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어록>에 이런 대화가 있다. 어떤 학승이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를 닦는 것입니까?” 마조가 답했다. “도는 닦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만약 닦아서 이룬다면, 닦아서 이루는 것은 다시 부서지니 곧 소승 수행자와 같을 것이다. 만약 닦지 않는다면, 곧 범부중생일 것이다.”

도는 수행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마조가 명확히 말하고 있다. 도를 닦아서 이룬다면, 그것은 원인에 의하여 만들어진 결과이니 본래 타고난 자성(自性)이 아니다. 그러면 닦지 말아야 하는가? 닦아야 한다거나 닦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곧 선택하고 취사하는 것이니 도가 아니고 분별망상이다. 이런 분별로써 도를 말할 수는 없다.

그 학승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어떤 견해를 내어야 도에 통달할 수 있습니까?” 마조가 말했다. “자성은 본래부터 완전하여 모자람이 없다. 그러므로 다만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분별에 머물지 않을 수만 있으면, 진짜 도 닦는 사람인 것이다. 좋은 것에 머물고 나쁜 것을 제거하거나, 공(空)을 관(觀)하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수행은 모두 조작하는 행동이다. 만약 다시 밖으로 분별하여 찾는다면,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단지 분별하는 마음만 없으면 된다. 한 생각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이 곧 중생세계에서 태어나고 죽는 뿌리가 되므로, 다만 분별하는 생각이 없기만 하면 곧 삶과 죽음의 뿌리를 없애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위없는 보물을 얻는 것이다.”

분별망상이 쉬어져서 분별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불이중도(不二中道)의 자성에 통달하는 것이다. 자성은 본래 불이중도로서 아무런 분별망상이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분별을 일으켜 망상을 일삼고 있으니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견성성불은 곧 불이중도인 자성에 통달하는 것이므로, 분별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마조는 말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다만 더럽히지만 마라. 어떤 것이 더럽히는 것인가? 분별하는 마음으로써 조작하고 추구하기만 하면 모두 더럽히는 것이다.”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것은 당연히 망상이지만, 공(空)을 관하거나 선정을 닦아 삼매에 들어가는 것도 역시 의도적으로 노력하여 이루어내는 것이니 취사선택의 분별망상이다. 그러나 분별을 쉬기 위하여 분별을 버리고 분별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분별과 분별없음을 나누어 취하고 버리는 일이니 참으로 분별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분별에서 벗어나는 길은 일부러 분별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분별을 벗어나 깨닫는가?

마조가 다시 말했다. “소승의 수행자는, 부처님의 마음에는 본래 지위(地位)·인과(因果)·계급(階級)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분별하고 헤아려서 수행이 원인이고 깨달음이 결과라고 허망하게 생각한다. 그리하여 공(空)을 관하는 선정에 머물러 긴긴 시간을 지나지만, 그렇게 하여 비록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곧 다시 미혹해진다. 대승의 모든 보살이 이러한 소승의 수행을 마치 지옥의 고통과 같이 여기는 것은, 소승의 수행자가 이처럼 공(空)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러서 불성(佛性)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선(禪)을 공부하는 상근기 중생이라면, 문득 선지식이 가르치는 말씀을 듣고서 즉시 깨달아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불성을 본다.”

이처럼 선은 선정을 수행하거나 관법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깨달아 불이중도에 들어가 있는 참된 선지식의 말씀을 듣고서 문득 분별을 벗어나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당시 중국 선사들은 언하변오(言下便悟)라고 하였는데,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닫는다는 뜻이다. 육조혜능은 <금강경> 구절을 듣고서 문득 깨달았고, 그 뒤 육조 문하의 수많은 선승들도 모두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달아 불이법문에 통달하였다.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깨달음을 얻은 선사들 1700여명의 깨달은 이야기와 가르침의 말씀을 적어 놓은 <조당집>이나 <전등록>을 보면 모든 깨달음은 스승의 말씀을 듣고서 홀연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은 수행이 아니라 가르침의 말씀을 듣고서 문득 깨닫는 체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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