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6번째 장편 영화 <버닝>(한국, 2018)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만들었지만 기본적인 줄기만 빌렸을 뿐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원작이 단절된 인간관계를 통해 존재의 공허함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영화는 한국적 리얼리즘을 추구했습니다. 영화는 ‘종수’, ‘해미’, ‘벤’ 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갖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세 젊은이를 통해 실망스러운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한국사회는 양극화가 심각한 편입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많은 사람과 빚만 잔득 물려받은 사람, 그들의 삶은 너무나 판이합니다. 그런데 양극화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을 섬뜩한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권태와 허무로 시들어가고, 가난한 사람은 가진 자에 대한 질투와 분노로 파멸합니다.

영화 <버닝>의 벤(스티븐 연)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반포에 있는 최고급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으며 포르셰 고급차를 운전하고, 부유면서도 지적으로 보이는 친구들이 있고, 화목한 가족도 있으며, 잘생긴 외모와 매너까지 갖춘 사람입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노는 것이 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입니다.

어떤 결핍도 보이지 않는 그의 유일한 결핍이라면 권태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가슴이 뛰는 일을 원하는데 어떤 것에서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대마초를 피워도, 예쁜 여자를 만나도, 친구들과 함께 모임을 가져도, 그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지겹기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살인을 선택했습니다. 살인은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고급차를 몰고 잘생기고 친절한 그가 여자를 만나는 일은 정말 쉬웠습니다. 그는 그 여자들을 유인해서 살해했습니다. 두 달에 한 번씩. 그는 연쇄살인자였던 것입니다. 살인을 하는 순간 그의 심장은 뛰고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일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살 가치가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현실에 놓여 있으며 본인들도 죽고 싶어 한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죽고 싶어 하는 여자를 죽이는 게 뭐가 문제가 되냐는 듯 그는 살인을 하고도 감정의 동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행위가 범법 행위인 걸 알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가 고른 여자들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해도 그 누구도 찾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벤은 연쇄 살인자가 될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인물입니다. 뭔가 재미있는 것을 추구하고, 거기다 양심도 없으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도 없으니 연쇄살인자가 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이런 인물을 우리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에서 만났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돌연변이 같은 이 범죄자는 감정도 도덕도 없으며 인간의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괴물 안톤 쉬거가 돈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면 <버닝>의 벤은 돈에 욕망을 갖지 않아도 될 만큼 부모로부터 넉넉한 환경을 부여받았습니다. 풍요에 권태를 느꼈고 그래서 찾아낸 것이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신을 위해서 젊은 처녀를 재물로 바치는 것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원시 종교처럼, 벤은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된다는 오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해미(전종서)는 가끔씩 길거리에서 나레이터모델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지만 대체로 돈이 없습니다. 2평 남짓한 방은 북향이라 하루에 햇빛이 한 번 정도 들어오는데 그것도 남산 타워에 반사된 빛이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 금세 사라질 정도로 어둡고 습한 공간에서 살았습니다. 벤의 부엌보다도 작은 방에서 살고 있는 그녀는 친구도 없으며 가족과도 연락이 끊겼고, 사람이 나타나면 몸을 숨기는 고양이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벤은 해미의 삶을 무가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농촌들판에 흉물스런 몰골로 서있는 폐비닐하우스처럼 그녀의 삶도 그에게는 일찍이 사라져야 할 그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을 위해서도 그것이 좋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처럼 그녀를 죽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미는 그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고향 친구인 종수(유아인)가 본 해미는 보일러실에서 떨고 있는 새끼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와 키울 정도로 자비심 있는 사람이고 비록 지금은 귤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잊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리틀 헝거지만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존재론적 의문을 탐구하는 그레이트 헝거를 꿈꾸는 인물입니다.

벤의 생각과 달리 그녀는 죽고 싶지도, 죽어야 할 만큼 무가치한 삶을 살고 있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판단하는 것은 벤이었고, 그것은 벤의 시각이었으며, 또한 이것은 자본주의적 시각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을 물질적인 소유의 측면에서 판단했을 때 갖지 못한 사람은 인간의 가치도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벤은 어쩌면 상징적 인물인지도 모릅니다.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는 지금 한국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미와 같은 부류, 부모님에게서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한 부류는 어떤 보장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직업을 가질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나레이터모델이나 택배회사의 잡역부로 내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람들과 관계도 맺지 않고 살아갑니다. 토굴 같은 어둡고 좁은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뿐입니다. 사람과는 단절된 채 그저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배워온 춤인 리틀헝거처럼 굶주림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벤과 같은 부류, 부모에게서 많은 것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욕망이 부재합니다. 그들은 욕망을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권태를 느낍니다. 욕망이 없는 삶엔 권태가 생겨나고, 그들은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미를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벤은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이렇게 많이 가져도, 너무 없어도 문제인 것입니다. 한 쪽으로 돈이 너무 몰렸고, 그렇게 분배가 제대로 안됐기에 둘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한국사회라고 이창동 감독은 진단하였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