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율(持律)·지계(持戒)로 정진하라

 

출가수행자들이 삼보(三寶)의 하나로서 귀의와 공양·공경을 받게 되는 것은 청정한 계행에 근거한 수행을 하기 때문이다. 계와 율은 개인의 청정과 해탈, 그리고 승단의 청정과 화합을 실현하기 위한 출가자의 삶의 질서이고 수행의 내용이다. 2006한국교수불자대회에서 충남대 이평래 교수는 “불교에서의 교단은 쌍가(Sanga, 승단)라는 집단으로 스님들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수행하며, 어떻게 실천하고, 신도들을 어떻게 인도하느냐에 따라 불교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하였다. 요컨대 출가수행자의 철저한 구도정신과 계행(戒行)만이 한국불교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다는 의미다.
자운(慈雲, 1911~1992)스님은 한국 근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율사(律師)이다. 살아  생전 4만 8천여 권의 율서(律書)를 발간하였고, 1981년에는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참된 율사라면 일생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였으니 율사라는 호칭을 받기에 부끄럽다.”고 하였다. 이름 앞에 붙여진 화려한 허망의 실체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스님은 1911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15세 되던 해 어머니와 함께 갔던 오대산 상원사(上元寺)에서 이승에서의 남은 운명을 결정하였다. 은사가 될 혜운(慧雲)스님으로부터 “세속의 100년 3만 6000일보다 출가의 반나절이 더 낫다.(百年三萬六千日 不及僧家半日間)”는 청나라 순치 황제의 출가시를 듣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출가 이후 스님은 선교학을 바탕으로 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932년 범어사 강원에서는 대교과를 졸업하였고, 1934년 범어사에서 율사 경념(敬念)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스님은 이후부터 해인사 선원에서 안거(安居)수행을 시작하였으며, 용성선원·김용사·통도사 선원 등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오후불식(午後不食)을 지키며 깨달음을 뜰 안을 넘보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1938년 용성(龍城)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입실건당(入室建幢)하며 법맥을 이었다. 이것은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대상황과 당시 불교계의 현실에 따른 스님의 결정이었다. 특히 1939년에는 일제 식민지하에서 왜색화(倭色化)로 침체되고 있었던 한국불교를 중흥시키겠다고 발원하고 오대산 상원사에서 하루 20시간씩 100일 문수(文殊)기도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기도 99일째 스님은 ‘굳건히 계율을 지키면 불법이 다시 흥하리니 정진에 매진하라“는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기도 하였다.
일제 치하의 한국불교계에서 계율의 의미는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존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처대식육(妻帶食肉)하는 승려가 날로 증가하여 전 조선사찰이 부패되어 가는 점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습니다. 현금(現今)에는 처대승려가 날로 증가하여 전 조선사찰이 부패되어가는 점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습니다. 현금에는 처대승려가 조선 사찰의 권리를 장악한 까닭에 진실한 승려로 공익을 우선시하고 검소하거나, 계율을 준수하거나, 승속의 모범이 되는 년고납승(年高衲僧)과 수행납자(修行衲子)들은 자연히 쫓겨나 눈물을 흘리고 방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금후 이 사천대중이 어느 곳에서 편안히 지내겠으며, 또 불교의 잔명(殘命)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용성스님의 승려육식처대문제에 관한 탄원서 중에서 designtimesp=31527>

1920년대 일본유학승의 귀국으로 한국불교계는 큰 혼란을 겪는다. 승려가 처자식을 거느리는 풍조가 나타나 한국불교의 근간이었던 청정지계(淸淨持戒)의 정신이 세속의 유행에 따라 변질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스님의 100일 문수기도 역시 일신의 복락을 위한 것이 아닌 이 땅의 불교가 맞이하고 있는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 정통성을 계승하려는 수행자의 호법운동이었다. 이후 스님은 어려울수록 본분사에 충실하라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에 따라 계율을 지키고 연구하였다. 예컨대 스님은 대각사(大覺寺)에서 오부율장(五部律藏)과 주소(註疏)가 수록된 『만속장경(卍續藏經)』을 열람하고 본격적으로 율장 연구를 시작하였다. 더욱이 1948년에는 봉암사에서 처음으로 보살계 수계법회를 열었으며 대각사에서 『범망경』의 「사미율의」·「사미니율의」·「비구계본」·「비구니계본」 등의 간행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비록 스님이 수집한 자료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모두 잿더미가 되었지만, 수행자의 구도열은 꺾지를 못하였다. 다시 자료를 수집하여 부산 감로사에서 한글·한문본 율서 4만 8000여 권을 간행 유포하였다.
스님의 이러한 행적은 한국 근현대 불교사에서 계율의 실질적인 중흥을 의미한 것이기도 하였다. 계율에 대한 스님의 연구와 실천행은 불법의 숭고한 취지와 가르침이 급속도로 퇴색해가는 말법(末法)의 시대에 중생의 고통을 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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