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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 영역 넘어 전승 공동체 노력 필요"
제2회 ‘한국선무도와 무형문화재’ 학술대회 지상중계
2018년 12월 14일 (금) 11:08:06 김종찬 기자 kimjc00@hanmail.net
   
▲ 선무도와 무형문화재’ 국립중앙박물관 학술대회에서 재단법인 선무도대금강문 이사장 적운스님(골굴사 회주) 지도 아래 선무도 시연이 지난 7일 진행됐다.

‘선무도와 무형문화재’ 학술대회가 동명대학교 인도문화연구소가 주최하고, 한국미술사연구소 동국대학교 한국불교사연구소가 주관, 재단법인 선무도대금강문 주무로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에서 지난 7일 열렸다.


무예 속성 무형문화재 영역 넘어 지향점 향해 전승 공동체 노력 필요

선무도와 무형문화재
허용호(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1960년대에 무형문화재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우리의 무형문화유산은 괄목할 만한 변화를 보여 왔다. ‘중점보호주의’로 정리할 수 있는 그동안의 무형문화유산 정책은 그 폐해가 적지 않게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그 성과 역시 무시하지 못한다. 전국에 산재한 농악대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고, 수백 아니 수천 명이 줄을 옮기고 당기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은 무형문화유산 정책의 또 다른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바람은 안과 밖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안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문제 제기는 원형 유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동안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무형문화유산의 전승과 보존에 적용되었던 기본 원칙은 ‘원형 유지’였고 ‘원형대로’였다. 이 원칙이 지향했던 바는 민족문화의 보존이다. 근현대 시기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근대 이전의 전통문화를 우리 민족의 원래적 모습으로 여겨 되찾고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원형 유지와 원형대로의 기조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그 비판의 수와 강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많아지고 강해져서, 최근에 이르러서는 원형이 그야말로 동네북처럼 여기저기서 얻어터지는 형국이 되었다.
무형문화재 정책과 관련한 원형론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무형문화유산의 속성과는 맞지 않는 개념’과 ‘무형문화유산 박제화의 원흉’이라는 비판이 그것이다. 필자 역시 원형 개념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비판적 입장을 공유한다고 해서, 그 과정과 내용까지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무형유산의 박제화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종목의 전승 주체들이 갖는 원형에 대한 강박이나, 일부 전문가들이 원형을 철칙화 하는 행태에도 불구하고, 원형대로 전승된 사례는 흔치 않다. 원형 유지나 원형대로는 관념에서만 존재했다.
또 다른 바람은 외부에서 불어왔다. 대표적인 것이 ‘유네스코 체제’라 불리는 상황의 전개이다. 무형문화유산과 관련한 유네스코 체제의 형성은 적어도 197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3년 볼리비아 정부가 민속 보호를 요청한 이래, 1989년 ‘전통문화 및 민속 보호에 관한 권고(Recommendation on the Protection of Traditional Culture and Folklore)’, 1998년 ‘인류 구전문화 및 무형문화유산 걸작에 관한 규약 선포(Proclamation of Masterpieces of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와 시행, 2003년 무형문화유산 국제 협약(International Convention to Safeguard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통과, 2006년 협약 발효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은 국제적으로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의 기저에는 무형문화에 대한 인식 변화가 자리한다. 유물과 완성품만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과 사람들의 활동 자체가 살아있는 문화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인식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 ‘지배층 중심의 유형문화’, ‘서구적인 개념에 근거한 걸작 정의’, ‘기념물적 기준에 중점’, ‘인류문화에 대한 정태적 관점’ 등의 속성을 가지고 있던 기존의 세계유산목록(유형문화유산)에서 벗어나, 풍부하고 다양하며 살아있는 문화라고 인식되는 무형문화가 주목받게 되었다. 2008년 현재 100여 개국이 무형문화유산 국제 협약에 가입하였고, 우리나라 역시 가입했다.
「문화재보호법」 속에는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문화재’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문화재 전반을 대상으로 하는 법인 것이다.
그런데 「문화재보호법」에는 ‘무형문화재의 정의와 원칙’, ‘무형문화재의 유형’, ‘무형문화재 지정 및 전승자 인정’, ‘중요무형문화재의 보호 및 육성’에 관한 몇 개의 조항만 있을 뿐, 무형문화재에 대한 조항 자체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 존재하는 무형문화재에 대한 조항마저도 무형유산의 속성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유형문화재 중심의 법이 「문화재보호법」이었고, 그 속에 무형문화재가 어정쩡하게 포함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형문화재법」이 2015년 3월 27일 제정되고, 2016년 3월 28일 시행되었다.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셋방살이를 하던 무형유산이 드디어 독자적인 법률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무형문화재의 특성에 맞는 독자적인 정책 수립 및 집행이 가능해졌다.
「무형문화재법」이 갖는 차별성으로, ‘무형문화재 영역의 확대와 분류 체계의 변화’, ‘원형 유지 원칙에서 전형 유지 원칙으로 ’, ‘무형문화재위원회의 별도 설치’, ‘국가긴급보호무형문화재의 지정’, ‘전수교육대학의 선정’ 등을 꼽을 수 있다. 「무형문화재법」 제정 이전에 시행된 것이지만, ‘보유자나 보유단체 없는 종목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역시 「무형문화재법」과 그 취지를 함께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차별성들은 이전의 그 어떤 법안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기에, 「무형문화재법」의 독립성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무형문화재법」의 독립성은 ‘전형 유지라는 기본 원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무형문화재법」 제2조(정의)와 제3조(기본원칙)를 보면 ‘전형’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다.
전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 조항들은 현행 「문화재보호법」 제3조(문화재보호의 기본 원칙)의 “문화재의 보존ㆍ관리 및 활용은 원형 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한다”는 내용과 다르다. ‘원형 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하는 것에 비해, 「무형문화재법」에서는 ‘전형 유지를 기본 원칙’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전형’이라는 용어는 이전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새롭게 시행되고 있는 「무형문화재법」 제2조 제2항에 전형을 정의하는 조항이 있는 것이다. “해당 무형문화재의 가치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특징”이라 규정된 전형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해서, 그 실체가 모호하다.
필자는 「무형문화재법」이 완전한 독립을 이룬 것이라 평가할 수 없다. 이 법률의 독립은 아직 불완전하며, 그래서 무형문화재 정책의 독립은 미완의 것이다. 그 근거는 「문화재보호법」과 「무형문화재법」의 관계가 동등하지 않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16년 2월 3일 일부 개정되고, 2016년 8월 4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문화재보호법」을 보면, 여전히 무형문화재를 그 대상 범주에 포함시킨다.
「문화재보호법」과 「무형문화재법」의 관계가 상위법과 하위법이라는 식으로 정리가 될 때, 또 다른 문제의 소지가 있다. 상위법인 「문화재보호법」에서의 ‘문화재보호의 기본 원칙’은 ‘원형 유지’이다. 제3조(문화재보호의 기본원칙)를 보면, “문화재의 보존ㆍ관리 및 활용은 원형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한다”고 여전히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무형문화재법」에서의 ‘전형 유지’와는 다르다. 여기에서 ‘원형과 전형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상위법과 하위법이라는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전형을 포함하는 것이 원형이다’ 또는 ‘전형은 원형의 특수한 경우이다’ 등의 논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법의 위계에 따른 논리에 따른다면 ‘전형은 원형에 포함되는 것’이며 ‘원형의 특수한 경우가 전형’이 되어 버린다. ‘상위법에서의 원형 유지’와 ‘하위 법에서의 전형 유지’라는 차이는, 결국 둘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논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필자는 원형과 전형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필자는 새롭게 제기된 전형이라는 것도 무형문화재 제도 운용상의 조작(operational) 개념일 따름이라 생각한다.
인도의 부처님 당시부터 이어져 온 승가의 전통적 수행법이자, 한국 승가의 전통무예로 평가하고 있는 것과 무형문화재로서 선무도를 바라보는 것은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다. 무형문화재로의 지정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국가의 무형문화재 체재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정적인 전승을 위한 기반을 만들고, 국가무형문화재라는 명예까지 얻게 되는 것이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다. 하지만 국가가 관리 운용하는 체재 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는 국가무형문화재의 틀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때로는 선무도 전승 공동체 자체의 평가와는 다른 양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칠게 살펴보았을 때, 선무도는 일단 국가무형문화재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무예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불가의 전통적 수행법이라는 점에서 심도 깊은 검토가 필요하다. 유사 분야에 대해 지정한 선례가 없기 때문이다. 선무도 전승자들의 전승 의지는 여타 다른 종목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른 지표들에서의 평가는 쉽게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이는 선무도와 관련한 필자의 지식이 일천한 탓도 있겠지만,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체계에 선무도가 이제 막 진입한 탓도 크다. 이제 필요한 것은 ‘역사성’ㆍ‘학술성’ㆍ‘예술성·기술성’ㆍ‘대표성’ㆍ‘사회문화적 가치’ㆍ‘지속 가능성’ 등의 지표를 중심으로 선무도를 평가해 보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섬세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며, 무형문화재 지정의 지표에 맞추어 객관적인 자체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고, 지정의 절차와 단계를 정리하고, 과정을 분명하게 숙지하면서, 지향점을 분명히 하고,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인 전승 공동체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범어사 양익스님이 일제 때 끊긴 관선무 발굴 창안

선무도의 역사에 관한 일고찰
문무왕(동명대학교)

골굴사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골굴사는 기림사와 함께 인도에서 온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선덕여왕 12년(643)에 창건한 임정사(林井寺)에 속한 사찰이었다. 임정사는 원효(元曉)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기림사란 부처님 생존 때에 세워졌던 인도의 기원정사(祈園精舍)를 뜻한다. 골굴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은 기림사적기에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옛 부터 골굴사는 기림사와 깊은 연관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골굴사(암)에 대한 본격적 기록은 정시한(丁時翰;1625~1707)의 산중일기(山中日記)에 나타난1688년(무진, 숙종 14) 5월 16일에 기록된 이 글에 따르면, 골굴사는 괴석들이 층층으로 쌓인 곳에 굴이 있고, 굴 앞에는 목조가옥에 처마와 창이 달려 있고, 벽도 채색되어 있었으며, 단청이 된 전각 5, 6채가 있다고 했다.
이러한 진술을 통해서 골굴사 12석굴 앞에 채색된 전각과 그 전각에 달린 처마와 창을 가진 골굴사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매우 독특한 모양과 형상을 가진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된 850년 이후 골굴 전실 전각이 불탄 19세기 후반기인 1880년경 불타기 전까지 제대로 된 우리나라 유일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다층의 반개착 석굴로 남아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골굴의 조성사상은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골굴은 석굴암과 함께 외적을 물리치는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점도 창건의 한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동해안으로 침공해오는 외적은 1차로 감은사, 2차로 골굴암, 3차로 석굴암 순으로 불교적 방어체제를 구축했다고 보아 좋다는 뜻이다.
이는 골굴의 주존불(主尊佛)격인 상단의 대마애불이 석굴암과 동일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는 사실과 이 불상의 향이 동해의 대왕암(大王巖)쪽으로 동향하고 있어서 동해 외적 방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도 이를 밑받침하고 있다. 물론 외적방어 목적으로만 창건된 것이 아니지만 골굴 창건목적의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외적방어에 있었다고 보는 관점은
무시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
통일신라 당시 외적방어에 주력한 불교종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가종(瑜伽宗) 내지 유가밀교(瑜伽密敎)계인 신인종(神印宗)이었다. 당나라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명랑법사가 사천왕사를 가설하여 문두루법을 실행한 불교교단은 유가밀교계인 신인종이었다.
신인종은 사천왕사 창건에 이어 경주에서 동해에 이르는 동해 외적방어용으로 감은사・석굴암・골굴암을 차례로 건립하였고 울산 쪽 방어용으로 관문에 원원사를 창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골굴의 본존 마애불이 대왕암으로 동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골굴이 문무왕의 외적방어의 염원이 서린 대왕암의 조성의도와 동일하다고 판단되고 있는 것은 이를 잘 알려주고 있다. 이는 석굴암과 함께 유가밀교인 신인종이 석굴암의 조성과 동일하게 골굴의 조성에 관여했다고 판단된다.
골굴사는 한국 승가무술의 총본산이다. 특히 경주는 번성했던 신라불교문화의 심장으로서, 삼국통일을 이끈 승려와 화랑들의 무대였다. 이로 인해 골굴사의 선무도는 한국전통무예의 근원이라는 자부심과 분명 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선무도는 전통무술 가운데 하나이지만 승가무술이다. 그런데 불교는 폭력성과 살육을 가장 금기시하는 종교이다. 따라서 무술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한 잣대를 갖고 있다. 무술을 배우기 이전에, 먼저 수행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禪)은 곧 무술의 방향타요 무술이 지향하는 목표이다. 따라서 선무도는 상대를 살리는 활인검(活人劍)의 기능을 해야 한다. 자신을 위한 수행의 방편이자, 중생을 살리는 칼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선무도의 존재 이유가 있다. 화랑도의 세속오계 가운데 ‘살생유택(殺生有擇)’은 선무도 정신과 관련된다.
선무도의 처음 명칭은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이었다. 이것은 부처님의 시대에서부터 2,500년을 면면히 이어온 승가의 전통적 수행법이다.
많은 사람들은 승가무술이 중국 소림사가 본고장이고 달마대사를 시조로 생각하지만, 승가무술의 고향은 인도이다.
골굴사의 주지 적운 스님의 스승인 범어사의 양익(兩翼) 대종사는 관법(觀法)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후, 범어사에 불교금강영관의 연수원 개설하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이때 적운 스님은 은사스님으로부터 관법 과 승가무술을 배운 후 대금강문(大金剛門)이라는 문호(門號)를 하사받고, 1984년부터 골굴사에서 세속포교를 시작하였다. 선무도는 이때 적운 스님이 불교금강영관
(佛敎金剛靈觀)을 현대적인 감각에 맞게 고친 이름이다.
선무도의 연원은 인도로부터 찾아보아야 한다. 하지만 인도의 승려들의 무예수련에 관한 자료는 전무한 상황이다.
따라서 선무도의 연원 중 하나는 중국 승원무예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소림사를 중심으로 한 승려들의 무예 수련과 한국 승군들의 활동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소림사가 중국무예의 창시자라는 부분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소림의 무예는 후대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민간에서는 의심의 여지를 품고 있지 않다.
소림사의 무예가 한국으로 전래 됐다는 점은 기록에 보이지를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 있어서 중요한 불교문화인 석굴암에 나타난 인왕상의 권인은 중요한 시사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문명대 교수의 「신라의 인왕상」에 이러한 권법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인왕상의 권법이 소림
사의 권법과 유사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점은 중요한 시사점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문헌상의 기록은 없지만 동작 연구를 통해 소림사의 무예와의 연관관계를 찾은 점은 뛰어난 점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한국선무도와 소림사와의 관련성을 찾 을 수 있다.
한국불교와 무예와의 관계는 승군의 활동에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사원에 소속한 승군의 군사 활동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고구려는 보장 왕 4년(645) 승군 3만을 징발하여 당나라를 격퇴하였고, 통일신라에서는 진성여왕 3년부터 9년까지(889~995) 해인사의 승군 9천명이 초적 3천명을 격퇴한 사실이 그것이다.
승군의 군사 활동은 고려시대에 더욱 확대되었다. 고려는 거란과 여섯 차례 전쟁을 했는데, 국가는 전쟁 때마다 수원승도(隨院僧徒)를 징발하여 출정군에 소속시켰다. 따라서 여기서는 고려전기 수원승도가 승군에 징발된 내력과 그들이 거란전쟁에서 세운 군사 활동을 고찰하려고한다.
수원승도가 정규군의 승군에 편재된 것은 숙종 대 여진정벌에 동원된 별무반 소속의 항마군이 최초였다. 그러나 고려 초기부터 승군은 전쟁에 참여하였다. 다음의 사료가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국초부터 중앙과 지방의 모든 사원에는 수원승도가 있어서 항상 노역을 담당했는데, 마치 군현의 거민(居民)과 같았다. 항산(恒産)을 가진 자가 무수히 많았다. 국가는 전쟁이 있을 때마다 중앙과 지방의 여러 사원의 수원승도를 징발하여 여러 부대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위 사료는 국초의 여러 사원에는 노역을 담당한 수원승도가 있었는데, 국가는 전쟁 때마다 수원승도를 징발하여 정규군에 소속시켰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수원승도의 발생 시기는 고려 건국의 전후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해인사 치군(緇軍28)) 들이 도둑들과 전투하는 중에 57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치군들 가운데 속인들이 곧, 수원승도인 셈이다.
이들이 고려시대에 해인사 수원승도로 편입되었다는 견해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승려들의 군사적 활동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승군이 명종대에 설치된 기록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승려들이 승군으로 활약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러한 승군은 승려들의 활약을 통해 불교가 당시 사회에서 역할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부분은 다른 논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하지만 승군의 존재는 확인되지만 승군의 무예에 관한 기록은 보이자 않아 보다 면밀한 사료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와서 승려들의 무예는 선무도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선무도는 근래에 와서 “관선무(觀禪武)”로 다시 태어났다. 본래 명칭은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이라고 하며, 부처님으로부터 2500년을 면면히 이어온 승가의 전통적인 수행법인 것이다.
“선무도”라는 명칭은 세속의 다른 어느 문파의 명칭처럼 대중포교(大衆布敎)를 위해 1984년도에 현대인들의 언어감각에 맞추어서 선무도라고 명칭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관선무의 본원지는 중국이 아니라 인도이며 소림사 무술의 원류를 말한다면 달마 대사의 고향인 천축(天竺,인도)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사찰의 금강역사상(金剛力士象)의 권법세(拳法勢)적인 모습은 고대 인도사회의 무술사를 유추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불가의 수행전통은 일제시대 때 그 맥이 잠시 끊어졌으나, 1950년대 범어사 동산 큰스님 문하의 양익 스님께서 밀교경전 및 화엄경, 법화경, 대반야심경을 공부하시던 중 큰 깨달음을 얻으시고 후학들을 위하여 관선무를 발굴 창안 체계화시켜 불교 금강영관이라는 이름으로 범어사 ‘휴휴정사(休休精舍)’에서부터 스님들을 중심으로 수련을 하기 시작하였고, 1960년대 초 범어사 ‘서지전’(西持殿)에 금강승연수원을 개설하였으며, 1977년 9월 5일 현재의 청련암(淸漣庵) 금강영관연수원으로 이전하여 많은 연수생을 기수별로 배출하게 되었다.
불무도(금강영관)은 1960년대 승려 양익에 의하여 이론화되고 체계화되었다. 1971년 범어사 극락암 휴휴정사(休休靜舍)에 금강영관 연수원을 개원하였고, 1978년 범어사 청련암(梵魚寺靑蓮庵)으로 이전하여 금강영관 수련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불무도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맥이 끊어진 것을 1960년대에 범어사 청련암 승려 양익이 이론화·체계화시켜 전승하면서 새롭게 거듭났다. 양익은 1971년 범어사 극락암에 연수원을 설립하고 불무도 지도법을 개발하였으며, 1978년에는 범어사 청련암에 금강영관 수련원을 열어 본격적인 후학 양성에 나섰다.
양익은 경주 골굴사(骨窟寺) 승려 적운, 서울 호압사(虎壓寺) 전 주지 원욱, 범어사 금강선원 승려 안도, 보령 백운사(白雲寺) 주지 법찬 등을 직접 지도하여 양성하였다.
양익은 승려의 참선 수행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전승한 불교 금강영관이 세속에 떠도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나 이와 달리 양익의 제자들은 불법 홍포를 위해 불교 금강영관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본격적인 보급에 나섰다. 이들 승려들은 ‘불교 금강영관’이 일반인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선무도’, ‘선관무’, ‘불무도’, ‘관선무’ 등으로 이름을 바꿔 일반인에게 다가갔다. 또한 불교 금강영관은 전국 각 대학에서 정규 과목 및 교양 과목으로 채택되어 호신술 및 심신 단련법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불교 전통 무술인 불교 금강영관은 불가(佛家)의 심신 수련법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무술이자 수련법으로 점차 각광받고 있다. 일반 무술의 사범격인 법사가 수백 명에 이르고, 수련생도 전 세계 10여 만 명에 이를 정도로 많이 보급되어 우리나라 불교 포교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선무(禪武), 신체 작은 부위와 전체 균형에 정신 조화 수련

선무 수련의 현대적 효용성
노재성(동강대학교 부교수)

선무(禪武) 수련은 신체의 단련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하겠으며, 그리하여 자아의 재발견과, 자기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차원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말은 현대인들의 무도와 선무수련의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본 연구의 목적은 현대 생활에서의 현대인들의 선무수련의 효용성을 찾는데 그 목적이 있고 그 가치기
준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무의 궁극적인 목표는 동일하나 각국(중국, 일본)의 지리, 인종, 국민성, 시대에 따라 수련내용과 기법이 변천되어 왔다. 그러므로 현대인에게 선무의 필요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현대문명의 정신적 상황을 알아야 하겠다.
우리는 현대문명의 본질적 특징 중에 하나를 니힐리즘(Nihilism)에서 찾을 수 있다 하겠다.
이것은 현대인간 스스로가 마음을 안착시킬 곳을 상실하고 있다는 뜻도 되겠다. 즉 현대인은 삶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각자의 욕구대로 몸과 마음을 맡기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과학문명의 발달 때문에 항상 편리성에 동승한 신체는 쾌락을 추종하게 되며 점차 달라지고 있다.
물론 여기서 정신의 가치변화는 인간의 인격자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현대문명은 정신적으로 인간의 급속한 물질중심의 가치판단을 이루고 신체적으로 쾌락을 중심으로 한 편리성향을 취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물질을 중심으로 한 의식구조가 형성됨에 따라 항상 긴장과 불안 속에 살고 있고 또 신체의 편리성향은 질병을 유발시켜 정신적 스트레스와 건강 장애를 가져오기 쉽다. 현대사회는 노동의 기계화와 자동화로 인하여 인체활동이 제한되어 있어 정신적 불만족을 가져온다. 자기표현이나 자기실현의 기회가 상실되고 부분적 작업과정을 부분적 신체활동 내지 편중된 육체 활동으로 말미암아 균형있는 신체발달과 건강증진에 불합리성을 유인시킨다.
이상과 같은 현대문명 속에 건전한 정신과 육체를 갖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욕망이다. 선무는 종교적인 근원을 갖고 수십 년 수행된 인체생리에 부합된 무도이다. 신체단련을 시키면서 동시에 정신력을 강건하게 하여 인격을 향상시킬 수 있는 최선의 무도이다.
현대의 과학문명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으며 21세기 사회는 그 발전이 극치에 달할 것이다. 인구가 두 배 이상으로 늘고, 오늘날과 같이 인구의 4분의 3이 도시에 집중치 않고 분산하여 살며, 개인 소득이 3배로 증가되며 여가시간 역시 3배로 늘며 모든 가정의 가구들이 자동화될 것이다.
그리고 의학과 약학이 발달하여 마음을 통제할 수 있고 두뇌가 예민하게 작용할 수 있으며 사고력을 증가시킬 수 있는 약을 만들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의 수명은 점점 더 연장될 것이다.
그러나 고도의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물질문명의 급속한 발달 속에 풍요로운 삶의 내재적 가치를 향유하는 현대인들의 생활이 진정한 삶의 질, 향상을 통한 주민복지를 충족시켜 주기에는 아직도 미흡하다고 하겠다.
국민의 소득 수준의 향상과 여가시간의 증대는 양적・물질적 풍요가 이루어진 반면에 신체적・정신적 약화를 가져와 사회적 병리 현상과 현대병을 안겨 주고 있으며, 불건전한 국민적 생활 형태가 심화되어 인간성 상실, 인간 소외, 삶의 질 저하 현상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고 가치관의 혼란과 신체활동의 제약, 소외 등의 심각한 병리현상을 치료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선무 수련의 필요성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대문명의 본질적 특징 중에 하나를 니힐니즘에서 찾을 수 있다 하겠다. 이것은 현대인 각 스스로가 마음을 안착시킬 곳을 상실하고 있다는 뜻도 되겠다. 즉 현대인은 삶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각자의 욕구대로 몸과 마음을 맡기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과학문명의 발달 때문에 항상 편리성에 동승한 신체는 쾌락을 추종하게 되며 점차 약화된다. 따라서 정신적인 가치체계도 물질문화의 변화에 따라 점차 달라지고 있다. 물론 여기서 정신의 가치변화는 인간의 인격자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현대문명은 정신적으로 인간의 급속한 물질중심의 가치판단을 이루고 신체적으로 쾌락을 중심으로 한 편리성향을 취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물질을 중심으로 한 의식구조가 형성됨에 따라 항상 긴장과 불안 속에 살고 있고 또 신체의 편리성향은 질병을 유발시켜 정신적 스트레스와 건강장애를 가져오기 쉽다. 또한 현대사회는 노동의 기계화와 자동화로 인하여 인체활동이 제한되어 있어 정신적 불만족을 가져 온다.
자기표현이나 자기실현의 기회가 상실되고 부분적 작업과정을 부분적 신체활동 내지 편중된 육체활동으로 말미암아 균형있는 신체발달과 건강증진에 불합리성을 유인시킨다. 이상과 같은 현대문명 속에 건전한 정신과 육체를 갖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욕망이다. 선무는 종교적인 근원을 갖고 수십 년 수행된 인체생리에 부합된 무도이며 현대인들에게 신체단련을 시키면서 동시에 정신력을 강건하게하여 인격을 향상시킬 수 있는 최선의 무도라 말 할 수 있고 선무가 현대인들의 심신을 조화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는 무도로써 원만한 인격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종교적 수행방법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바람직한 현대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교육방법을 적용시키기 위해서 선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
현대사회는 산업경제의 급속한 발달로 인한 여가시간의 증대와 국민소득 및 의식수준이 향상된 반면에 물질만능주의의 팽배로 인하여 인간소외현상이 심각해 졌으며, 각종 오염문제도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회적 부패와 도덕성분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건강을 침해하고 있다.
또한, 현대인들은 경쟁의식을 계속 불러 일으켜 정신적인 갈등과 고통을 증대시키고 있다. 건강관리공단에서는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스트레스로 인하여 질병에 걸린 여성 환자가 2005년부터 2008년까지 4년 동안 연 평균 15.3%씩 증가하였다. 성인들은 생활습관병 등의 유병률이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개인의 삶과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
괴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따라서 의료적인 예방이나 치료보다도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눈과 가치를 찾고 인간 본성을 깨달아 가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심신수련을 통해서 확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인간의 모든 사고, 감정, 욕망 등 정신현상을 육체현상과 동일하게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 병리현상을 정신적인 영역으로만 국한시켜서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다
는 것보다 선무와 같이 심신을 병행 수련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은 신체보다 변화가 더욱 심하다. 따라서 자기내적인 문제나 화경적인 변화에 대해서 육체보다 훨씬 민감하기 때문에 현대와 같이 다변다양하며 스피드 한 상황에 적응 조절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정신집중 훈련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현대인들에게 선무수련은 신체적 자세 조정법과 단전호흡법을 지속적으로 연마함으로 심폐기능을 촉진시키며, 전 신체운동 및 각 내장기관의 강장에 큰 영향을 주어 소화, 순환작용과 신진대사를 왕성하게 하며 신체 여러 부분의 순조로운 발달과 아울러 정상적인 발육을 돕고 모든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생겨 건강한 몸을 유지시킬 수 있다. 물론 스포츠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나 보다 적극적인 선무교육을 통한 심신단련은 인간의 자연적 기질(Natural temper)을 인위적 교육방법을 통하여 건강한 사람(awell disciplined character)으로 훈련시키는 것이다.
스포츠보다 선무는 그 수련 정도가 지속적이며 수련의 경험적 사실을 실체화시켜 나아감으로서 정신과 신체의 인내력, 지구력, 지속력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계속적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욕망을 통제하고 거부하는 힘은 곧 단련이라는 습관 훈련속에 생성할 수 있는 결과이며 신체적 단련은 곧 이성적 판단을 유도할 수 있는 정신적 훈련에 직접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심신단련을 통해 욕망을 통제하고 거부하는 힘을 육성할 수 있기 때문에 현대인의 정신 질환인 욕망에 따른 번뇌나 약한 마음의 상태에서 자기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정신적 병리현상들을 치료하는데도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고 할 수 있으며 선(禪)의 의의에 대해서는 시대와 나라에 따라서 그 표현은 다를지라도 그 뜻은 같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의 선무(禪武)수련의 효용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과학기술의 혁신은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해 주었으며, 여가의 대중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현대 문명은 노동의 생산성은 향상시켰으나 인간으로 하여금 기계화 문명의 노예가 되게 하였으며, 노동에서 삶의 가치와 보람을 느꼈던 과거 생활
양식과의 차이에서 오는 인간소외를 느끼게 하였다.
요컨대, 기술문명의 부단한 발전은 생활환경의 개선이라는 혜택을 인간에게 부여하였으나 기계문명의 노예화에 따른 인간성 상실의 문제를 대두시켰으며 이와 같은 현대문명은 정신적으로 인간의 급속한 물질중심의 가치판단을 이루고 신체적으로 쾌락을 중심으로 한 편리성향을 취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물질을 중심으로 한 의식구조가 형성됨에 따라 항상 긴장과 불안 속에 살고 있고 또 신체의 편리성향은 질병을 유발시켜 정신적 스트레스와 건강장애를 가져오기 쉽다.
이상과 같은 현대문명 속에 건전한 정신과 육체를 갖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욕망이다. 이러한 원인으로 무도는 인간이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동시에 인간전체-초개(超個)의 생명-를 살리는 활인(活人)의도로서 심신 수련을 통한 인간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존재로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자기의 동적인 표현과 발현을 구체화 시키려는 의중에서 아의(我意) 아집(我執)을 소멸해서 우리의 동적인 발현으로 전이시켜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기 생존을 위한 자기중심적 현존을 위한 투쟁의 방법에서 전체적 인간 집단의 현존을 위한 정화와 화합의 방법으로서 무도의 넓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무는 다만 신체적 기법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심신이 하나가 되는 심신일여(心身一如)와 동정일여(動靜一如)에 근간을 두고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무도는 인간의 자연성을 적극적으로 순리에 맞춰 단련함으로 동작 자체가 부분적 신체의 단련보다 전체 단련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신체의 자세, 호흡의 조정, 마음의 조정이 가장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선무의 수련은 인간의 신체적 조건과 역량을 단련이라는 반복된 과정을 통하여 극대화 시켜나가는데 필요한 기본적 단계를 의미하며, 선무 수련에서 가장 알아야 될 요건은 정신과 신체의 조화 수련과 신체의 작은 부위와 전체의 균형수련이다. 정신과 신체의 조화 수련은 정신과 신체의 하나 수련인 심신일여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신체의 작은 부위와 전체의 균형 수련은 작은 부분이 전체이며 전체는 작은 부분의 집합이라는 일즉다(一卽多), 일즉다의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선무는 종교적인 근원을 갖고 수십 년 수행된 인체생리에 부합된 무도이며 청소년들에게 신체단련을 시키면서 동시에 정신력을 강건하게 하여 인격을 향상시킬 수 있는 최선의 무도라 말 할 수 있겠다. 이제 자아의 재발견과, 자기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차원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말은 선무수련이 현대인들의 심신을 조화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는 무도로써 원만한 인격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종교적 수행방법은 물론 현대인들에게 바람직한 현대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교육방법을 적용시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선무수련이 필요하며 현대생활에서의 그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수행자 승군, 재가 수원승도(僧徒) 고려 조선까지 불교역사 주체

한국 승군(僧軍)의 역사와 성격
고영섭/동국대학교

한국불교사에서 ‘승군’(僧軍)은 호법과 호국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고민하게 해 주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승군’ 혹은 ‘의승군’ 또는 ‘승려 군인’이라는 조합 자체가 어폐가 있지만 그가 ‘사계’(捨戒) 즉 다른 사람 앞에서 ‘계를 버린다’고 선언한 비구 즉 ‘사계승’(捨戒僧)이라면 그는 ‘승려 군인’ 이전에 국난에 맞아 일어난 ‘의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전직은 승려였지만 현직은 ‘의병’ 혹은 ‘군인’이며 적국의 살생과 폭력에 맞서는 그의 살생과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가 ‘사계’ 즉 다른 사람 앞에서 ‘계를 버린다’고 선언을 했느냐의 여부와 그의 선언이 교단 밖에서도 인정될 수 있느냐가 문제될 것이다. 여기에서 승군 즉 의승군은 적어도 다른 사람 앞에서 ‘사계’ 선언을 하였다는 전제 위에서 논자는 논의를 해 가고자 한다.
승군은 군인으로 편성된 승려 군인을 가리킨다. 율장에 의하면 승려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무장 군인이 된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다만 그가 순간적인 과오로 중죄인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계를 버리는 방법’인 ‘사계’ 선언을 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비구의 생활을 그만두고 싶어 더 이상 수행할 의지가 없음을 다른 사람 앞에서 고백하는 ‘사계’ 선언을 했다면 그는 이미 승려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불교사 중 중국과 일본8) 불교에서는 승군 즉 승려 군인은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승려가 군인으로서 편성된 적이 있었다. 한국사에서 승군의 편성은 불교를 수용한 고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고대 불교에 관한 기록이 영성하여 당시의 승군이 정확히 언제 편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몇몇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366; 372), 백제(384), 가야(41; 452), 신라(262; 527)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어느 시점에 승군이 편성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군의 매복에 걸려든 나당 연합군에게 ‘빨리 병사를 돌리라’[速還其兵]는 암호풀이를 통해 위기를 면하게 해 준 원효(元曉, 613~686)도 전쟁과 관련해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고 보인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의 특수부대로 알려진 조의선인이 안시성 전투에 참여한 기록을 통해 알려지고 있다.
당시 고구려의 기록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고려 후기 최영의 진술에서 고구려 당시의 승군에 대해 구명해 볼 수 있다.
승군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조에도 편제되었었다. 특히 조선 명종 조에 이르러 승군 조직과 노동력 활용이 관례화되면서 승려들의 자격과 활동이 공인되었고 불교 존립의 기반이 되었다. 반면 의승군은 불교와 국가의 관계가 얼마나 밀착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으며, 승군의 전쟁 참여는 살상을 금지하는 계율을 어긴 명백한 범계 행위였다. 또한 당시에 수행풍토의 약화와 승군 활동 후 환속하는 풍조를 낳았다고 비판받기도 하였다.
한편 전란은 불교의 종교적 효용성을 부각시켰고, 국가적 위기를 구한 충의(忠義)의 공적으로 인해 불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고 위상이 제고되었다. 이에 불교는 고대와 고려 및 조선 전기와 달리 조선 후기사회에서 당당히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승군제도는 불교와 승려의 위상을 높여 불교와 승인(僧人)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 주었으며, 불교의 대사회적 존재감을 확장시켜 조선후기 이래의 불교 존립의 원동력이 되었다.
불교의 대사회적 존재감을 확장시켜준 승군제도는 정조(1786~1800) 이후 폐지되었다. 이제 불교 교단 스스로 존재감을 확보해 나가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항마군(降魔軍)은 마군(魔軍, mārasainya) 즉 ‘불법을 방해하는 마구니의 군대’를 물리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마군은 싯다르타의 수행을 방해하는 마왕 파피야스의 딸들로 의인화된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심과 같은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보리수 아래 앉은 싯다르타가 내면의 부동심을 통해 마군을 물리치고 붓다로 탈바꿈한 것처럼 마군은 수행과정에 나타나는 방해꾼이다. 수행자가 수행할 때에 심신에서 생기는 장애를 내마(內魔), 외계로부터 생기는 장애를 외마(外魔)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불교 교단에서는 불법을 지키기 위한 군인을 항마군(降魔軍)이라 불렀다. 이후 이들은 정부의 군대에 소속되어 승군(僧軍)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려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항마군은 별무반의 구성원으로 편제되었다. 고려 제15대 숙종은 재위 9년 즈음에 윤관의 건의에 따라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의 군사조직으로 별무반을 설치하였다.
고려 숙종 당시에 정규군 이외에 ‘특별한 군사조직’으로 편재된 별무반(別武班)은 크게 신기군(神騎軍), 신보군(神步軍), 항마군(降魔軍)을 중심으로 도탕(跳盪)·경궁(梗弓)·정노(精弩)·발화군(發火軍)과 같은 특수병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별무반은 병과에 따라서는 정규군과 달리 평민이라도 능력만 있다면 가리지 않고 받아 들였다.
고려 정규군과는 별개의 조직으로 이루어진 별무반은 17만에 달하는 대규모 임시 전투부대였다. 이들은 꾸준한 훈련을 통해 여진족과의 전투를 대비해 왔다. 숙종 시절에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예종 2년에 왕은 윤관을 원수, 오원총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오랜 골칫거리였던 여진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별무반은 천리장성 이북지역, 현재의 함경도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냈으며 그 자리에 동북 9성을 쌓았다. 하지만 더 이상 침범을 하지 않을테니 동북 9성 지역을 돌려달라는 여진의 요청을 받아들여 고려는 그 지역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그런데 별무반의 일원인 항마군의 경우에는 ‘승도’(僧徒) 즉 ‘승려무리’ 위주로 편성됐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로는 사원에 소속되어 경작하던 농민들을 징집하여 구성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승도는 ‘승려’이기보다는 ‘승려를 따르는 무리’로 보아야 할 것이며, 이들은 사원에 소속된 이들 농민들까지 포함한 재가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별무반의 한 부서로 구성된 당시의 항마군은 일부 승려들과 이들을 따르는 재가의 농민들로 구성된 군사조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별무반이 해체된 이후에도 항마군은 어느 정도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원승도는 그 이후에도 존재하여 전란에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각 사원에 분속된 수원승도는 외세의 침입시에 파견되었지만 국내 정치에도 파견되었다. 명종 4년(1174) 1월에 이의방(李義方)이 난을 일으켰을 때 중광사(重光寺), 홍호사(弘護寺), 귀법사(歸法寺), 홍화사(弘化寺) 증에 소속된 사찰의 승도 2천여 명22)을 동원하였다. 또 묘청(妙淸)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역할을 한 승도 관선(冠宣)과 상숭(尙崇), 명종 6년(1176)에 공주에서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가 난을 일으켰을 때 참여한 승도, 죽동(竹同)의 반란을 진압한 승려도 승군이라기보다는 수원승도로 추정된다. 이들이 ‘승려’이기보다는 ‘승도’ 즉 ‘승려들을 따르는 무리’였다면 당연히 수원승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몇몇 기록에 의하면 국가의 정책 아래 시설되어 각 사원에 분속된 수원승도는 고려 말까지 그 역할을 다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수원승도는 외세의 침입 때에 항마군과 같은 정규군대로 편성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재계(齋戒)를 주재하는 재승(齋僧) 혹은 연화승(緣化僧)으로서 그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승군과 항마군 및 수원승도는 ‘승려’로 이루어진 군대와 ‘승려를 따르는 무리들의 군대’로서 불교의 존재감을 드러내온 주체들이었다.
이들 수행자들로 이루어진 승군과 재가불자들로 이루어진 수원승도는 고대 사국과 고려시대만이 아니라 교단이 폐지되는 조선전기와 교단의 구심이 해체된 조선후기까지 또 하나의 불교역사의 주체들로서 굳건하게 자리 잡아 왔다.
선조 25년(1592) 4월에 임진왜란을 맞이한 조선 정부는 파죽지세로 치고올라오는 왜군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선조는 급기야 의주로 몽진을 떠났으며
세자 광해는 분조를 이끌며 전란에 참여하였다. 전세가 어려워지자 선조는 7월에 이르러 승통(僧統)을 설치하고 승군(僧軍)을 모집하면서 묘향산에 있는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에게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의 직책을 제수하여 승군 동원과 통솔을 담담하게 하였다. 선조는 행재소로 휴정을 불러 위기를 맞은 나라를 널리 구제하기를 청하였다.
선조의 부름을 받고 승군을 일으킨 다음해에 의승군은 평양성과 행주산성 전투에 직접 참석해 큰 전공을 세워 국왕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도총섭을 맡은 사명 유정은 강원도의 8백 승병을 모아 휴정을 대신하여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고, 삼가(三嘉)의 악견(岳堅)산성과 합천의 이숭(李崇)산성 등 경상도 지역 산성 축조와 군량 조달 등 전쟁 지원 사업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호란이 끝난 뒤 조선 정부는 남한한산성을 모델로 하여 북한산성의 축성에 착수하였다. 북한산성의 축성에도 승군이 거듭 동원되었다. 산성 안에는 전국의 승군을 관할하는 사찰 11개가 조영되었고 여기에도 팔도도총섭이 제수되었다. 숙종 37년(1711) 9월에 축성된 북한산성의 둘레는 7,260보였다. 대문은 4개, 암문은 10개, 장대(將臺) 3개가 설치되었다. 초대 팔도도총섭은 남한산성 팔도도총섭인 벽암 각성과 긴밀한 화엄사 출신 승려 성능(性能)이 승군을 이끌고 공역을 주관하였다. 산성이 축성되자 승영(僧營)이 설치되고 팔도도총섭을 겸하는 승대장(僧大將) 1인, 중군 좌우별장과 천총(千摠). 좌우병방(左右兵房) 등이 설치되었다.
북한산성의 승군은 남한산성의 승군을 참고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승군은 산성 수비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군사력이었다. 이들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승군들은 조선말 갑오경장(1894)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수도 한양의 남북에서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처럼 승군은 의승군과 항마군 및 수원승도와 연결되면서 조선조를 뒷받침해 왔다. 그리하여 승군과 의승군
은 숭유억불의 국시 아래서 불교의 존재감을 끊이지 않게 견고하게 지켜온 주요한 기제였다.
한국 고대 이래 고려와 달리 조선의 승군제도는 불교의 사회적 역할과 불교의 사회경제적 실태를 보여주는 주요한 제도였다. 왜란과 호란을 전후하여 승군총섭제 아래 통솔되는 불교계의 현실에서 승역(僧役)은 불교계가 대내외에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특히 조선 중기 이래 불교계는 선교양종이 혁파된 이래 교단이라는 구심을 상실했지만 승군총섭제를통해서나마 원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원심을 동인으로 삼아 불교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여한 ‘의승군’을 통해 어느 정도 구심을 회복해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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