이다.

박정미 | 자유기고가, hasukosu@gmail.com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