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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당간] 선은 수행 아닌 깨달음이다- 4
2018년 12월 06일 (목) 16:23:17 김태완(무심선원장) budjn2009@gmail.com


선의 역사에서 좌선수행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 깨달음으로 안내한 가장 극적인 사건은 아마도 마조도일(馬祖道一)이 깨달은 이야기일 것이다. 마조도일은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은 제자를 130여명을 배출했다는 대종장이지만, 처음 출가해서는 스승에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좌선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남악회양이 어느 날 도일이 좌선하고 있는 암자를 방문하여 물었다. “스님은 좌선하여 무엇을 원하시오?” 도일이 말했다.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다음날 회양은 벽돌을 한 개 가져와서 암자 마당에 있는 바위에다 갈기 시작하였다. 시끄러운 소리에 도일이 좌선을 풀고 나와서 물었다. “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회양이 말했다.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도일이 웃으며 말했다.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회양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벽돌을 갈아서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을 하여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잠시 말없이 있던 도일이 이윽고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양이 말했다. “소달구지가 가지 않는다면, 달구지를 때려야 하겠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 도일이 말이 없자, 회양이 말했다. “그대는 좌선(坐禪)을 배우고자 하는가? 좌불(坐佛)을 배우고자 하는가? 만약 좌선을 배우고자 한다면, 선은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다. 만약 좌불을 배우고자 한다면, 부처에게는 정해진 모습이 없다. 머물러 있지 않은 법은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그대가 좌불을 따라간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고,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도에 통하지 못한다.”

도일이 이 말을 듣자 마치 목마를 때에 냉수를 마신 것처럼 시원하였다. 이에 회양에게 절을 올리고서 물었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 도에 들어맞겠습니까?” 회양이 말했다. “그대가 마음의 진리를 배우는 것은 마치 땅에 씨앗을 뿌린 것과 같고, 내가 그 진리의 요체를 말해 주는 것은 마치 하늘이 비를 내려 땅을 적셔 주는 것과 같다. 그대는 이번에 인연을 만났으니 이제 도를 볼 것이다.”

도일이 다시 물었다. “도에는 모습이 없는데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마음에 도를 보는 눈이 갖추어져 있다.” “이루어졌다 부서졌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회양이 말했다. “도에는 모습이 없는데, 어떻게 이루어지거나 부서지겠느냐?” 마조는 이러한 가르침 덕분에 깨달았다. 그 뒤 10년 동안 회양을 모시고 공부하였는데 깨달음이 더욱 깊어졌다.

이 이야기는 선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처음에 마조도일은 열심히 좌선하여 선정삼매를 추구하고 있었다. 다행히 육조혜능의 법을 이어받은 남악회양이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는데, 마조도일이 좌선에 몰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를 제도하러 찾아갔던 것이다.

마조를 찾아간 남악은 좌선하여 부처가 될 수는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왜냐하면, 참된 선과 참된 부처는 정해진 모습이 없고 머무는 곳이 없고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고 이루어지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는 도(道)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는 우리가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에 갈고 닦고 수행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본래 타고난 본성을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남악회양이 “소달구지가 가지 않는다면, 달구지를 때려야 하겠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라고 물었는데, 육체·느낌·생각·감정·의욕과 같이 우리가 노력하여 조절하고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소를 따라가는 달구지이다. 소는 우리가 본래 타고난 본성이다. 우리의 본성은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허공과 같아서 단지 깨달을 수 있을 뿐, 조절하거나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은 견성 즉 깨달음일 뿐이다.

<심우도>에 보면 구도자는 소를 찾는 사람인데, 소를 찾은 뒤에는 소를 잘 키워서 결국에는 소도 사람도 없는 일원상(一圓相)으로 돌아간다고 되어 있듯이, 선은 우선 스승의 가르침에 의하여 본성을 깨달은 뒤에 그 본성을 잘 지켜서 깨달음의 깊이를 더해가는 공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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