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원장이 탄 열차가 중국 대륙을 58시간이나 달려 베트남에 도착하였다. 그는 27일과 28일에 트럼프와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다. 물론, 북미는 오랜 동안 적대국이었다. 미국은 북한을 테러국으로, 북한은 미국을 언제든 평양을 폭격할 수 있는 깡패국가로 여겨온 만큼 불신을 떨쳐버리기에는 좀더 신뢰할 수 있는 조치와 공동체험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번 회담에서는 진전된 협상을 할 것이다. 1차 회담이 선언적이었다면, 이번 회담에서는 종전선언, 비핵화 로드맵, 북한에 대한 제재의 일부 해제 등 평화와 통일로 가는 구체적인 조치들이 취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접하며 불자는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할까. 모든 종교가 평화를 추구하지만, 불교는 그 가운데서도 으뜸이다. 불자는 아힘사(ahimsā)를 최고의 계율로 삼는다. 스님은 물속의 미생물마저 죽이지 않기 위해 여수낭에 걸러 물을 마셨다. 하나의 생명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서로 관계와 조건과 인과로 얽혀있다고 간주하여 무생물까지도 소중하게 여겼다. 불경은 어떤 경우에도 분노하지 말며, 심지어 팔다리가 잘리는 그 상황에서조차 자비와 인욕을 유지하라고 가르친다. 이 때문에 아힘사는 불살생을 넘어 비폭력 사상으로 확장한다. 거의 모든 갈등과 폭력의 근저에는 소유욕과 탐욕, 자신과 소속 집단에 대한 집착이 자리하는데, 붓다는 삼의일발(三衣一鉢)을 제외하고는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살며 매일 탁발하라고 이른다. 탐욕을 없애는 수행과 정진을 하여야 비로소 불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며,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에도 변화하여 무상(無常)하고 오온의 결합체로 무아(無我)하니, 자신에 대해서든, 생각에 대해서든 집착을 깨는 것이 지혜의 비롯됨이다.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전쟁과 학살도 서슴지 않는데, 불교는 부처마저 죽이라고 할 정도로 끊임없이 해체하고 극단을 지양하고 중도(中道)에 머물라 한다. 이처럼 불교는 어떤 종교나 사상보다도 평화의 지혜로 넘쳐난다.

그럼에도 극복할 것도 있다. 대다수 불자들은 마음의 평화만을 내세우거나 실천한다. 물론, 마음의 지극한 평화 상태는 열반이며, 불자의 목표는 무명(無明)에서 벗어나 삼독(三毒)을 깡그리 없애고 깨달음과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먼저 의혹과 삿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행(Śamatha)과 관행(Vipassanā)을 짝으로 부려서 온갖 사념과 망상, 번뇌를 떨쳐버리고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무분별지(無分別智)와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세친보살은 《불성론》에서 “지혜로 말미암아 나에 대한 애착은 버리고 큰 자비로 말미암아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일어나게 한다. 지혜로 말미암아 열반을 버리지 않고, 자비로 말미암아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원효의 진속불이(眞俗不二)론에 따르면, 설혹 내가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아직 부처가 아니며 고통과 무명 속에 있는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그 순간에 비로소 진정 부처가 된다. 《마하박가》 등 초기 경전을 보면, 붓다께서 사성제와 연기의 이치를 알고서 깨달은 자가 되었다. 문제는 그동안 고(苦)를 개인적인 것으로만 국한한 데 있다. 쉬바락사의 지적대로 개인적 고만이 아니라 사회적 고(social duka)를 없애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분단모순으로 말미암아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을 주변에서 많이 본다. 수십 년 동안 생이별을 하고 있는 남북한의 이산가족, 남북한 모두에서 이념이 다르다고 박해나 차별을 받는 사람들, 양승태 사법부에서 해산된 통진당의 당원들, 강정과 성산에서 평화를 외친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할 때 우리의 마음 또한 진정으로 평화로울 수 있다. 또, 갈퉁의 말대로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소극적 평화라면, 구조적 폭력을 제거하는 것이 적극적 평화를 구현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불자는 국가보안법 등 중생을 고통스럽게 하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인식을 하고, 고통을 받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에서 비롯된 분노를 표출하여 구조적 폭력을 줄이거나 없애는 실천을 해야 한다. 달라이 라마의 말대로, “평화는 자비심이 현현하는 것이다.”

이도흠 |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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