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라만상이 생주이멸(生住異滅)하지만,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절정의 순간에 사라진다. 단풍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한껏 도취된 황홀감과 스러지는 낙엽이 던지는 무상감이 교차하는 계절이다. 이 녘엔 한국의 산사만큼 아름다운 곳도 없다. 고려시대에 한국풍수에 따라 3,800곳의 비보사찰이 앉았던 자리가 모두 경승지다. 빨강, 노랑, 갈색, 초록 잎이 어우러진 숲을 품고서 대웅전이 넉넉히 자리했는데, 둥그런 능선을 배경으로 수직의 탑이 깨달음의 세계인 듯 청정한 하늘을 향해 치고 오르고, 일주문 옆으로 흐르는 냇물엔 단풍이 가득한데, 당목 위에 살포시 앉은 나비마저 적막감을 더한다.

하지만, 거기서 더 발을 옮기면 안 된다. 지상천사로 여겨 사모하고 그리던 여인이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악행을 목격하고는 좌절하는 청년의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발걸음을 옮겨 절 안으로 들어서면, 그리 거룩하게만 느껴지던 스님이 부처님보다 돈을 더 섬기고 낮은 지위의 스님과 재가불자들에게 왕으로 군림하고, 심지어 삼보정재를 도박과 향락에 소비한다. 염불과 수행은 뒷전이고 기도비, 불전함, 인등비, 재, 특별 불공, 문화재 유지 및 보수 지원금, 입장료 등 돈될 일에만 혈안이다. 주지가 거의 모든 권력과 재정을 독점하고, 힘없는 노승들은 병에 걸려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어린 스님들은 책조차 살 돈이 없다. 신자들 또한 타인의 깨달음과 열반이 아니라 자신만의 이기적인 복락을 위하여 기도한다.

어떻게 아름다운 절, 절다운 절을 회복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갈마(karma) 전통의 복원이 급선무다. 원래 공화주의나 그런 정치 집단을 뜻하는 승가(僧伽)는 모든 안건을 대중의 동의를 통하여 처리하는 민주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렇게 승가의 찬성과 반대를 묻는 대중공사를 갈마라 한다. 행사를 알리는 단백갈마, 안건을 한 건 올리고 구성원 전원이 참여하여 한 차례 논의하여 안건을 의결하는 백이갈마, 올린 안건을 세 차례에 걸쳐 의논하는 백사갈마가 있었다. 이제 갈마에 대의민주제만이 아니라 숙의민주제와 참여민주제를 결합하여 여법하면서도 21세기 사회에 부합하는 제도를 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한 전제는 사찰운영위원회의 민주화다. 주지와 다른 운영위원, 스님과 재가불자 사이에 권력이 비대칭일 경우 사찰운영위원회는 큰스님이나 주지의 의사를 추인하는 형식 기구로 전락한다. 출가자와 재가자가 1:1이 되도록 구성하고 주지가 아니라 사부대중 모두가 참여하는 선거를 통하여 운영위원을 선출하고 모두에게 동등한 권력을 부여한다.

이렇게 만든 사찰운영위원회에서 가장 먼저 실행할 일이 수행과 재정의 분리다. 출가자는 수행과 포교에만 전념하고, 재정의 운영은 재가불자 중 전문가에게 맡긴다. 재산의 획득과 증식, 재정의 지출은 불교 교리와 계율, 윤리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일에 한해서만 허용하고 감사체계를 확립하여, 전문화와 투명화, 상호견제의 원칙을 준수한다. 나아가 구성원 모두가 주지/비구 독점체제를 깨고 4부대중이 모두 평등한 청정 승가 공동체를 구현하는 제도와 청규, 삶과 문화를 만드는 데 동참한다.

아울러, 암자불교, 자폐종교에서 벗어나 절을 수행 도량과 보살행의 실천처로 만들어야 한다. 내가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하더라도 고통 받는 중생이 있는 한 아직 부처가 아니며, 그를 구제하여 열반에 이르게 할 때 부처가 된다. 절 안에서 사성제와 연기법을 깨닫고 삼독(三毒)을 없애는 수행을 하고 팔정도를 실천하여 깨달음과 열반에 이르되, 절 밖의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여 중생구제를 행한다.

연꽃이 아름다운 산록이 아니라 진흙창 속에서 피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쓰레기장에 덜렁 판잣집이라 하더라도 거기 우러를 큰스님 한 분만 계신다면 금강산보다 더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제 고승대덕이 나올 수 있는 토대와 시스템, 문화를 만들 때다.

다음 가을엔 내면이 단풍보다 더 아름다운 절을 보고 싶다.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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