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에서 깨달음은 말을 듣고서 문득 체험하는 돈오(頓悟)이다. 그러면 말을 듣고서 문득 체험하는 돈오는 어떤 깨달음인가? 《육조단경》에서 육조 혜능이 말했다. “위없는 깨달음은 모름지기 말을 듣고서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無上菩提, 須得言下, 識自本心, 見自本性〕.”, “만약 자성(自性)을 알고서 한번 깨달으면, 부처의 지위에 도달한다.” 말을 듣고서 문득 깨닫는 것은 자기의 본래 타고난 마음을 아는 것이며, 또한 자기의 본래 타고난 본성을 보는 견성(見性)이다. 즉, 선에서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닫는 것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인 것이다.

육조는 다음과 같이 자신이 얻은 깨달음이 견성성불임을 말한다.

“오조(五祖)께서 《금강경》을 가지고 말씀해 주셨는데, ‘마땅히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는 구절에 이르자 저는 그 말씀을 듣고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온갖 법이 모두 자성(自性)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조께서는 제가 본성을 깨달았음을 아시고서는 곧 대장부요 부처라고 이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조가 가르치고 전하는 법도 당연히 견성성불인 것이다. 육조는 말한다. “도반들이여, 나는 홍인(弘忍) 화상이 계신 곳에서 한번 말을 듣고서 듣자마자 깨달아 문득 진여(眞如)인 본성을 보았습니다. 이리하여 이 교법(敎法)을 전해 주어, 도를 배우는 자로 하여금 문득 깨닫게 하여 각자 마음을 보고 스스로 본성을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육조는 <무상송(無相頌)>에서 “오직 견성법(見性法)만을 전하여, 세간에 나와 삿된 가르침을 부순다.”라고 말하여, 자신의 선(禪)이 곧 견성법임을 천명하였다. 육조가 전한 선은 곧 견성성불의 불법(佛法)인 것이다.

따라서 육조는 대중에게 설법을 하면서 대중이 자신의 말을 듣고서 견성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오늘 대범사에서 이 돈교(頓敎)를 말하니, 법계의 중생들이 말을 듣고서 본성을 보아 깨닫기를 널리 바랍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늘 자성을 본다면, 온갖 부처와 동일한 부류가 될 것이다. 우리 조사들께선 이 돈법(頓法)을 전했을 뿐이니, 자성을 보아 동일한 바탕이 되기를 서원하라.”

여기에서 육조가 돈교라거나 돈법이라고 말하듯이 육조의 선인 견성법은 또한 돈오법(頓悟法)이기도 하다. 견성성불이란 설법을 듣고서 문득 깨치는 돈오법인 것이다. 돈오법은 점수법(漸修法)에 반대되는 말이다. 장기간의 수행을 통하여 점차 깨달아간다는 단계적인 수행법을 점수법이라고 한다면, 깨달음에 목마른 사람이 선지식을 찾아서 그 가르침을 듣다가 한마디 말끝에 문득 깨닫는 것이 바로 돈오법이다.

육조의 선은 말을 듣고서 문득 깨치는 돈오법이다. 앞서 보았듯이 육조 문하의 모든 선사(禪師)들은 선지식의 말을 듣고서 문득 깨치는 돈오의 깨달음을 얻었다.

육조는 자신의 선이 수행법이 아니라 돈오법임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혔다. “지금 만약 돈교문(頓敎門)을 만난다면, 문득 자성을 깨달아 세존을 볼 것이다. 만약 수행을 하여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어느 곳에서 참됨을 구할지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마음에서 스스로 참됨을 볼 수 있다면, 그 참됨이 곧 부처가 되는 원인이다. 자성을 보지 못하고 밖으로 부처를 찾아 마음을 일으킨다면, 모두가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다. 돈교법문(頓敎法門)을 이미 남겨 두었으니, 세상 사람을 구원하려면 모름지기 스스로 돈교법문을 실천해야 한다.”

돈교법문에 대하여 육조는 이렇게 말했다. “자성을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닦으니(돈오돈수) 역시 점차(漸次)라는 단계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법도 세우지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이 사라졌는데 어찌 점차라는 단계가 있겠는가?”

이처럼 육조 혜능이 《금강경》을 듣고서 경험한 깨달음으로 실천하고 전한 선(禪)은 좌선(坐禪)이라든지 관법(觀法)과 같은 수행방법이 아니라, 가르침의 말을 듣고서 곧장 본성을 깨닫는 견성성불의 돈오법인 것이다.

김태완 | 무심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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