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때를 잘못 만난 천재

나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송익필(宋翼弼)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조선 중기의 학자 고청(孤靑) 서기(徐起)가 제자들에게 제갈량을 알고 싶으면 송익필(1534〜1599)을 보면 된다며 한 말이다. 제갈량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 하여 그에게 임진왜란을 맡기면 8달이면 난을 끝낼 수 있다고 하는 사람, 구봉(龜峯) 송익필. 그에 대해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은 “천지의 이치를 가슴속에 간직하였으니, 공자ㆍ맹자의 도(道)도 진실로 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천품(天稟)이 매우 높고 문장(文章) 또한 절묘했다.”고 칭송하였고, 택당(澤堂) 이식(李植) 또한 “타고난 자질이 투철하고 영리하여, 정미(精微)한 이치를 분석 정리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런 칭송과는 반대로 다른 한쪽에선 천하의 모사꾼, 천한 것 등등의 욕설에 가까운 말로 송익필을 비난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조선의 숨은 왕》이란 제목으로 그를 다룬 책이 출간되었다. 내용은 조선 중기 이후는 서인(西人)에 의해 좌지우지되는데, 그 배후에 송익필이 이른바 모주(謀主), 즉 모든 모략을 만들어낸 장본인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음모론과 특정인에 대한 저자의 부정적인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씁쓸하게 만들지만, 적어도 송익필이란 인물의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 해도 왕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영향력이 엄청났을까?

실제 송익필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숨은 왕까지는 아닐지라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주지하는 것처럼 서인의 정신적 지주이며 뿌리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인데, 송익필이 이이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형이 직접 편찬한 《순언(詢言)》을 보았는데, 재주를 부린 듯합니다. …… 주석은 또 견강부회하였습니다. …… 또 형이 《소학(小學)》에 대한 여러 학자의 주석을 모은 것도 역시 미진한 곳이 많습니다. …… 아마도 본뜻을 잃은 듯합니다. …… 《격몽요결(擊蒙要訣)》 가운데 세속의 예절과 관련된 곳에서는 저는 항상 불만의 뜻이 많습니다.1)

《격몽요결》은 1577년 이이가 42살에 지었다. 학문적으로 완숙의 경지에 들어섰을 때다. 율곡 이이가 누구인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병칭되며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한 대학자가 아니던가. 더구나 아홉 번 장원급제했다는 불세출의 천재이다. 그런 율곡에게 마치 하수에게 한 수 가르쳐주는듯한 편지를 보내고 있다. 자존심이 상했을 법한 이이는, 그러나 송익필의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이이의 글과 사상 속엔 분명 송익필의 생각이 숨어 있다.

어디 율곡의 사상뿐인가. 특히 조선 중기 이후를 결정짓는 예학(禮學)은 송익필이 기초하고 정리한 예학 위에 세워진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예학은 수제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으로 이어지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등 기라성 같은 학자와 정치인을 배출하며 도도한 흐름을 형성한다. 이는 실로 조선 유학의 성격과 정치적 지향점을 결정하는 큰 물줄기였다. 그러니 숨은 왕 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 그런데 왜 숨어야 했나?

2. 사노 송익필을 체포하라

선조 22년(1589) 12월 16일, 추상같은 어명이 내려왔다.

사노(私奴) 송익필을 체포하여 추고하라.

사노란 개인 소유의 노비를 말한다.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개인의 재산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일개 사노를 임금이 친히 지칭하며 체포할 것을 명령하는 전교는 분명 평범한 일은 아니다.

송익필이 사노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그의 외가와 관계된다. 그의 할머니 감정(甘丁)은 안돈후(安敦厚)의 비첩(婢妾)이었던 중금(重今)의 소생이다. 중금은 안돈후의 형님 안관후(安寬厚) 집의 여종이었는데, 인물이 반반했는지, 아니면 머리가 총명했는지, 안돈후가 그녀를 데려가 첩으로 삼는다. 그리고 중금에게서 태어난 감정을 잡과(雜科) 직장(直長) 송린(宋潾)에게 시집을 보낸다. 송린과 감정 사이에서 송사련(宋祀連, 1496〜1575)이 태어나고, 송사련은 양인인 연일 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어 4남1녀를 두는데, 송익필은 그 셋째 아들이었다.

송사련은 종5품 벼슬인 관상감 판관(觀象監判官)을 지냈다. 관상감 판관은 천문 기상을 관측하고, 사주와 일진을 보는 직업으로 상당한 공부가 선행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노비 출신이 이런 벼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안돈후 집안의 관대함에 힘입은 바가 크다. 당시는 이른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이라 하여 어미가 노비이면 그 자녀들은 노비 소유주의 재산이 되었는데, 안 씨 집안은 이런 노비제와 같은 여러 가지 차별적인 신분제에 대하여 매우 관대하였다. 그리하여 노비의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나아가 의술이나 천문학 등의 공부를 하게하여 비록 잡과이지만 관직을 갖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런 안 씨 집안의 은덕을 송사련은 배신으로 갚는다. 1521년 송사련은 처남인 정상(鄭瑺)과 함께 안처겸(安處謙)을 역모로 고변한다. 안처겸은 좌의정 안당(安瑭, 1460〜1521)의 아들이며, 안돈후의 손자이니, 송사련에게는 주인집의 적손이며, 비록 적서의 차별이 엄연해도 외사촌이었다. 후일 안씨 집안에서는 송사련의 어머니인 감정이 안돈후의 소생이 아니라고 하며 이런 혈족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여튼 송사련의 고변으로 안 씨 집안은 풍비박산된다. 안처겸과 그의 아우인 안처근(安處謹), 안처함(安處諴) 등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부친 안당과 함께 교형(絞刑)에 처해진다. 정승 집안인 안 씨 일가가 줄줄이 끌려나와 교수대에 매달리는 참혹한 일을 겪었던 것이다. 그 외 왕족인 시산정(詩山正) 이정숙(李正叔) 등 무수한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과 화를 당한다. 이를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고 한다.

안당은 조광조(趙光祖)를 발탁하고 그의 개혁정치에 힘을 실어준 명신이었다. 조광조의 개혁 상당부분이 안당에 의해 입안되고 시행된 것이었다. 하여 사림(士林)의 존경과 지지를 받던 인물인데, 조광조 일파가 제거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고 그 여파로 물러나 있다가 2년 만에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을 당한 것이다.

신사무옥은 기묘사화의 연장선에서 일어난다. 안처겸이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에 불만을 얘기하는 말을 듣고 송사련이 고변한 것이었다. 기묘사화와 마찬가지로 신사무옥 또한 남곤과 심정 등에 의해 남은 선비들이 화를 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사무옥을 신사사화(辛巳士禍)라고도 한다.

무옥을 일으킨 송사련은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며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르고, 안씨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아 평생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그의 무고는 그의 아들들에게 씻을 수 없는 형벌로 돌아왔다. 송익필 형제는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서도 평생 아버지의 짐을 지고 살아야만 하였다. 신사년을 기억하는 선비들은 송익필이 죽고 5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증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3. 파주 삼걸

신사무옥이 일어난 지 13년 후에 송익필은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발휘하여 7세에 이미 시를 지어 문명(文名)을 떨쳤다. 하지만 과거는 초시를 끝으로 더 이상 응시하지 않았다. 그가 과거를 보는 것 자체가 커다란 논란거리였기에 진즉에 포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파주의 구봉산(龜峯山) 아래에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길렀다. 그의 호 구봉은 이 산 이름을 본뜬 것이다.

당시 파주에는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과 이이가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특히 이이가 모친 신사임당의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고 있을 때, 성혼은 이이를 자주 찾아 인생과 그 이치를 논하곤 하였다. 두 사람은 성혼의 부친 성수침(成守琛)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혼과 이이는 당시 파주에 머물고 있던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을 사사하며 학문의 지평을 넓혀 갔다.

이 두 사람의 만남에 송익필이 참여하며 이른바 파주 삼걸(三傑)이 완성된다. 한 살 터울인 세 사람이 같은 시기에 파주에 함께 했었다는 이 우연이야말로 조선 역사의 필연을 이해하는 시발이다. 생각해보면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아름다운 세 젊은이의 만남이다. 조선 최고 명문 가문과 노비 출신의 젊은이가 모여 격의 없이 뜻을 토로하고 정을 나누었다. 송익필은 누구라도 그의 관직이나 신분을 나타내는 말로 부르지 않고, 언제나 자(字)로 불렀다고 한다. 이런 송익필을 기꺼이 벗으로 받아들이고, 때론 스승처럼 그의 말을 경청한 사람은 조선의 대학자 이이와 성혼이었다. 그들에게 신분적 굴레나, 가문의 귀천은 관심 밖이었다. 이런 젊은이들이 성장하여 나라의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함에 차별적인 신분제를 혁파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 개혁에 이이가 앞장서고 송익필이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고 하여, 이를 붕당(朋黨)의 출발로 보는 시각이야말로 기득권적 차별주의에서 나온 편견인 것이다.

4. 좌절된 개혁, 다시 노비가 되다

보다 공정한 나라를 만들려는 이이의 노력은 번번이 반대에 부딪혔다. 불공평한 조세제도나 불합리한 신분제 등등을 혁파하려는 시도는 좌절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이이는 선조를 다그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임금이 결단하여야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정은 비록 임금이 결단하여도 중신들이 반대하면 시행하지 못하였고, 중신들은 반대당의 주장은 일단 거부하고 보았다. 본격적인 붕당의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송익필은 이런 상황을 염려하여 이이에게 너무 임금을 몰아세우지 말라고 충고한다.

세상 구제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던 주자(朱子) 같은 인물도, 상소를 올리려다가 불태워 없애기도 한 것은 목적 달성은커녕 화를 불러올까 우려했기 때문이오.2)

구봉의 염려스런 충고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만언봉사(萬言封事)〉, 〈시폐상소(時弊上疏)〉, 〈시무6조(時務六條)〉와 같은 상소를 줄기차게 올렸다. 하지만 그 속에 담은 제도개혁은 결코 실행되지 않고, 오히려 반대파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조선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어 격렬한 정쟁에 빠져 있었다. 동인과 안씨 일가들은 율곡의 뒤에 송익필이 있다고 보고 시시탐탐 틈을 노렸다. 불행은 율곡의 죽음과 함께 찾아왔다.

이이는 49세에 죽었다. 과로사로 추정되는데,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어렸던 율곡이 가장 먼저 세상을 뜬 것이다. 율곡의 죽음은 송익필의 보호벽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동인들은 율곡이 죽자 서인의 영수인 심의겸(沈義謙)을 공격하여 끝내 실각시켰다. 그리고 창끝을 송익필을 향해 겨누었다. 동인은 안씨네를 끌어들여 송익필은 본래 안 씨 집안의 노비임을 주장하는 소장을 올리게 하였다.

사실 이 소송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이미 세대와 세월이 지나 송익필은 진즉에 양인이 되어 있었다. 이는 법으로 정해진 것으로 송익필이 다시 노비로 환천(還賤)하는 일은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안씨네로서는 억울함을 풀고 관작이 원상회복되는 것으로 끝낼 일이었다.

하지만 이발(李潑), 백유양(白惟讓) 등의 동인과 안 씨 후손들은 송 씨 집안이 양인(良人)임을 증명하는 문서를 모두 없애면서까지 송익필 형제들을 다시 노비로 전락시킨다. 송익필과 그의 아우 송한필은 세상을 속인 죄로 체포되어 죽도록 곤장을 맞고 내쳐졌다. 이제 안씨네가 들이닥쳐 노비로 끌고 갈 일만 남았다. 송씨네 가족 70여 인은 밤을 틈타 도망쳤다. 와중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송익필은 충청도로, 전라도로, 숨어 다니며 하루를 연명하였다. 그렇게 도망자의 신세로 산지 몇 년이 지났는지도 모를 때 아우 송한필의 비보를 듣는다.

한사람이 내 아우의 죽음을 전하며 人言吾弟死
살던 곳 동해 바닷가라 하네 地是東海湄
산 자 치고 누군들 죽지 않을까만 有生誰不死
네 죽음보다 더 슬픈 것 있으랴 爾死爲最悲
사 형제가 모두 백발이 되어 白頭四弟兄
쑥 봉우리 구르듯 각자 천리로 헤어졌네 蓬轉各千里
배곯는지 추위에 떠는지 알지도 못한 채 飢寒兩不知
오직 죽지 않은 게 희소식이었도다 所慶惟不死
……
너는 죽었는데 나는 묻어주지도 못하노니 汝死不我土
외로운 해골은 어느 골짝에 버려져 있는가 孤骨委何壑


〈운곡을 애도하며〔雲谷哀辭〕〉란 시이다. 운곡은 송한필의 호이다.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르는 아우의 죽음을 대하는 형의 슬픔이 절절하다.

5. 서른 밤에 하루 밤 둥근 달이 뜬다

세상이 다시 변하여 정여립(鄭汝立) 역모사건이 터졌다. 이 일을 기화로 동인들이 대거 제거되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벌어졌다. 천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동인들은 기축옥사의 배후에 송익필이 있다고 믿는다. 사실인지도 모른다. 당시 옥사를 다스렸던 송강 정철은 송익필의 벗으로, 그에게 도피처를 제공해 준 장본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철의 배후에 임금 선조를 배제하고 누구를 앉힌단 말인가. 기축옥사의 배후에는 선조가 있었다고 해야 정답일 것이다.

송익필은 도망 다니면서도 제자들을 길렀다. 일일이 열거하기가 벅찰 정도로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그의 제자들 중에 이순신(李舜臣), 곽재우(郭再祐), 조헌(趙憲) 등은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우고, 김류(金瑬), 이귀(李貴), 이서(李曙) 등은 인조반정의 공신이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확실히 서인의 장기 집권 체제로 개편된다. 그리고 이런 서인들에게 송익필은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 한 개인에 의해 좌우되었다면, 이 개인은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초능력자이거나, 조선이란 나라가 인재라곤 없는 작은 동네 정도의 나라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그렇게 허술한 나라도 아니었고, 인재 또한 적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한 뛰어난 개인을 근거 없는 신분적 차별주의로 배척한 사람들이나. 이런저런 불합리한 제도로 묶어 놓은 국가가 문제일 것이다. 무엇이 먼저 잘못된 것인지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개인인가? 아니면 불합리한 제도를 만들고 존속시키는 국가인가?

달을 보며〔望月〕

둥글지 않을 땐 언제나 더디게 둥글다고 한탄했는데 未圓常恨就圓遲
둥글어 지고 나선 어찌하여 이리 쉽게 기우는가 圓後如何易就虧
서른 밤에서 둥근 달은 하루 밤이러니 三十夜中圓一夜
백년 인생에 심사 또한 모두 이와 같으리 百年心事總如斯


송익필 형제를 체포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갔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도 광주로 가는 길에 보름달을 보며 지은 시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제도는 없다. 조선의 노비제만 해도 종부법(從父法)과 종모법(從母法), 즉 아비를 따를 건지, 어미를 따를 건지 수시로 바뀌었다.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제도는 바뀌었고, 바뀐 제도에 따라 개인의 삶이 결정되었다. 따지고 보면 양반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노비제는 바뀌었다. 더 많은 노비를 원할 때는 종모법을 따르고, 더 많은 세금과 부역을 원할 때면 종부법을 따랐다. 그 와중에 소수의 양반 기득권층은 자기 친 자식마저도 노비로 만들었다. 종모법을 따르면 그렇게 된다.

조선은 같은 민족을 노예로 부려먹은 나라였다. 단지 죄지은 자만을 노예로 삼은 게 아니라, 자기 자식도 노예로 만든 야만족의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5백년을 넘겨 지속되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송익필은 이런 야만의 나라에 태어나 천부의 재능을 마음껏 펴보지도 못한 채 죽은 한 사람이었다. 긴 역사 속에서 보면 그는 하필이면 캄캄한 그믐에 태어나 빛다운 빛 한 번 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진 것인지 모른다. 조선을 비껴서 태어났더라면 불세출의 영웅이나 최고의 현자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한 때 파주에서는 송익필, 성혼, 이이가 만나 하ㆍ은ㆍ주(夏殷周) 삼대(三代)의 이상 국가를 꿈꾸고 설계하였다. 이들은 신분의 귀천도, 가문의 존비도 따지지 않고 다만 같은 시대를 살며, 시대의 아픔을 나누었다. 그들의 우정은 서로를 일깨워주고 서로를 키워주며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다. 서른 밤에서 하루 밤 보름달처럼 그렇게 밝게 어둠을 비추었다.

주) -----
1) 장주식 지음 《삼현수간(三賢手簡)》.
2) 이종호 지음 《구봉 송익필》.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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