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 민사 1부 판결문(1955.7.28.)

1911년 만해 한용운 스님을 위시한 사부대중의 활발한 참여로 전개된 임제종 운동은 1921년의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 상량과 준공, 1922년의 ‘선우공제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선학원은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를 준공하고 재단법인 설립의 법률 요건을 갖추는 한편,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지 않고자 1922년에 범어사에 신탁등기(信託登記)했다. 이후 1934년 12월 5일 만공 월면 스님을 초대 이사장으로 하여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이란 이름을 내걸고 재단법인으로 전환하였다. 역대 이사장은 성월 일전 스님, 초부 적음 스님, 경봉 정석 스님, 석주 정일 스님, 청담 순호 스님, 대의 동원 스님, 노노 대휘 스님, 향곡 혜림 스님, 동일 벽암 스님, 효일 범행 스님, 법원 진제 스님, 남산 정일 스님, 성파 도형 스님을 거쳐 지금의 정산 법진 스님까지 이른다.

재단법인 선학원 제13대 이사장 효일 범행 스님은 1986년에 발행된 《재단법인 선학원 약사》 서두에서 선학원의 시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선학원의 시원(始原)은 경술년(1910년) 국치가 있었던 직후인 신해년(1911년) 정초부터 비롯된다. 경술년(1910년) 8월 29일, 순종 황제의 조칙으로 한일 합병 조약문이 공포되고, 4개월 보름이 지난 신해년(1911년) 1월 15일, 지리산 송광사에서 전라남도 지리산 일대의 승려들이, 한용운, 진진응, 김종수, 김벽운, 김계산, 박한영 사(師) 등의 창도(唱導)에 따라 집회하고 한국불교가 임제종임을 천명하면서, 송광사에 ‘조선임제종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 - 《선학원 약사》 3면.

‘창도(唱導)’란 교법을 주창하여 사람을 불도로 이끈다는 의미다. 호남과 영남, 수도권에서 교세를 떨쳤던 임제종 운동은 불교청년운동과 종지 수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근대불교의 정신을 각성하게 해준 불교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조선불교계를 일본불교계에 예속시키려는 시도는 경술국치 직후부터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선학원 약사》에서 명명되었듯이 ‘침략(侵略)의 아첨꾼 이회광’은 원종 대표를 자처하며 1910년 10월 6일, 일본 조동종과 7개 조로 된 연합맹약을 체결하였다. 개종역조(改宗易祖)한 이 연합을 우리 불교계의 선각자들은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한국불교를 보종(保宗)하려고 창립한 ‘조선불교임제종’이 그 노력의 결실이다. 선각자들은 ‘조선불교는 임제종이므로 일본의 조동종과 병합될 수 없다.’는 논리로 원종의 행태를 ‘매교(賣敎)’라고 맹렬히 비판하였다.

한용운 스님이 ‘보종운동’으로 일컬었던 조선불교임제종의 태동 과정을 살펴보면, 진진응 스님, 박한영 스님, 김종래 스님 등이 1910년 11월 16일(음력 10월 15일) 광주 증심사에서 집회를 준비하였지만 참여인원 부족으로 연기했다. 이후 한용운 스님과 오성월 스님이 격문을 전국 각 지역에 보내 적극적으로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해 영·호남 승려들이 순천 송광사에서 1911년 1월 15일 1차 총회를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같은 해 2월 11일 새로운 종단을 세우기로 결의하고 송광사에서 발기 총회를 개최하였으니, 이렇게 설립된 곳이 바로 임제종 종무원이다.

종단의 관장으로 선암사 김경운 스님을 투표로 선출하였는데, 스님이 연로한 까닭에 서무부장 한용운 스님이 관장대리로 종무를 보았다. 1911년 3월 16일에는 관장대리 한용운 스님이 종무원 원장으로 취임하였고, 같은 해 5월 5일 하동 쌍계사에서 개최된 제2차 총회에서 임제종지(臨濟宗旨)를 널리 천양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범어사가 임제종에 참여하자 종무원을 그곳으로 옮기고, 동래와 초량, 광주, 대구, 서울 등 각 지역에 포교당을 지어 임제종지를 선양하는 한편, 종단 확장을 모색하였다.

이어 범어사 주지 오성월 스님이 서울 사동(寺同, 현재의 인사동)에 가옥 1동을 매입해 4월 10일 포교당을 준공하고, 다음 달인 5월 26일에 ‘조선임제종중앙포교원’ 간판을 내걸고 개원식을 봉행했다. 이후 임제종 종무원 사무소도 서울로 이전했다.

당시 개원식에서 한용운 스님은 주무자로서 포교당 건립 과정과 개설 취지, 그리고 임제종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였고 백용성 스님은 개교사장(開敎師長)으로서 교리를 설법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사찰령을 빌미로 한 달 뒤인 6월 26일 강제로 ‘조선임제종중앙포교원’ 간판을 내리게 하는 한편, 임제종이라는 종명 사용도 금지했다. 일제는 1911년 6월 3일 사찰령 전문 7조와 부칙을, 같은 해 7월 8일에 시행규칙을 각각 공포했다. 일제는 임제종의 수장인 한용운 스님을 포교의 주무로 체포하였고, 경성 지방법원의 검사국으로 압송하여 6월 21일에 유죄를 선고하였다.

임제종 측은 사찰령 밖에서 한국불교를 전승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종단의 명칭을 ‘조선선종’으로 변경하고 ‘조선임제종중앙포교원’ 역시 명칭을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변경했다. 범어사 주지 오성월 스님은 한국불교의 종명을 임제종으로 해야 한다고 줄곧 주장했다. 스님은 범어사 공문에 임제종의 본거지임을 명기하도록 했지만 일제의 강압조치로 이마저도 금지 당했다.

사동에 위치했던 ‘조선임제종중앙포교원’은 ‘조선불교임제종중앙포교원’, ‘조선선종중앙포교당’, ‘범어사교당’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는데, 나라를 걱정하고 불교를 수호하고자 했던 선지식의 집회장이었다.

“임제종포교원 간판을 내리고, 범어사교당이라는 이름으로 존속되었던 인사동의 그 포교당은 그로부터 10년간 우국애교(憂國愛敎)하는 이 나라 선지식들의 집회장이 되었다. 송광사에서 임제종 임시사무소의 설치를 주도했던 한용운, 진진응, 김종수, 김벽운, 김계산, 박한영 등의 선사들과 백용성, 오성월, 송만공, 강도봉, 김석두, 한설제, 김남전 선사 등이 여기서 모여 선풍을 진작시키고 민족의 전통을 지켜 나갈 방법을 숙의(熟議)하였다.” - 《선학원 약사》 중

우국애교(憂國愛敎)의 움직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조선불교선학원본부’ 창건으로 이어진다. 1921년 서울 안국동 40번지에 선학원 본부가 창건되었다. 선학원 설립을 위한 보살계 계단이 5월 15일에 봉행되었고, 같은 해 8월 10일에는 선학원 본부를 기공했다. 이어 10월 4일에는 상량식을 거행하고 11월 30일에 준공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이판계(理判系)의 지도자였던 만해 스님은 3·1운동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1921년 출소했다. 이때 김남전 스님 등 민족불교 선각자들은 만해 스님을 중심으로, 당시의 친일 성향의 사판계(事判系)에 대응하여 이판계의 수도원을 창립하고자 신도 최창훈 외 다수로부터 기부를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 상궁들의 보시와 사동(인사동)에 포교당을 마련해 주었던 범어사의 도움으로 서울 안국동 40번지에 190평 규모의 목조기와집을 건축했다. 부동산 소유권 및 선학원 건립 배경(이판계 수도원의 창립 연기)을 언급하고 있는 판결문을 살펴보자.

“강도봉(석왕사포교당 포교사), 김남전·김석○(김석두로 추정, 범어사포교당 포교사) 등은 기미독립운동 당시 ‘33인 중의 1인’이며, ‘이판계(理判系)의 선종의 지도자’인 한용운이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단기 4254년도(1921)에 출옥하게 되자 동인(同人, 만해 선사)을 중심으로 한, 사판계(事判系)에 대응하여 이판계의 수도원(을) 창립하고자 신도 최창훈(崔昌勳) 외 다수인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서울특별시 안국동 40번지 대지 190평을 매입한 후 동 대지상에 목조기와집을 건축, 그 당시 범어사에서 인사동포교동(범어사포교당)을 폐지 철거하고 옛 목재와 기와 약간을 (선학원) 건축에 기증” - 서울고등법원 민사 2부 <부동산소유권리이전등기절차이행청구 판결문> 중

선학원이 ‘사(寺)’나 ‘암(庵)’ 등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원(院, 禪學院)’이라고 명명된 이유는 당시 사찰령을 따르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판계 수도원으로 선학원이 운영되자, 당시 조선총독부는 중과세하는 등 탄압했다. 이에 선학원은 탄압을 피하고자 1922년 11월 27일 신탁(信託) 취지로 건축물을 범어사 명의로 소유권보존등기하였고, 1924년에는 대지를 범어사 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를 경유하였다.

‘선우공제회’ 법인 설립이 쉽지 않은 와중에 재정 어려움까지 겪게 되자 선학원은 1926년 5월 1일 선학원 건물을 범어사포교당으로 전환하였다. 이 시기를 즈음해 한용운 스님은 종로경찰서에 검거돼 고초를 치른다. 1926년 6월 7일 오전 8시 한용운 스님이 나오자 선학원을 둘러싸고 있던 종로서 형사대가 6·10만세 운동 사전 검속을 명분으로 스님을 검거한 것이다.

이후 선학원은 신탁 해지를 추진하고 수덕사 주지 송만공 스님 등이 기부하는 등 법인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1934년에 이르러 재단법인 자격을 획득했다. 바야흐로 선학원은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려는 애국불교인들의 본거처가 되었고, 사부대중이 끊임없이 운집하는 도량이 되었다.

참고 문헌 ----- 
- 선학원, 《재단법인 선학원 약사》, 1986.
- 민족사, 《한국근세불교백년사》 1·2, 복간 1쇄, 1994.
- 김상웅, 《만해 한용운 평전》, 3쇄, 2011.
- 〈동아일보〉 1926년 6월 9일자 기사.
- 〈불교닷컴〉 2018년 11월 5일자 기사.
- 대법원 민사 1부 <판결문>, 1955. 7. 28.
- 서울 고등법원 민사 2부 <판결문>, 1954. 9. 27.
- 서울지방법원 민사 3부 <판결문>, 1953.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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