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의 죽음으로 많은 국민들의 가슴이 아프다. 지난 해 12월 11일에 스물 네 살의 꿈 많던 청년, 하청업체의 노동자 고 김용균이 회사가 돈 몇 푼 아끼려고 안전수칙을 어기고 안전장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컨베이어 벨트에 말려 몸이 눌리고 분해되어 죽었다. 이후 그에 대한 추모와 그를 죽인 자들과 제도에 대한 분노가 이어졌고, ‘제2의 김용균’을 막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오늘까지도 ‘죽음의 외주화’를 막을 제도 개혁은커녕 진상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죽어도 죽지 못한 채 장례식을 미루고 지난 1월 22일에 시신을 서울로 옮겼다. 이틀 뒤인 24일에 백기완 선생을 비롯하여 학계, 예술계, 종교계 등 시민사회 원로들이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였으며, ‘태안화력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고 김용균 진상규명 및 책임자처벌 시민대책위원회’의 대표들은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하였다.

27일은 그의 49재일인데, 우리 불자들은 어떤 생각과 태도를 취하여야 할까. 김용균을 죽인 것은 자본과 정권, 신자유주의 체제라고 하면 불자들은 과격하게 생각한다. 필자가 희망버스에 참여할 때 한 불자가 내게 “지식인으로서 참여하는 것은 옳을지 모르지만, 분노를 하는 것이니 불자로서는 옳지 않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팔다리를 자르더라도 자애를 유지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불자라면 기도나 할 일이고 참여한다면 불자를 포기해야 하는 딜레마를 해결하려고 오랜 동안 경전을 뒤졌지만 그 어떤 경전에서도, 그 어떤 논문에서도 분노를 긍정하는 글귀를 찾을 수 없었다. 이를 학회 회장을 할 정도의 위상을 가진 서양 철학자에게 이야기했더니 자신이 불교에 매료되어 경전을 읽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이제 불교에 대한 관심을 끄겠다고 답하였다.

연기와 업의 원리만 적용해도 나는 고 김용균에 침묵할 수 없다. 나와 김용균은 무수한 연관관계와 조건과 인과 속에 있다. 그에 대한 업은 내 업이기도 하다. 설혹 내 업을 다 풀었다고 하더라도 사회의 구성원인 내게 공업(共業)이 남아 있다. 불자의 목표는 위로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주지하듯, 《유마경》에서는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고 하였다. 김용균과 같이 죽어가는 이들에 대해 자비심을 갖는 것은 불자로서 타당한데, 그를 죽음으로 몰아놓은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제도 등 구조적 폭력에 대해 분노하면 불자가 아니란 말인가. 요한 갈퉁의 지적대로 구조적 폭력을 없애는 것이 적극적이고 진정한 평화를 달성하는 길이다. 《대방편경》을 보면, 한 선원이 499명의 선원을 죽이려고 하자 선장은 세 차례나 그러지 말라고 그 선원을 설득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자 그를 죽여 499명을 살리고 그 사람의 업을 대신 받는 선택을 한다. 그 선장이 바로 부처님의 전생이었다. 이를 근거로 필자는 ‘정의로운 분노’ 또한 타자의 입장에서는 이데올로기일 수 있어 옳지 않지만, 나보다 약한 이들의 고통을 내 병처럼 아파하여 내는 ‘자비로운 분노’는 불교 교리에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자 어떤 학자는 그 선장은 부처라는 조건에 있었기에 분노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고 중생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하지만, 불자의 목표는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며,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을 구제하는 그 순간, 약자의 고통에 동체대비의 자비심을 내어 자신의 몸을 바치는 그 순간에 그는 부처가 된다. 이것이 바로 진속불이(眞俗不二)다.

누구나 짐승 같은 놈이라고 비난을 하면 발끈할 것이다. 우리가 짐승이 아니라면 매일 그 얼마나 인간다운 본성을 구현하고 사는가. 인간이 짐승과 가장 다른 점은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고, 이것이 자비의 요체다. 전등을 켤 때마다 그 전기에 김용균과 같은 이들의 피와 생명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한 번 쯤 하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제2의 김용균이 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는 것이 인간의 길이고 부처의 길이리라.

이도흠 |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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