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20세기 초, 숨 가쁘고 격변하는 시대 상황은 호기심과 도전 정신 그리고 의인 걸사의 포부를 지녔던 한용운으로 하여금 다양한 삶의 경험을 요청하였다. 그는 1905년 27세에 정식으로 출가한 이래 1944년 66세의 일기로 입적할 때까지, 근 40여 년간 선사로든 거사로든 수행자로서의 일생을 산 불교인이자 종교인이었다. 1933년부터 심우장(尋牛莊)에 기거한 10여 년의 삶 또한 실천적 수행의 고삐를 놓지 않고, 대승 불교적 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수행인의 삶이었다.

한용운의 일생은 산과 저자거리를 종횡무진 오가며, 자신의 내적 체험 및 성찰을 사회 현실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때론 저술가로, 운동가로, 문학가로 변신하며 각고의 노력을 경주한 삶이었다. 항일 독립운동, 불교개혁 운동, 문학 활동 등 그 모든 행위가 바로 한용운에게는 종교 수행의 여정이었다.

한용운의 불교 내 외적인 다양한 활동과 업적의 근원적 힘은 불교 수행자로서 그의 종교 체험과 종교 사상 그리고 실천적 종교 수행에 기인한 것이다. 이 셋은 시대 상황과 역사의 흐름에 따라 상호 영향을 미치며 변화, 발전, 성숙해 나갔다. 그러므로 종교인이자, 대승 불교 수행자로서 한용운을 바라볼 때, 그의 다채로운 행적들에 대한 논리적 해석 틀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 불교 개혁가, 항일 독립투사 그리고 문학가로서 한용운의 업적에 주목한 연구는 많이 시도되어 왔다. 하지만 순수한 종교인으로서 한용운의 면모와 종교 사상에 대한 심층적 연구는 아직 미비한 수준이다. 출가 동기의 모호함과 우연성에 비해 너무나 뚜렷한 독립투사로서의 혁혁한 공적, 《님의 침묵》으로 대표되는 탁월한 문학적 소양, 불교 개혁가의 면모 등으로 인해, 승려로서 한용운의 모습은 묻혀 있거나 그저 하나의 사회적 신분 정도로 여겨져 그 중요성이 별로 부각되지 못한 실정이다.

한용운은 불교 내적으로 논란의 소지를 다분히 가진 《조선불교유신론》의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개혁 사상으로 인해 불교 개혁가로서의 모습이 많이 부각되어 왔다. 하지만 한용운의 심층적 내면의 정체성은 철저한 불교 수행자였음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에 《조선불교유신론》에 드러난 불교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불교유신론》은 1910년 12월 8일 백담사에서 탈고하고, 1913년 5월 25일에 간행된 한용운의 첫 저서이다. 한용운이 역사적 정황이나 시대 조류에 따라 현실적으로 대응해 나갈 때마다 네비게이션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 사상적 기본 골격이었다. 즉 《조선불교유신론》은 한용운 사상의 개론서이자 입문서라 할 수 있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불교 교리는 종교적, 철학적 성질을 모두 갖추고 있어, 현재 및 미래의 도덕과 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착실히 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불교가 종교이면서 철학이요, 철학이면서 종교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불일(不一)과 불이(不二)의 세계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 인식하였다. 이러한 불교 논리를 철저히 인식하고 있던 한용운은 불일(不一)과 불이(不二)의 두 차원을 넘나들며 성(聖) 속(俗)의 변증법적인 삶을 살았다. 불일(不一)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날이 경험하게 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불교적 해답을 모색하기 위해 불이(不二)의 세계를 치열하게 궁구하였던 것이다.

불교에 대한 이런 확신 하에 한용운은 불교의 주의를 평등주의와 구세주의로 보았다. 평등주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근세의 자유주의(自由主義)와 세계주의(世界主義)가 사실은 평등한 이 진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유의 법칙을 논하는 말에, ‘자유란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써 한계를 삼는다’고 한 것이 있다. 사람들이 각자 자유를 보유하여 남의 자유를 침범치 않는다면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동일하고 저 사람의 자유가 이 사람의 자유와 동일해서 각자의 자유가 모두 수평선처럼 가지런하게 될 것이며, 이리하여 각자의 자유에 사소한 차이도 없으므로 평등의 이상이 이보다 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1)

이와 같이 한용운은 대승 불교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불성론(佛性論)에 근거한 불교의 평등 정신을 근대적 개념으로 새롭게 재해석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가 근대 자유주의와 세계주의에 부합하는 주의로서 당대는 물론 문명이 향상하는 미래 사회의 종교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고 보고, 불교적 이상 세계 구현을 위해 현실에 맞는 불교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다음으로 구세주의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불교의 또 하나의 특징인 구세주의(救世主義)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기주의(利己主義)의 반대 개념이다. 불교를 논하는 사람들이 흔히 불교는 자기 한 몸만을 위하는 종교라고 하거니와 이는 불교를 충분히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 한 몸만을 위하는 것은 불교와는 정반대의 태도인 까닭이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르기를 나는 마땅히 널리 일체 중생을 위하여 일체 세계와 일체 악취(惡趣) 중에서 영원토록 일체의 고통을 받으리라하시고, 또 이르기를 나는 마땅히 저 지옥(地獄) 축생(畜生) 염라왕(閻羅王) 등의 처소에 이 몸으로써 인질(人質)을 삼아 모든 악취의 중생을 구속(救贖)하여 해탈을 얻게 하리라하셨다. 그 밖의 모든 말씀과 모든 게(偈)가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뜻에서 벗어남이 없었으니 이것이 과연 그 한 몸만을 위하는 길이겠는가. 아, 부처님께서야말로 구세(救世)의 일념에 있어서 철저히 하셨던 것이니, 우리 중생들은 무엇으로 이 은혜에 보답하랴.2)

《화엄경(華嚴經)》을 인용하며 중생을 구하기 위한 구세 사상을 명확히 하였다. 이러한 구세주의는 이후 대중불교, 민중불교, 불교 사회화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문명의 정도가 날로 향상되면 종교와 철학이 점차 높은 차원(次元)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며, 그 때에야 그릇된 철학적 견해나 그릇된 신앙 같은 것이야 어찌 다시 눈에 띌 까닭이 있겠는가.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 문명의 원료품(原料品) 구실을 착실히 하게 될 것이다.3)

한용운은 당시 진화론의 영향으로 종교와 철학도 점점 발전하여 인간의 인지가 성숙됨에 따라 그릇된 견해나 신앙은 서서히 자멸하리라 보았다. 다가올 도덕과 문명의 시대에 불교는 가장 적합한 종교가 되리라는 낙관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하지만 당시 불교는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여파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수준이 너무 척박하여 불교의 본래 정신이 왜곡되어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용운은 근본적인 불교 정신, 즉 조선불교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선불교 정신으로 회귀하여야 한다고 진단하였다.

마음의 정체를 밝히는 길을 참선(參禪)이라고 한다.4) 참선의 요점을 나타내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고 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적적(寂寂), 즉 마음이 고요하면 움직이지 않고, 성성(惺惺), 즉 마음이 늘 깨어 있으면 어둡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으면 흐트러짐이 없고, 어둡지 않으면 혼타(昏墮)함이 없으니, 흐트러짐이 없고 혼타함이 없으면 마음의 본체(本體)가 밝혀지게 마련이다. 요즘의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옛사람들은 그 마음을 고요하게 가졌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고 있다. 옛 사람들은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면 염세(厭世)가 되는 것뿐이며, 그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독선(獨善)이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을 것이다. 불교는 구세(救世)의 가르침이요, 중생 제도의 가르침인 터에 부처님의 제자 된 사람으로서 염세와 독선에 빠져 있을 따름이라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5)

염세와 독선을 벗어나 삶의 현장에서 적적성성한 선불교 정신을 구현하고자 한 한용운은 불교 개혁의 근본정신을 한국 선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재고로 불교 사상을 어떻게 당대에 구현해 낼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주) -----
1)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한용운전집》 2권, 신구문화사, 1973, 44~45면.
2) 한용운, 같은 글, 45면.
3) 같은 글, 43면.
4) 같은 글, 52면.
5) 같은 글, 54~5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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