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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侵略)의 아첨꾼을 보종(保宗)으로 질책
2018년 12월 06일 (목) 15:38:47 한국불교선리연구원 budjn2009@gmail.com



선학원의 시원이라 할 보종운동(保宗運動)인 임제종 창시가 만해 용운스님을 위시로 사부대중의 활발한 참여로 전개되었던 1911년 이래로, 1921년의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 상량과 준공, 1922년의 ‘선우공제회’ 창립을 돌이켜 보건대, 건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절은 참으로 예사롭지 아니하다.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의 준공과 입주 이래로 재단법인 설립의 법률요건을 갖추는 한편, 선학원은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지 않고자 1922년에 범어사에 신탁등기(信託登記), 이후 1934년 12월 5일에는 만공 월면스님을 초대 이사장으로 하여 선학원은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의 명칭으로 재단법인으로 전환하였다. 역대 이사장으로는 성월 일전스님, 초부 적음스님, 경봉 정석스님, 석주 정일스님, 청담 순호스님, 대의 동원스님, 노노 대휘스님, 향곡 혜림스님, 동일 벽암스님, 효일 범행스님, 법원 진제스님, 남산 정일스님, 성파 도형스님을 거쳐 지금의 정산 법진스님까지 이른다.


재단법인 선학원 제 13대 이사장 효일 범행스님이 1986년에 발행한 《재단법인 선학원 약사》첫문장에 선학원의 시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선학원의 시원(始原)은 경술년(1910) 국치가 있었던 직후인 신해년(1911) 정초부터 비롯된다. 경술년(1910) 8월 29일, 순종황제의 조칙으로 한일합병조약문이 공포되고, 4개월 보름이 지난 신해년(1911) 1월 15일, 지리산 송광사에서 전라남도 지리산 일대의 승려들이, 한용운, 진진응, 김종수, 김벽운, 김계산, 박한영 사(師) 등의 창도(唱導)에 따라 집회하고 한국불교가 임제종임을 천명하면서, 송광사에 ‘조선임제종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 - 《선학원 약사》 中 전문 일부

‘창도(唱導)’란 교법을 주창하여 사람들을 불도로 이끈다는 의미다. 호남과 영남 이어 수도권을 포함하여 교세를 펼쳤던 임제종 운동은 불교청년운동과 종지 수호의 차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근대불교의 정신을 각성하게 해준 불교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조선불교계를 일본불교계에 예속 시키려는 시도는 경술국치 직후부터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선학원 약사》에서 명명되었듯이 ‘침략(侵略)의 아첨꾼 이회광’은 1910년 10월 6일, 이회광은 원종 대표를 자처하며 일본조동종과 7개조로 된 연합맹약을 체결하였다. 개종역조(改宗易祖)의 이 연합에 대해 우리 불교계의 선각자들은 정면으로 부정하였는데, 바로 한국불교의 보종(保宗)을 위한 ‘조선불교임제종’ 창립이다. 선각자들은 ‘조선불교는 임제종이므로 일본의 조동종과 병합될 수 없다.’는 논리로 원종의 행태에 대해 ‘매교(賣敎)’라 맹렬히 비판하였다.

한용운 스님이 ‘보종운동(保宗運動)’이라 일컬었던 조선불교임제종 태동의 과정을 살펴보면, 처음 진진응 스님·박한영 스님·김종래 스님 등이 1910년 11월 16일(음력 10월 15일)에 광주 증심사에서 집회를 준비, 참여인원의 부족으로 인하여 대회를 연기하게 되었다. 이후 한용운 스님·오성월 스님이 격문을 각 지역에 격문을 보내어 적극적으로 동참을 호소, 순천 송광사에서 영남과 호남의 승려를 모아 1911년 1월 15일에 1차 총회를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같은 해 2월 11일, 새로운 종단을 세우기로 결의한 바, 송광사에서 임제종 종무원 발기 총회가 개최되었으니, 이 것이 바로 임제종 종무원의 시작이다.

종단의 관장으로 선암사의 김경운 스님을 투표로 선출하였는데 스님의 연세가 연로하신 까닭에 서무부장으로 한용운 스님이 관장대리가 되어 종무를 보았다. 1911년 3월 16일에 관장대리로 활동하던 한용운 스님은 종무원 원장으로 취임, 하동의 쌍계사(雙磎寺)에서 1911년 5월 5일에 개최된 제2차 총회에서 임제종지(臨濟宗旨)를 널리 천양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범어사가 임제종에 가담함과 동시에 임제종 종무원을 범어사로 옮기는 한편, 각 지역에 포교당을 지어 종단의 확장을 모색하며 임제종지(臨濟宗旨)를 선양하였는데, 동래와 초량, 광주, 대구와 서울 등지에 포교당을 건립하여 급격히 그 종세(宗勢)를 확장했다.

이어 범어사 주지로 재임 중이던 오성월 스님은 서울 사동(寺同, 현재의 인사동)에 가옥 1동을 매입, 4월 10일에 포교당이 준공되었고 다음 달인 5월 26일에 ‘조선임제종중앙포교원’의 간판을 걸고 개원식을 봉행하여 임제종 종무원 사무소는 서울로 이전하게 된다.

당시 개원식에서는 주무자로서 한용운 스님이 건립 과정과 포교당 개설의 취지 그리고 임제종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였고 백용성 스님은 개교사장(開敎師長)으로서 교리 설법을 했다.

그러나 한 달 후인 6월 26일, 개원한지 한 달 만에 사찰령을 빌미로 총독부는 강압적인 조치를 취해 강제로 간판을 내리게 하는 한편 임제종이라는 칭호의 사용을 금지 당했다. 일제의 사찰령은 1911년 6월 3일에 전문 7조와 부칙이 반포, 시행규칙은 동 7월 8일에 공포 된 것이다. 일제는 임제종의 수장인 한용운 스님을 포교의 주무로 체포하였고, 경성 지방법원의 검사국으로 압송하여 6월 21일에 유죄로 선고하였다.

임제종 측에서는 사찰령 밖에서 한국불교를 전승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여 시작한다. 명칭을 ‘조선선종’으로 변경하고 포교당의 명칭 역시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변경하여 유지하였다. 범어사 주지 오성월 스님은 한국불교의 종명을 임제종으로 해야 한다고 줄곧 주장한 바, 범어사의 공문에는 임제종의 본거지임을 기재하던 중, 일제의 강압조치에 의해 이마저 결국 금지 당하게 된다.

현재의 인사동에 해당하는 사동에 위치했던 ‘임제종중앙포교원’은 ‘조선불교임제종중앙포교원’·‘조선임제종중앙포교원’·‘조선선종중앙포교당’·‘범어사교당’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는데. 나라를 걱정하고 불교를 수호하고자했던 선지식의 집회장이었다.

“임제종포교원 간판을 내리고, 범어사교당이라는 이름으로 존속되었던 인사동의 그 포교당은 그로부터 10년간 우국애교(憂國愛敎)하는 이 나라 선지식 들의 집회장이 되었다. 송광사에서 임제종 임시사무소의 설치를 주도했던 한용운, 진진응, 김종수, 김벽운, 김계산, 박한영 등의 선사들과 백용성, 오성월, 송만공, 강도봉, 김석두, 한설제, 김남전 선사 등이 여기서 모여 선풍을 진작시키고 민족의 전통을 지켜 나갈 방법을 숙의(熟議)하였다.” - 《선학원 약사》 中 전문 일부.

우국애교(憂國愛敎)의 움직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조선불교선학원본부’의 창건으로 이어진다. 서울 안국동 40번지에 선학원 본부가 1921년에 창건되었는데, 선학원 설립을 위한 보살계 계단 개최가 5월 15일에 봉행된 이래, 동년 8월 10일에 선학원본부를 기공하여 10월 4일에는 상량식을 거행하고 11월 30일에 준공하게 된다.

1919년 독립운동당시 33인 가운데의 한사람이자 이판계(理判系)의 지도자인 만해스님은 3·1운동의 주동자로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시기가 서기 1921년이다. 이때 김남전 스님 등 민족불교선각자들은 만해스님을 중심으로, 당시의 친일성향의 사판계(事判系)에 대응하여 이판계의 수도원(修道院)을 1921년에 창립하고자 신도 최창훈 외 다수로부터 기부를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의 상궁들의 보시와 아울러 사동(인사동)에 포교당을 마련해 주었던 범어사의 도움으로 서울 안국동 40번지 190평에 목조기와집이 건축된 바, 부동산소유권 및 선학원 건립배경(이판계 수도원의 창립 연기)에 대한 법원의 ‘판결사실과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강도봉(석왕사포교당 포교사), 김남전·김석○(범어사포교당 포교사) 등은 기미독립운동 당시 ‘33인 중의 1인’이며, ‘이판계의 선종의 지도자인 한용운이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단기 4254년도(1921)에 출옥하게 되자 동인(同人)을 중심으로 한, 사판계에 대응하여 ’이판계의 수도원(을) 창립하고자 신도 최창훈 외 다수인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서울특별시 안국동 40번지 대지 190평을 매입한 후 동 대지상에 목조기와집을 건축, 그 당시 범어사에서 인사동포교동(범어사포교당)을 폐지 철거하고 옛 목재와 기와 약간을 (선학원) 건축에 기증” - 《부동산소유권리이전등기절차이행청구 판결문》 中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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