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경》에서는 우리가 닦아야 할 수행으로 사마타·비파사나·우필차의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지(止), 관(觀), 사(捨)로 번역되는 이 수행의 삼총사는 지혜와 선정과 평등심으로 해석하며, 대열반에 들어가게 하는 중요한 수행이다.

어느 날 사자후 보살이 부처님께 사마타·비파사나·우필차를 닦아야 할 때를 질문하자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답하신다.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안락을 받는다고 교만을 내거나, 법을 설해준다고 교만을 내거나, 정근한다고 교만을 내거나, 이치를 잘 알아서 문답을 잘 한다고 교만을 내거나, 혹은 악지식을 가까이 하면서 교만을 내거나, 귀중한 물건을 보시한다고 교만을 내거나, 세간에 선공덕을 짓는다고 교만을 내거나, 세상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공경을 받는다고 교만을 내는 등의 경우에는 지혜(사마타)를 닦지 말고 선정(비파사나)을 닦아야 할 줄 알라. 이를 보살이 때와 때 아닌 것을 안다고 한다.

만일 보살이 부지런히 정진하면서도 아직 열반의 낙을 얻지 못하였거나, 이익을 얻지 못하여 후회스런 마음을 내거나, 근기가 둔해서 오근을 조복 받지 못하거나, 번뇌의 때가 치성하여 계율에 대해 의심이 일어나면 이런 때는 선정을 닦지 말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 이를 보살이 때와 때 아닌 것을 안다고 한다.

선남자여 선정과 지혜가 평등하지 못 할 때에는 사(捨)를 닦지 말아야 하고 두 가지가 평등하면 닦아야 하느니, 이를 이름하여 보살이 때와 때가 아닌 것을 안다고 한다. 보살이 선정과 지혜를 닦다가 번뇌가 일어나면 사(捨)를 닦지 말고 마땅히 십이부경을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며,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고 승가를 생각하고 계율을 생각하고 하늘을 생각하고 사(捨)를 생각해야 한다. 이를 평등심을 닦는 것이라 한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때때로 이와 같은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때 《열반경》의 법문은 조용히 앉아서 선정을 닦아 맑은 마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공부를 열심히 해도 근기가 모자라 답답할 때나 번뇌가 일어날 때에는 지혜를 닦으라고 한다. 또한 평등심은 선정과 지혜가 서로 평등하지 않을 때 십이부경을 비롯한 경전을 읽고 외우고 해설하며, 육념심(六念心)을 닦으면 안락의 열반에 들어간다고 밝히고 있다.

이 세 가지 수행은 항상 영원하고 미묘하고 제일가는 안락을 받는 수행이며, 여래의 깊고 비밀스런 이치를 깨닫게 하기 때문에 이를 닦는 사람은 안락을 받아도 기뻐하지 않고, 괴로움을 받아도 슬퍼하지 않고, 천상 사람이나 세상 사람들이 공경하고 찬탄하며, 생사와 생사 아닌 것을 분명하게 보고 법계와 법의 성품을 잘 알며, 몸에는 영원하고〔常〕, 안락하고〔樂〕, ‘나’〔我〕이고, 청정한〔淨〕 법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한다.

지관의 대가로 알려진 천태 지자 대사(智者大師)는 《마하지관》의 서두에서 “지관명정(止觀明靜)”이라 하였다. 곧 “지와 관은 밝고 고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종경록》에서는 이 지관명정을 “부처님의 마음의 작용”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지관을 닦아서 마음이 맑고 고요함을 얻어 대원경지 같은 마음으로 일체법을 비추어 보아 실상을 깨닫는 수행이라는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이 지관으로 평등심을 얻는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사마타·비파사나·우필차에 대한 해석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사마타란 산스크리트어 ‘śamatha’를 소리나는 대로 한자어(奢摩他)로 표현한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지(止)·적정(寂靜)이라 번역한다.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을 멈추고 평온하게 된 상태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한 끊임없이 대상에 연하여 좋은 생각 혹은 나쁜 생각을 쉬임 없이 일으켜서 심신을 번거롭고 어지럽게 만들므로, 이런 번뇌를 그치게 하는 것이 사마타다. 《열반경》에서는 능히 번뇌를 없애고, 능히 번뇌를 조복하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고요하다’고 번역하는데 신업·구업·의업의 삼업을 고요하게 하고, 오욕락을 멀리 여의게 하여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능히 맑게 한다’고 번역하는데 탐욕·성냄·어리석음의 혼탁한 법을 맑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마타는 번뇌 망상을 그치고 고요한 마음을 이루게 하므로 선정(삼매)의 모습〔定相〕이라 한다.

다음으로 비파사나(혹은 위빠사나)는 ‘Vipassanā’의 한자 발음(毘婆舍那)으로 ‘바르게 본다’, ‘분명히 본다’고 하여 세간의 진실한 모습을 바르게 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상에 대해서 두루 관찰하는 수행으로 경에서는 ‘능히 보고’, ‘차례로 보고’, ‘여러 가지 모습을 본다〔別相〕’고 하므로 이를 지혜의 모습〔慧相〕이라고 한다.

또한 우필차는 ‘Upekṣā’의 한자 발음(憂畢叉)으로 평등이라 이름하고, ‘다투지 않음〔無諍〕’, ‘관찰하지 않음〔不觀〕’, ‘행하지 않음〔不行〕’이라 한다. 우리 마음을 평등하게 유지하여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하므로, 평등심의 모습〔捨相〕이라 한다.

여기서 선정의 모습을 공삼매(空三昧)라고도 하며, 지혜의 모습을 무원삼매(無願三昧), 평등심의 모습을 무상삼매(無相三昧)라고도 한다. 보살이 이 선정을 닦을 때와 지혜를 닦을 때와 평등심을 닦을 때를 잘 알고 때 아닌 것을 안다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보리의 도를 행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경에서는 사자후 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이들 세 가지 수행(사마타·비파사나·우필차)을 하면 어떤 이익이 있는지 질문하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갖가지 이익이 있다고 설하였다. 생사의 인연이 없어져 남이 없고〔無生〕, 행위함이 없으므로 냄이 없으며〔無出〕, 업을 지음이 없으며〔無作〕, 내 집〔屋宅〕이라거나, 섬〔洲〕이라고 하는 집착된 소견에 들지 않고, 중생을 조복하여 귀의할 곳이라 하고, 도적을 깨뜨려 열반이라 하고, 번뇌의 불을 꺼 멸도라 하고, 각관을 여의어 열반이라 하고, 시끄러운 것을 멀리하여 고요하다〔寂靜〕 하고, 죽는 일을 끊어 병고가 없다〔無諸病苦〕고 하고, 온갖 것이 없으므로 있는 것이 없다〔無所有〕고 한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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