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 시대에 선종이 발생하여 크게 부흥할 때에 나타난 수많은 선사들의 깨달은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조당집》이나 《전등록》의 기록을 보면, 선사들은 모두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달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랜 수행의 끝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말을 듣고서 문득 깨닫는 것이다.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닫는 것을 당시 표현으로 “언하대오(言下大悟)” 혹은 “언하변오(言下便悟)”라고 한다. 우선 중국 선종의 실질적 개창자인 육조 혜능(六祖慧能)의 이야기를 적어 놓은 《육조단경》에서 깨달음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자.

오조는 신수의 게송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위없는 깨달음은 모름지기 말을 듣고서 얻어야 한다〔無上菩提, 須得言下〕.” “마땅히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는 《금강경》의 구절을 듣자마자 혜능은 크게 깨달았다〔能言下大悟〕. 혜능이 말했다. “좋다고도 생각하지 말고, 나쁘다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러한 때에 어느 것이 당신의 본래면목입니까?” 혜명은 이 말을 듣자마자 크게 깨달았다〔惠明言下大悟〕. 혜능의 문인 법해는 말을 듣자마자 크게 깨달았다〔言下大悟〕. 혜능의 문인 법달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듣자마자 크게 깨달았다〔言下大悟〕.

오조의 가르침이나 혜능의 깨달음이나 혜능의 제자들의 깨달음이 모두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달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닫는다는 것은 어떤 깨달음인가?

오조홍인이 하루는 문인들을 불러 모아 말하였다. “삶과 죽음의 일이 큰데도, 그대들은 종일 복(福)만 구하고 삶과 죽음의 괴로운 바다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구하지는 않는구나. 만약에 자성(自性)에 어둡다면 복으로써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 생각으로 헤아리면 쓸모가 없다. 자성을 보는 사람은 말을 듣자마자 곧장 보아야 한다〔見性之人, 言下須見〕. 만약 그렇게 본다면, 칼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돌진하더라도 역시 자성을 볼 것이다.”

진여자성을 보는 견성을 이루어야 삶과 죽음이라는 번뇌로부터 해탈하는데, 견성은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말을 듣고서 곧장 성취하는 것이다. 그렇게 견성한다면 전쟁을 치루는 극히 위험한 상황에서도 견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확고부동함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육조단경》에서 혜능은 말하기를, 오조는 다만 견성을 말할 뿐인데, 견성이란 불이중도(不二中道)에 통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스승의 말을 듣고서 곧장 분별을 벗어나 불이중도에 통달하는 불가사의한 체험이 곧 견성이고 깨달음(성불)이다. 선에서 깨달음은 이렇게 성취되는 것이다. 말을 듣고서 곧장 견성한다는 혜능의 언급을 몇 가지 더 소개한다.

혜능이 말했다. “여러분, 나는 홍인 화상이 계신 곳에서 한번 말을 듣고서 듣자마자 깨달아 문득 진여본성을 보았습니다〔一聞言下便悟, 頓見眞如本性〕.”, “오늘 대범사에서 이 돈교(頓敎)를 말하니, 법계의 중생들이 말을 듣고서 본성을 보아 깨닫기를〔言下見性成佛〕 널리 바랍니다.”, “참됨도 없애고 허망함도 없애면 불성을 보니〔卽見佛性〕, 말을 듣고서 곧장 불도가 이루어집니다〔言下佛道成〕.”, “말을 듣고서 곧장 견성하면〔言下見性〕, 비록 나와 천리를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마치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말을 듣고서도 깨닫지 못하면〔言下不悟〕, 얼굴을 마주보고 있어도 천리나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모든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을 마땅히 몽땅 없애야 한다. 이름 붙일 만한 이름이 없는 것을 일러 자성이라 하고, 둘 없는 자성을 일러 실성(實性)이라고 한다. 실성 위에 모든 가르침의 문을 세우니, 말을 듣고서 곧장 스스로 보아야 한다〔言下便須自見〕.”

깨달음은 곧 분별할 수 없는 불이법(不二法)인 자성을 보는 견성(見性)이다. 견성이 곧 깨달음을 이루는 성불(成佛)인 것이다. 선(禪)은 가르침의 말을 듣고서 문득 견성하는 돈오(頓悟)이지, 차근차근 수행해 나아가는 점수(漸修)가 아니다. 《육조단경》에서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김태완 | 무심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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