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학원의 시원이라 할 보종운동(保宗運動)인 ‘임제종’ 창시(1911)는 재단법인 선학원 제 13대 이사장 효일 범행스님께서 발행한 《재단법인 선학원 약사》(1986)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민족불교운동과 종지 수호의 차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근대불교의 정신을 각성하게 해준 불교사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 상량과 준공(1921), ‘선우공제회’ 창립 및 사단법인화 노력(1922·1923), 자립활로의 근간인 ‘선우공제회’ 보존을 위한 신탁등기(1922·1932), 신탁해지 및 법인설립에 의한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명명(1934)을 거쳐 오늘날 재단법인 선학원이 근대불교의 요람이라 불리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판계의 수도원 창립으로 선학원이 운영되어 오던 차, 당시 조선총독부는 이를 억압하는 한편 무거운 중과세를 부과하였다. 이에 탄압을 피하고자 선학원은 신탁(信託)의 취지로 소유권보존등기 경유(經由)를 거쳐, 순차적인 신탁해지 추진과 재단법인 자격을 획득하여왔다. 선학원은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려는 애국불교인들의 거처이자 안식처로서 사부대중이 끊임없이 운집하여 왔다.

선학원이 ‘사(寺)’나 ‘암(庵)’ 등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원(院, 禪學院)’이라 명명한 이유는 당시의 사찰령을 따르지 않기 위해서이다. 선학원은 창립 초기에 극심한 재정의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1922년 3월 30일부터 4월 1일까지 ‘선우공제회’ 총회를 개최한다. 만해스님 역시 발기인 중의 한 명이 바, 자립 활로를 위한 선학원의 ‘선우공제회’ 법인설립 시도는 일제의 방해로 쉽지 않았다. 재정의 어려움을 겪던 차, 1926년 5월 1일, 선학원 건물은 범어사 포교당으로 전환되었다. 이 시기를 즈음한 6월 7일, 만해스님은 종로경찰서에 강제 구금되어 고초를 치르게 되는 일이 있었다.

만해스님은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물산장려운동의 전개로 민족의 자립을 위해 애 쓰는 한편,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하여 불교 청년 운동을 활발히 해오던 참이었다. 인습의 타파와 승가 개혁을 위해 《조선불교유신론》(1901·1903)을, 사부대중에게 불교 본연의 가르침을 수지독송하게 한 《불교대전》(1914),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천명한 〈독립운동의 서〉(1919)를 저술한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로, 문학가이자 교육자로 이미 불교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존경을 받던 스님이었다.

▲ 동아일보 1926년 6월 9일자

1926년 6월 7일 오전 8경에 만해스님께서 선학원 정문을 나오던 순간, 선학원을 둘러싸고 있던 종로경찰서 형사대가 스님을 검거, 종로서에 강제 구금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6·10 독립운동(만세운동) 관련의 사전 검속 조치였다. 6.10독립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조선 순종 황제의 출상일을 기하여, 일제의 야만적 지배와 점거를 거부하고 국내외에 걸쳐 민족의 독립과 자립을 천명하고자 한 만세운동이다.

스님은 1919년 3·1만세운동의 주도로 옥고를 치르던 스님이었기에 출옥 후 항상 일제의 감시를 받아왔다. 1919년 3·1독립운동의 주도자로 옥고를 치른 조선불교의 이판계(理判系) 지도자이었기에 만해스님을 지속적으로 일제는 주도면밀하게 감찰하였던 것인데, 당시의 신문기사를 주목해보면 다음의 기사를 살펴 볼 수 있다.

“발각된 모 중대사건으로 인하야 시내 종로 경찰서에서는 경긔도 경찰부의 지휘를 바더 재작일 아츰부터도 활동을 게속하야 북촌일대에서 유력한 련루자로 인뎡하는 사람을 검거하여 들이는데 재작 칠일 아츰 여덜시경에는 다시 사오명의 형사대가 시내 안국동 사십번디 동래 범어사에서 경영하는 선학원을 에워싸고 수개월전부터 그곳에서 류숙하고 잇든 강원도 린뎨군 백담사 승려로 이전 삼십삼인 중에 한사람인 한모(韓某)가 맛츰 문밧그로 나오는 것을 돌연히 검거하는 동시에 그가 잇던 방까지 엄밀히 수색하엿다더라” (동아일보 1926년 6월 9일자 ‘禪學院도 搜索 門前에서 韓某檢擧’)

6·10독립운동 직전 만주로부터 경성역(현, 서울역)에 ‘만주대동단선언서’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격문 약 1만여 장이 철도편으로 수송되었다. 사전에 이 사실을 입수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선언서를 압수한 후 서울 지역 이외 전국 각지로 수송된 우편물을 수색하게 된다.

종로서는 시내 각 사립중등학교를 검열, 광화문우편국의 직인이 찍힌 수송물 가운데 격렬하게 일제를 비판하는 격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로 고등보통학교(중고등학교)와 전문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저항단체들을 집중적으로 수색하였는데, 수색과 검거에 집중한 일본 경찰은 휘문고등보통학교·보성전문학교·배재고등보통학교·경성공립제일고보교의 학생 수십여 명을 검거하여 취조하였다.

해외단체 및 지방의 조직적인 움직임을 감지한 일제는 지방에서 경찰들을 불러 모으는 한편, 무장한 군인을 동원하여 조선 전역을 감시하고 군사작전까지 준비하였고 격문 소지와 수송의 혐의가 있다고 여겨지는 지사들과 학생들을 수색하는데 치중하였던 것이다. 검속된 학생의 수는 서울에서 210여명, 전국적으로 1천여 명에 달했다. 취조 받은 사람은 106명, 수감된 자가 53명, 그 중 11명이 구속되었다. 1927년 3월 25일, 고등법원에서 10명은 징역 1년, 1명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이 언도 되었다.

▲ 동아일보 1926년 6월 10일자

상해를 포함하여 중국 각지에 산재한 항일독립운동단체 30여개 가운데 ‘대동단’에 대해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3·1운동 바로 직후인 1919년 4월 11일에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서 수립되었는데, 임시정부의 강화와 아울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할 공감대가 형성된다. 김가진 등을 중심으로 정관계, 종교계, 상공인, 학생 등이 모여 조직된 ‘조선민족대동단’(1919년 3월·4월)은 ‘제2회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는데, ‘일본이 한국을 독립시키지 않으면 혈전이라도 벌이자’는 포고문을 배포하였다. 이러한 선언은 일제를 충분히 긴장시키고도 남았고 무장 군인을 동원하여 군사작전을 일제는 준비하였다.

당시 고종황제의 다섯 번째 황자인 의왕(義王, 李堈)께서는 망명을 희망, 대동단은 임시정부에 의왕을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상해에서 의왕을 수령으로 추대하여 제2차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외의 여론을 촉진하고자하였다.

김가진은 임시정부의 내무부 특파원(李鍾郁, 廣田鍾郁)을 통해 의왕의 망명의사를 타진, 1919년 11월 10일에 의왕 일행은 변장한 채 수색역에서 국경으로 향하였으나, 요령성 안동(현, 단동)에서 일행은 붙잡히게 된다. 거사의 실패로 인해 대동단 인원의 대부분이 체포되었는데 최고 5년형까지 선고 받게 되었다.

▲ 일제 감찰자료 1927년 6월 16일자

3·1독립운동 이후 항일운동은 1919년의 조선민족대동단 운동과 1926년의 6·10만세운동을 거쳐 유일당인 신간회 운동이라는 큰 물줄기로 이어지게 된다. 1927년에 만해스님은 신간회 경성(서울) 지회 설립을 주도하게 된다.
당시 6·10독립운동 이후로 조직적인 활동이 침체되고 퇴보일로에 서 있던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 두 진영은 상호 합작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전반적으로 민족유일당 성립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좌우합작 반일단체를 결성하여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신간회(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는 활발히 지회를 두었던 1928년 기준,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약 3만 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게 된다.

신간회 설립초기, 1927년 2월에 이상재와 권동진이 정·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1927년 3월 경 회장 이상재의 유고로 인해 부회장 권동진은 그 소임을 이었다. 민족의식, 자주의식, 독립의식을 고취하고자 국내외에 지회를 설치하기로 된 바, 선학원의 만해 스님은 신간회 경성(서울) 지회 간사회 개최 준비하였다.

1927년 6월 16일, 안국동에서 준비 집회를 열었고 한 달 후인 7월 10일에 경성(서울) 지회를 설치, 만해스님은 신간회 경성지회장과 중앙집행위원의 겸직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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