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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불교개혁운동의 전개 ①
원종, 왜색 탈피 기대와 달리 초기부터 친일
2019년 01월 28일 (월) 16:15:00 한국불교선리연구원 .

불교개혁운동의 전개 ①1)

   
▲ 이회광.
1910년 12월 8일 밤, 만해 스님은 불교개혁사상이 담긴 《불교유신론》 원고에 최종적으로 마침표를 찍고 백담사를 떠났다. 그가 백담사를 떠난 이유는 원종(圓宗)의 ‘조동종 맹약’ 때문이었다. ‘조동종 맹약’은 한국근대불교의 최초 종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불교 성향이 강했던 원종과 일본불교 조동종(曹洞宗)간의 비밀조약 사건이다. 1910년 10월 초에 원종의 대표인 해인사 승려 이회광이 일본불교 조동종의 본부를 찾아가서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을 무시한 비밀조약을 맺고 돌아온 것이다. 이러한 이회광의 행보에 분노한 경상도와 전라도지역의 사찰은 조동종 맹약체결을 반대하는 집회를 준비하였다. 만해 스님도 이 소식을 듣고 한국불교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찾는 것에 동참하기 위해 《불교유신론》의 초고를 상좌인 이춘성에게 맡기고 초겨울, 백담사를 떠나 전라도로 향하였다.

이번 장에서는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숭유억불 정책으로 천대와 멸시를 받아왔던 조선불교가 구한말에 나라로부터 종단을 인가 받기 위해 조동종과 비밀조약까지 맺어야 했던 시대 상황과 그에 대항하여 임제종 설립, 사찰령 반대운동, 선맥 계승운동, 교단 개선운동 등 만해 스님을 주역으로 일어났던 불교개혁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종단의 진출과 도성출입금지 해제

1880년대 당시 일본불교는 메이지유신 시대의 ‘폐불훼석(廢佛毁釋)’의 법난을 겪으면서 국수주의적 색채가 강화되고, 이어 일본 침략세력과 함께 이 땅으로 밀려왔다.2) 일본불교의 조선개교(朝鮮開敎)는 1877년 9월 28일 부산에 도착한 일본승려인 오쿠무라 엔신에 의해서 시작됐다. 그는 당시 일본 본토의 정치권과 결탁해서 한국 침략의 첨병(尖兵) 구실을 했다.

일련종(日蓮宗)에서도 적극적이었다. 일련종에서는 당시 조선의 승려 가운데 포교를 감당하기에 적당한 준재(俊材) 16명을 선발해서 일본에 유학시킨 이후 20여 명의 조선승려에게 학자금을 대주었으며, 그 기간도 짧게는 1, 2년에서 길게는 6, 7년에 이르렀다. 또한 이들은 조선을 위해 포교하는 것이 일본 불교도의 의무라는 명분으로 자국의 침략정책에 편승하여 침투해 들어 왔다. 일련종에서는 포교의 일환으로 재원을 키우는 방법 이외에 ‘저락(低落)된 한승((韓僧)의 지위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얻었다.

조선왕조시대의 한국불교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성리학적 국시에 밀려나 핍박과 침탈의 수난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승려는 잡역에 시달려야 했을 뿐만 아니라 양반과 이속(吏屬)으로부터 갖은 멸시와 수탈을 당해야 했다. 이렇게 한국불교는 수백 년에 걸친 수모와 천대를 받아왔기에 ‘조선불교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켜 놓아야 한다’는 일련종의 포교방략은 시의적절했다. 이를 위하여 ‘도성출입금지’등의 악법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본의 불교인들은 이 ‘입성해금(入城解禁)’ 문제를 계기로 조선승려의 환심을 얻고, 나아가서는 일본불교 침투에 보다 나은 가능성을 열어 놓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일본 일련종의 승려가 조선승려의 ‘입성해금’을 김홍집 내각에 건의한 결과 고종32년(1895년) 3월 29일자로 승려의 도성출입이 허가되었다.

이처럼 개항기 일본불교가 조선에서 한 포교는, 메이지유신 초기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일본 불교계가 정치권과 타협한 결과였다. 바꿔 말해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침략에 앞서서 불교가 제국주의 첨병으로서 포교사들을 한국에 파견하여 풍속을 연구하고, 언어와 정서를 익히고 또 재한 일본 거류민들에 대한 적대 감정을 조정해 융화시키면서 포교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3)

‘입성해금’을 일본 승려가 해결함으로써 한국불교교단은 일본 불교인들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사실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 본다면, ‘입성해금’ 문제는 일본 승려 요청이 없었더라도 문호개방과 더불어 천주교와 개신교의 포교 자유가 이루어짐에 따라 목전에 다가온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억압을 받았던 조선불교가 일본인에 의해 변화가 시작되자 조선 승려들은 결국 국권회복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도성출입금지 조치가 해제된 후 교단 개혁 운동이 활발해졌고, 대표적인 예가 경허 스님이 주도한 정혜결사(定慧結社)다. 이로 인해 만해 스님의 언급처럼 “오랫동안 끊어져 있던 선맥(禪脈)이 1879년 경허성우의 오도(悟道)를 계기로 다시금 재생된 것이다.”4) 경허 스님의 정혜결사는 1899년부터 1903년에 영·호남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선(禪)을 중흥하여 불교의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수행 분위기와 이타(利他) 정신을 살리기 위해 참여와 대중의 화합을 강조하였다. 그는 역사적 전통을 중시하였는데, 그의 정혜이념과 개혁적 특성, 공동체 운동의 특징은 보조사상을 계승하고 있었다.5)

경허 스님의 결사는 선학원 창립과 활동의 사상적 배경이 되고 있다. 선학원은 일제의 침략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불조(佛祖)의 정맥(正脈)을 계승하고자 했던 선풍운동으로, 경허 스님의 공동체 운동의 이념을 계승하여 선의 대중화운동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942년 선학원은 경허 스님의 문집인 《경허집》을 발간하였고 당시 전국의 선원이 이에 동참했다. 이것은 1920년대 이후 한국의 근대불교가 경허의 사상으로부터 영향 받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의 불교관리 정책과 원흥사 창건, 그리고 친일적 성향의 원종

한편 대한제국 정부의 불교 관리 정책도 시작되었다. 전국의 사찰을 통괄할 수 있는 중심사찰을 세워 상실된 교단을 정비하고 잃어버린 승직을 제정하였다. 1899년에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우고 1902년에는 그 안에 궁내부 소속의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를 설치하였다. 사사관리서는 한국불교를 일본불교로부터 보호하고, 한국불교계를 통합·정리한다는 목적에서 설립된 것으로, 이를 위해 36개조로 된 〈국내사찰현행세칙〉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불교정책은 조선조 배불과는 다른 대한제국 정부의 전향적 인식을 보여준다.

원흥사 창건으로 교단이 정비되고 승직이 제정되는 등 불교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즉 교육을 통한 불교계의 일신(日新)과 종단의 부흥 그리고 도심포교의 시작은 한국불교가 근대로 전환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원흥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홍월초, 이보담 등은 불교계의 근대화를 도모하기 위해 일본의 발달된 포교방식을 도입하려 하였고, 정토종 이노우에 켄신(井上玄眞)의 영향을 받아 1906년 2월 19일에 불교연구회를 설립하였다. 불교연구회 회장으로 화계사의 승려 홍월초를 선출하고 본부를 원흥사에, 지부를 지방 각 사찰에 두었다. 또한 불교계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명진학교’를 설립하여 승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 포교인재를 양성하려 하였다.

불교연구회는 학교를 설립하고 신학문 연구를 통하여 불교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대중들은 왜색을 탈피한, 대한제국 불교에 맞는 실질적인 교단 통합기구의 필요성을 기대하였다. 이 기대에 부응하여 1908년 3월 6일 원흥사에서 각 도 사찰 대표자 52명이 모였다. 이날 회의에서 원종(圓宗)이라는 새로운 종명을 채택하고 교단 통합기관인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하였고, 이회광이 대종정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원종은 설립 초기부터 친일적인 면모를 강하게 띠었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이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였을 때, 이회광은 일본불교와의 합병으로 대한제국의 불교가 설 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조동종과 합병 문제를 의논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본불교 조동종은 대한제국의 불교를 동등한 자격이 아닌 조동종에 예속시키고자 일방적인 ‘연합맹약’ 7개조를 체결하였다. 연합맹약의 주요 내용은 대한제국의 사찰을 조동종의 포교활동에 이용할 뿐 아니라 대한제국의 청년승려를 일본의 승려로 만들고자 하였다. 또한 조동종이 대한제국에서 교세를 확장하는 데 원종이 협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조동종의 포교사를 초빙하여 그들이 지정하는 곳의 수사(首寺)나 혹은 여타의 사원에 숙사(宿舍)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원종의 종무 제반사항에 조동종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조동종의 고문을 두도록 명시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조약을 이회광은 국내의 승려와는 아무런 상의 없이 독단으로 체결하고 돌아와서 전국 주요 사찰을 순방하면서 일본에서의 활동을 보고하였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강조하면서도 7개 항의 조약문서는 보여주지 않고, 다만 일본의 조동종과 대등한 관계에서 제휴하는 조약을 체결했으니 동의해달라고 했다. 대부분의 사찰은 내용도 모른 채 무조건 찬성에 날인하였다.

이회광을 중심으로 한 원종의 행동은 1910년 12월경 원종 종무원 서기가 조약의 전문을 통도사에 전하면서 곧 전국에 알려져 많은 승려들을 분노케 했다. 그리하여 박한영, 진진응, 한용운, 오성월 등이 중심이 되어 경상도와 전라도에 있는 각 사찰에 통문을 돌려 이회광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종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주) -----
1) 강미자, 《한용운의 불교개혁운동과 민족주의운동》, 경성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참조.
2) 정광호, 〈명치불교의 Nationalism과 한국 침략〉 《인문과학연구소 논문집》 14, 인하대, 1988.
3) 김순석, 〈개항기 일본 불교 종파들의 한국 침투〉, 《한국독립운동사연구》8집, p.136.
4) 한용운, 〈경허선사약보(鏡虛禪師略譜)〉, 《경허집(鏡虛集)》, 1943, pp.1~2.
5) 김경집, 《한국근대불교사》, 경서원, 2000,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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